166화
고강후가 절벽 아래 바위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었다.
그 앞에 도천대 무인 둘이 비틀거리며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 주위에는 우사를 비롯한 사사천 오사와 혈사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고강후의 복부에는 쇠꼬챙이 같은 검이 꽂혀 있었다. 왼쪽 어깨는 탈구됐는지 축 늘어졌다.
고강후의 앞을 막는 무인들도 전신이 피투성이다. 무복은 갈가리 찢어져 넝마에 가까웠다.
고강후를 포위한 오사 역시 성한 이가 없었고, 혈사대도 몇 명 남지 않았다.
수십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주위를 둘러보는 무한의 시선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혈사대주였는데 가슴이 뻥 뚫려 죽어 있었다.
무한을 보자 고강후의 눈에 잠시 희망의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무한이 자신을 구할 이유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오사는 크게 당혹해하였다. 혈사대를 갈아 넣어 거의 다 잡은 고강후를 놓칠 판이었으니.
무한의 등장으로 싸움은 잠시 멈췄다.
무한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오는 무한을 향해 우사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부주, 모른 척 하게!”
그는 도천부와 무한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래서 무한이 고강후를 구하러 왔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멈춰라!”
몽사도 두 눈을 부릅뜨고 외치며 무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여전히 등 뒤에 쌍도끼를 매고 있었다.
나머지 삼사도 무한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한 사람은 기다란 장검을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장창을, 마지막 사람은 고리가 달린 도를 들고 있었다.
스르릉.
무한이 등 뒤의 검을 뽑았다.
우사의 얼굴이 굳었다.
몽사를 비롯한 나머지 삼사가 무한의 주위를 포위하였다.
그 와중에 몇 남지 않은 혈사대는 더욱 거칠게 도천대 무인을 몰아붙였다.
“크윽!”
도천대 무인 한 명이 쓰러졌고, 나머지 한 명도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을 뿐이다.
무한이 고강후를 향해 몸을 날리려는데, 장창이 머리를 노리고 찔러왔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장창에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무한이 검을 비틀어 장창을 튕겨내려는 순간, 장창이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하더니 곧바로 하복부를 노리며 들어왔다.
무한을 노리는 건 장창만이 아니었다.
검과 도가 옆에서 들이닥쳤고, 뒤쪽에서는 몽사의 막강한 권풍이 몰아쳤다.
채채챙!
무한이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장창과 검, 도를 쓸었다.
따다당!
무한과 사사(四邪)의 경기가 뒤섞이며 기파가 터지고, 암경이 비산하였다.
사사천 칠사는 오랜 기간을 함께 하였고, 그중 오사는 무수한 고수를 합격으로 죽였다. 그러기에 무한을 당장 쓰러뜨리지는 못하지만 발을 묶어 둘 수는 있었다.
무한은 오사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특히, 우사에게는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살수를 쓰는 대신 강공으로 밀어붙여 뒤로 물리려 했다.
우사는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왼쪽의 의수를 들어 마지막 남은 도천대 무인을 겨냥했다.
철컥, 쉬식!
비침이 날아가고, 도천대 무인이 쓰러졌다.
이제 고강후를 호위하는 자는 모두 사라졌다.
고강후가 도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쇠꼬챙이 검이 박힌 복부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쉽게 죽어줄 수는 없지.”
고강후가 이를 악물고 혈사대와 우사를 노려봤다.
두 손으로 도를 쥐고 우사를 노려보는데, 우사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협곡은 여전히 혼전 중이다. 그 아수라장을 가르며 한 사람이 날아왔다.
순식간에 다가온 이가 쿵, 하고 착지하였다.
‘신악강?’
나타난 이는 도천대주 신악강이었다.
그 순간, 무한이 전신 공력을 끌어 경천십이식 팔황격을 펼쳤다.
콰콰쾅!
뇌우가 팔황에 몰아치듯 격렬한 기의 폭풍이 터지자 무한을 에워싸고 있던 사사가 일제히 튕겨 나갔다.
“으윽!”
사사는 무한의 무위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지난번 흑수애에 왔을 때와 차원이 달랐다.
“…….”
싸움이 다시 소강상태에 들었다.
도천대주 신악강이 형형한 눈빛으로 오사와 무한을 쓸어보았다.
피를 많이 흘린 고강후는 혼미한 정신을 추슬러 앞에 선 자를 봤다. 그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솟았다.
“아! 신 대주, 마침 잘 왔네.”
신악강 역시 격전을 치른 듯 옷에 피가 묻어 있었으나 모두 남의 피였다.
신악강은 고강후는 돌아보지 않고 무한을 향해 말했다.
“검천부주가 무슨 일인가? 설마 도천부를 구하러 온 건가?”
신악강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빛이 스쳤다.
우사를 비롯한 오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천부주 고강후를 잡는 쾌거를 올리기 직전 무한에 이어 도천대주까지 나타났다.
신악강은 단순한 무력대 대주가 아니다. 도왕의 오른팔이자 역전 노장이다.
신악강이 오사를 쓸어보며 말을 이었다.
“설마 한패는 아니겠지?”
고강후가 말했다.
“아니, 검천부주는 나를 구하려 했네. 두 사람이라면 이들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걸세.”
신악강이 몸을 돌려 고강후를 향해 다가갔다.
“부축할 필요는 없네. 저들만 막아주면…….”
고강후가 부축을 하려는 줄 알고 손을 저었는데 신악강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존속을 살해하려 한 죄는 용서할 수 없지.”
뜬금없는 신악강의 말에 고강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신악강의 도가 자신을 향한 걸 보고 크게 경악하였다.
“무슨 짓인가?”
고강후도 화경의 고수,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있는 힘을 쥐어짜 옆으로 피하며 소리쳤다.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소리지.”
신악강이 냉랭하게 대꾸하고는 도를 옆으로 쓸었다. 고강후의 허리를 양단할 기세였다.
그때 무한이 소리쳤다.
“우사, 그를 막아!”
우사가 자기도 모르게 의수를 들어 비침을 날렸다.
쉬쉬쉭!
비침이 신악강을 쓸었다.
우사는 마침 발아래 떨어져 있는 장검도 차올렸다.
쉬익!
장검이 빠르게 신악강을 향해 날아갔다.
“흥!”
신악강이 도를 내리찍자 비침과 장검이 경기에 휘말려 맥없이 튕겨나갔다.
동시에 무한이 고강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신악강이 한 수 빨랐다. 커다란 도가 고강후의 가슴을 사선으로 갈랐다.
퍼억!
가슴과 복부를 보호하던 보호구가 갈라지며 도기가 가슴을 갈랐다.
“크읍!”
고강후가 울컥, 피를 토했다.
신악강은 차마 목을 치지는 못하겠는지 스르륵 무너지는 고강후를 외면하고는 몸을 날렸다.
우사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저놈, 도천대주 아니었어? 주군을 죽이다니?”
무한이 무너지는 고강후를 부축하고는 가슴 요혈을 찍어 지혈하였다.
“크읍…….”
고강후가 피를 토하며 짐승 같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으윽, 신악강이 나를…… 왜?”
두 분을 부릅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신악강이 사라진 쪽을 봤다.
무한이 탄식하였다.
“도천대주는… 도왕의 명을 받고 당신을 처결한 거요.”
“아버지가? 그게 무슨 개소리란 말이냐?”
“도왕은 당신이 자신에게 미혼고를 썼다고 생각하고 있소.”
“크으… 뭐라고?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고강후가 억울하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당신이 천하제일인에게 천일고를 썼소?”
고강후의 눈이 흔들렸다.
“천일고? 천일고였구나…….”
그러더니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늘 궁금했다. 대체 무엇이 천하제일인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순간, 무한은 고강후가 철저히 손우자의 손에 놀아났음을 깨달았다. 과시하기 좋아하고 욕심이 많은 고강후의 성격을 손우자가 이용한 것이다.
도왕은 물론 자신마저 고강후를 흉수로 여겼는데, 정작 고강후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불쌍한 자였다.
“끄르륵…….”
고강후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이제 피를 토하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고강후가 중얼거리다 갑자기 크게 울부짖었다.
“으허허!”
그러고는 푹, 고개를 떨궜다.
천하사패 도천부의 주인이라기에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우사가 다가왔다.
“머리를 주게.”
고강후의 머리를 잘라가겠다는 뜻이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시신은 훼손할 수 없소.”
“그렇다면… 이건 회수하겠네.”
우사가 고강후의 복부에 꽂힌 쇠꼬챙이 같은 검을 뽑았다.
“이거… 내 검은 아냐. 하지만 누군가 나를 의심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회수하는 거야.”
걱정이 많은 우사가 중얼거리며 검을 뽑다 살짝 비틀어 고강후의 오른손 엄지를 잘랐다.
“싸우다 손가락 하나 잃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
우사가 고강후의 엄지를 챙겼다. 머리를 못 가져가는 대신 손가락이라도 챙겨 피전격에게 보여줄 생각인 모양이다.
무한은 굳이 오사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오사 역시 무한의 신분을 아니 싸우려 들지 않았다.
“언제고 제대로 붙을 날이 있을 것이다!”
몽사가 윽박지르고는 나머지 사사를 따라 사라졌다.
무한이 고강후의 시신을 내려다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에 정신이 들었다.
협곡은 여전히 혼전 중이다.
무력대 간의 싸움은 전쟁과도 같다. 지휘할 장수를 잃은 도천대와 천하방 무인들은 후퇴할 수도 없었다. 함부로 물러났다가 명령을 어긴 죄로 처형될 수도 있다.
멀리 남궁우가 흑천도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한이 고강후의 시신을 옆구리에 낀 채 한 발을 내디뎠다.
쿠쿵!
기파가 터지며 협곡이 진동하였다.
화경에 이른 공력을 단번에 터뜨린 무한이 곧바로 몸을 솟구쳐 날아올랐다가 혼전의 한가운데 떨어졌다.
쿠쿵!
다시 한 번 기파가 터지자 난전을 벌이던 이들이 주춤하였다.
협곡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무한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시신에게 향했다.
“아니, 도천부주가!”
“군장(軍將)!”
흑천 정벌에 나선 문파의 수장들과 참모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무한이 고강후의 시신을 그들에게 넘겼다.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의 표정은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우사의 유인책에 말려 홀로 적진 깊숙이 들어간 고강후가 시신으로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천하방도들이 응집하며 진을 이루자 흑천도 역시 십여 장 거리를 두고 무리를 지어 섰다.
선두에 있는 자는 무척 음산해 보이는 중년이었는데 특이하게 생긴 기다란 장검을 들고 있었다.
무한이 장한을 향해 말했다.
“오늘의 승패는 이미 갈렸소. 이쯤에서 멈췄으면 하는데?”
“너는 누구냐?”
“심무한.”
무한이 자신을 밝히자 흑천도들이 술렁거렸다.
무한의 신분은 강호에 빠르게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제일인의 손자이자 흑천의 하늘 흑천노조의 외손자라는 신분은 유례가 없는 사안으로 일대 화제였으니까.
그러나 고강후와 접전을 벌이는 흑천은 사사천 소속이었다. 사사천은 흑월과 경쟁관계였고 어느 면에서는 천하방보다 더 앙숙이기도 했다.
장한이 코웃음을 쳤다.
“신분을 밝히면 순순히 물러날 거라 생각했나? 그렇다면 오산이지.”
무한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너는 누구냐?”
“흐흐. 이 몸이 바로 혈륜도(血輪刀) 조충경 어르신이다.”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
마치 아랫사람의 원을 들어주겠다는 듯한 무한의 하대에 조충경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어린놈이 배경만 믿고 방자하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네놈의 목이다!”
그러자 언제 다가왔는지 남궁우가 무한 옆에 와서 말했다.
“혈륜도는 무슨… 저자는 장강에서 수적질하던 놈이야. 본가에서 쫓자 흑천에 의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