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권왕은 말을 하는 도중에 누군가 자르고 들어온 경험이 많지 않은 듯했다. 약간 불쾌한 시선으로 무한을 보다 다시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흔히 욕망이란 게 마음 때문에 일어난다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몸이 원하는 거지. 식욕과 같이 직접적인 것도 있지만, 권력욕도 마찬가지, 몸이 원하는 거야.”
권왕은 말을 하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걸쳐 두었던 웃옷을 입고 머리 매무새를 만지는 등 뭔가를 하면서 툭툭, 내뱉듯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단정히 하더니 무한의 앞에 섰다.
“몸을 단련하면 욕망을 관리할 수 있지.”
“…….”
“역시 그랬군. 그래서 뭐라고 했나?”
“확답하지 않았습니다.”
“들어가서 이야기 하지.”
권왕이 성큼성큼 걸어서 연무장 옆에 전각으로 들어갔다.
전각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거실이 나왔는데 탁자에 탕약과 단과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앞으로 무한의 것으로 보이는 따끈한 차도 놓여 있었다.
“앉지.”
권왕은 자리에 앉아 탕약을 죽, 들이켜고는 단과자를 하나 입에 넣었다.
“욕망도 그릇이 있어. 고 이형은 천하방을 담을 그릇이 못되지. 자신의 무공에만 집착하거든.”
“…….”
“그는 자신이 이인자라는 사실에 매여 있어. 심 대형에게 패한 후 그는 경천신검을 넘어서는 도법을 만드는 데 전념했지.”
권왕이 커다란 손으로 단과자를 집어 먹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아들에게까지 배신을 당하지. 지금 천하방은 엉망진창이야. 장로전 늙은이들은 지들이 잘난 줄 알고 있지, 군사부 놈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헛꿈이나 꾸고 있고…….”
권왕이 개탄하며 말했다.
“솔직히 나는 천하방 권력에 관심 없어.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지. 천하방은 우리 사형제가 피를 흘려가며 이룩한 거야.”
“그래서 나서실 참이군요.”
“그래.”
권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은 깊고 서늘했다.
“내 뒤에 서라. 그러면 십 년 후 네가 천하방주의 자리에 오를 것이야.”
천하방 권력을 잡고 무한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다.
“무력으로 권좌를 얻는 건데 방도들이 수긍하겠습니까?”
“무력? 무력이 필요하면 써야겠지. 하지만 우선은 수순을 밟아야지. 천하방의 전신은 사천방이었어. 심 대형에 이어 고 이형, 그리고 내게 이어지는 건 당연한 거야. 강 삼형(三兄)이 멀쩡했다면 그가 맡았을 수도 있었겠지.”
권왕은 자신만의 논리가 있었다.
“고강후는 이번 원정에서 실패할 거야. 죽을 수도 있지. 희생이 크면 클수록 고 이형과 도천부의 무능이 드러나고, 대안을 찾겠지.”
무한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역시 손우자와 손을 잡고 있군.’
도왕과 손우자, 그리고 권왕까지 모두가 고강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그 대안은 내가 될 거야. 그리고 나는 자네를 후계자로 삼겠네. 지금 이 자리에서 답을 하게. 나는 고 이형처럼 참을성이 많지 않아.”
권왕은 참을성이 없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후계자란 커다란 미끼를 흔들며 바로 물도록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하고자 하는 바와 길이 다릅니다.”
“네가 하고자 하는 바? 그게 뭔데?”
“천하방을 해산할 겁니다.”
단과자를 집던 권왕의 손이 멈칫하였다. 권왕은 무한을 응시하다,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천하방을 해산한다고? 심 대형의 손자가?”
웃음을 그친 권왕이 무한을 노려봤다.
“할아버지의 위업을 무너뜨리는 손자도 있나? 역시 흑천의 간계였던 건가? 흑천노조가 그리 하라던?”
“제 의지일 뿐 흑천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으음. 그걸 누가 믿겠나.”
권왕이 눈빛이 번뜩였다.
“신분패를 돌려준 의미가 그것이었나?”
“…….”
무한이 침묵하자 권왕도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권왕이 입을 열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된다. 다만, 나는 거치적거리는 건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만 알아둬라.”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그런데, 천하방을 해산하겠다는 이유가 뭐냐?”
권왕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한이 권왕의 시선을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할아버지의 뜻이자 제 뜻입니다.”
“심 대형의 뜻이라고?”
권왕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무한은 말없이 돌아서 나왔다.
“모두 길 떠날 준비를 해.”
검천부로 돌아온 무한은 남궁우와 형소, 강소소에게 이르고 바로 행장을 꾸렸다.
남궁우가 물었다.
“어디를 가려고.”
“귀주. 고강후가 위험해.”
“그래서?”
“구해야지.”
“아니, 그를 왜 구해?”
남궁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강후는 무한의 원수다.
“어쩌면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허수아비였을 수도 있어. 게다가 지금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이지.”
무한이 자신의 생각을 남궁우에게 들려주었다.
워낙 복잡하고 미묘한 사안이라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었으니 검증 차 들려준 것이다.
“그러니까 고강후가 검신이나 도왕에게 고를 쓴 게 아니고 누명을 썼다, 이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높아. 만일 고강후가 독수를 썼다면… 도왕이나 내가 아직 살아 있을까?”
만일 고강후가 직접 손을 썼다면 도왕이나 무한이 살아있는 게 두려워서라도 끊임없이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손우자는 고강후가 경천신검을 탐내느라 자신을 살려두었다고 했다. 그건 손우자가 죽이자고 하는데 반대했다는 뜻이다.
고강후가 범인이라면 경천신검 때문에 후환을 남겨두려 했을까?
아니, 제 아버지인 도왕 고진에게 고를 썼으니, 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뒷감당이 두려워서라도 뭔가를 했을 것이다.
“고강후가 죽으면 천하방은 바로 권력암투의 장으로 바뀔 거야.”
무한은 짐을 다 꾸리고 소소를 찾았다.
“다 챙겼어. 떠나면 돼.”
소소는 천하방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하고 있었다. 그건 형소도 마찬가지다.
“너희 둘은 감숙으로 가야 해.”
“뭐?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지금 마천과 싸우러 가는 무력대가 몰살당하게 생겼어.”
“뭐?”
무한이 손우자의 흉계를 이야기해줬다.
“감숙으로 가서 고 대형에게 전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무력대 진군을 막으라고. 그리고…….”
무한이 서찰을 꺼내 소소에게 건넸다.
“이걸 마천 소천주에게 전해줘.”
“헉! 나보고 소마를 만나라고?”
소소가 당황하였다.
“그도 사람이야. 우리와 똑같은! 천하의 소소가 왜 그래?”
“그, 그거야 그렇지만…….”
“수천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형소, 소소를 지킬 수 있지?”
귀왕갑을 입은 형소가 자신의 가슴을 퉁퉁, 쳤다.
“염려 마.”
***
무한은 말을 바꿔가며 귀주로 향했다.
남궁우는 이를 악물고 뒤를 따랐다. 이런 강행군은 난생처음이니 그럴 만도 했다.
‘마적도 아니고 말에서 먹고 자다니…….’
전장(戰場)이 가까워질수록 민심이 흉흉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보통사람 수십 명을 죽일 수 있는 무력대 간의 전쟁이다. 자칫 휘말렸다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을 수 있으니 아예 문 밖 출입을 하지 않는 마을도 있었다.
그렇게 나흘 후, 호남과 귀주의 경계인 흑천과의 접전지역에 들어섰다.
마을마다 떨궈진 부상자들이 있어 본대의 행적을 따라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마지막 마을에서 만난 부상자가 전황을 알려주었다.
“어제 우양현 흑천 소속문파 진양회를 궤멸시키고 귀주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연전연승 중이지요. 고 부주께서 선두에서 적을 격파하고 계십니다. 제가 다치지만 않았어도…….”
부상자의 얼굴에는 뿌듯함과 동시에 아쉬움이 있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손우자의 말대로 고강후가 선봉에 선 모양이다.
‘위험해…….’
무한의 머릿속에 피전격이 웃는 모습이 스쳐갔다.
그는 머리를 쓸 줄 아는 자였다.
아들의 복수와 천하방 후계자로서의 위엄을 보이고자 하는 고강후를 자신의 영역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다.
무한은 말을 바꿔 바로 달려갔다.
우양현을 지나쳐 한나절쯤 달렸을 때, 저 멀리 협곡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늦었구나!’
문득 스치는 직감에 무한이 말고삐를 채어 전속력으로 질주하였다.
두두두두.
어느새 말이 지쳐 속도가 떨어졌다.
휘이이익!
무한이 크게 휘파람을 불며 말 잔등을 차고 협곡으로 날아들었다.
너비가 사 장 정도에 불과한 협곡은 피바다였다.
이미 수많은 시체가 쌓였는데 곳곳에서 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잔혹한 광경에 무한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들었다.
화살과 쇠뇌를 맞은 시신, 장창에 찔려 죽은 시신 등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무력대들은 일반 무인과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군대의 전술에 따라 싸운다고 보면 된다.
강호에서 천시하는 쇠뇌와 화살, 암기 등 온갖 무기로 무장한 무력대는 오로지 적을 죽이는 게 목적이다.
무한이 전황을 살폈다.
한눈에 봐도 천하방이 기습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휙!
무한이 막 천하방도의 머리를 내리찍으려는 흑천도를 걷어차 구해냈다.
“가, 감사합니다, 앗! 검천부주?”
천하방도가 무한을 알아봤다.
“지원대가 온 겁니까? 살았다! 지원대가 왔다!”
치열한 격전을 치른 천하방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한이 온 걸 보고 지원대가 온 줄 알고 소리쳤다.
그런데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지원대가 왔다. 적을 몰살하라!”
“최후의 일인까지 처단하라!”
사기가 올라간 천하방도들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무한이 미친 듯 외치는 천하방도를 붙잡아 물었다.
“고 부주는 어딨소?”
“고 대협? 고 대협은 선봉에 계셨는데?”
천하방도가 휘휘 주위를 둘러보며 뇌까렸다. 싸우느라 방향감각까지 잃은 모양이다.
그 사이에도 흑천도들이 한 무리나 몰려왔다.
스르릉!
무한이 경천신검을 뽑아 땅에 꽂았다.
쿠웅!
기파가 터지며 고수의 왕림을 고했다.
흑천의 무리들은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장창을 든 이들을 앞세워 위협을 하였다.
쉬시식!
무한이 검을 뽑아 그었다.
장창의 창대가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파파팟!
검기가 휘몰아치며 흑천의 무리를 덮쳤다.
“크아악!”
흑천의 무리들이 팔다리를 감싸며 분분히 쓰러졌다.
“뒤로 빠져서 진세에 합류하시오.”
무한이 천하방도를 뒤로 밀쳐 보내고는 그대로 발을 굴렀다.
쿠웅!
다시 한 번 거대한 기파가 터지며 무한이 협곡 깊숙한 곳으로 날아갔다.
협곡 안쪽은 더욱 처참했다.
천하방도의 시신이 즐비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무한이 내려서며 전신공력을 모아 발을 굴렀다.
쿠쿵!
마치 유성이라도 떨어진 듯 거대한 기파가 휘몰아치며 바위와 시신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격전을 벌이던 이들도 무한의 기파에 휘말려 나뒹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협곡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
무한의 시선이 장내를 살폈다.
피바다를 둘러보는 그의 눈길이 더없이 서늘하였다.
“심무한?”
한쪽 벽에서 누군가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