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공손승이 벌건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군사부에 책임을 묻는 게요?”
“다른 곳은 몰라도 천하방 군사부가 거짓소문에 흔들린다면 곤란한 일이지.”
남궁우가 짐짓 우려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군사부 정보체계는 보안사항이오. 부주가 특임감찰이라 하나 흑천과 연관이 있는 한 알려줄 수가 없소.”
“너희 군사부는 그게 문제다. 모든 걸 비밀에 붙이지. 그러니 너희가 무슨 꿍꿍이짓을 벌이는지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니냐!”
은진언이 호통을 쳤다.
감찰단주로서 평소 군사부의 행태에 불만이 많았던 은진언이다. 총군사의 행적이 수상한데 이를 뭉개려 하자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하였다.
“전쟁 중이오. 군사부를 흔들지 마시오!”
공손승이 은진언의 시선을 맞받아 노려보다 휙,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외쳤다.
“문을 닫아라!”
군사부 정문이 닫혔다.
쿠쿵!
은진언이 닫힌 문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하든 감찰단이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둬라!”
무한은 군사부 앞에서 은진언과 헤어져 검천부로 돌아왔다.
군중들이 따라왔다. 그들도 천하방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다.
흑천에 이어 마천과의 전쟁도 앞두고 있다. 이런 시국에 방주가 장로전에 가서 호통을 쳤다는 사실이 흘러나오고, 무한과 군사부가 대립하는 걸 직접 목격하면서 우려는 더욱 커졌다.
도왕과 권왕의 알력설이 솔솔 퍼지는데 도천부 장자 고강후는 아들의 복수를 한다고 귀주로 갔다.
이런 시국일수록 하나라도 더 남보다 빨리 알아두는 게 유리했으니 무한을 쫓아 온 것이다.
검천부에 이르자 무한이 대문을 활짝 열었다.
“모두 들어오시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우르르 검천부 문턱을 넘었다.
무한은 군중들을 검천전으로 이끌었다.
검천전 앞 광장에 이른 무한이 계단에 서서 자신을 따라온 군중들을 보았다.
군중들의 표정을 읽는 것만으로도 천하방 분위기가 얼마나 어수선한지 알 수 있었다.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는 이도 있었고, 호기심에 따라온 이도 있었다. 그중에는 우곽처럼 무한을 염려하여 온 이도 몇몇 있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의도를 지니고 따라온 자들이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구심점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검신 사후 도왕이 방주로 등극했으나 공식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이 장로전에서 결정되어 행해졌고, 그 배후에 도천부와 군사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이가 드물다. 그런 세월이 팔 년여 흘렀다.
무한이 사람들을 쓸어보다 말했다.
“본 부주에 대해 여러 소문이 있었습니다. 군사부가 아니라 여러 방도께 직접 해명코자 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기탄없이 물어보시지요.”
그러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금 도천부 주도로 흑천과 전쟁 중이오. 모든 방도가 합심을 해야 할 이때, 전쟁 명분이 없다니… 나는 아무래도 부주의 의도가 의심스럽소.”
무한이 보니 동천각(銅泉閣) 각주로, 대표적인 도천부 지지파였다.
동천각은 멀리 강동에 있는 문파인데 흑천과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각주가 직접 달려왔다.
그의 주위에는 도천부 지지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무한을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게 분명했다.
‘고강후가 없는데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이가 누구지?’
도천부 삼형제 중 고강후가 직접 출전하였고, 고동후 역시 무력대를 끌고 지원을 나갔다. 남아 있는 이는 둘째 고련후다.
무한이 고련후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동천각주 위자명의 말에 답했다.
“천하방의 설립 취지를 아십니까?”
“…천하의 안위를 지키고자 함이 아니오?”
“맞습니다.”
무한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하여 선공을 취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이 되는 걸까요? 그게 허용이 된다면 천하방은 흑천이나 마천과 다를 바 없는 집단입니다.”
“아니, 무슨 말을!”
“부주, 말씀이 지나치시오!”
여기저기서 반발이 나왔으나 무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키고자 할 때 주저 없이 일어나 싸우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덮어씌우고 공략한다면, 흑천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진중한 음성이 장내에 퍼졌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원 무림이 천하방을 지지하는 것은 정도의 보루이기 때문이지, 선봉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천하방은 수많은 분쟁을 예단하고, 이에 개입해왔습니다.”
“…….”
“그 결과 천하방은 모두가 경원시하는, 중원 무림에 군림하는 방파가 되었지요.”
“그게 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거요?”
동천각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힘이 있는 자가 지배한다. 그게 오랫동안 무림을 관통해온 사고방식이었다.
모인 이들 역시 무림인들로 이 같은 사고방식에 익숙했다. 무한의 말이 오히려 생경하게 들렸다.
동천각주는 아예 대놓고 비웃듯 말했다.
“부주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험한 강호를 모르는구려. 천하방이 없었으면 지금 중원이 어찌 되었겠소? 도처에서 피가 튀는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이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천각주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습니까? 천하방 소속인 여러분들께는 그리 보였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무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지 않은 곳도 그리 생각할까요?”
동천각주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강호의 생리가 아니겠소?”
“천하방은 애초에 강자를 위한 방파가 아니었습니다. 약자를 지키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무한이 딱, 잘라 말하자 동천각주가 눈을 부릅떴다.
“나는 천하방을 위해 지난 이십여 년 혼신을 다했네. 그런 나를 이제 막 부주에 오른 자네가 가르치려 드는가?”
무한이 내심 탄식을 하였다.
동천각주는 진심으로 분개하고 있었다. 자신의 지난 세월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천각주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결국 천하방은 패권집단이었던 거야.’
처음부터 그랬는지 검신 사후에 바뀌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무한이 침묵을 지키자 동천각주를 위시한 도천부 지지파가 목소리를 높였다. 급기야 무한을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천하방을 배척한다면 검천부는 떠나야 한다!”
“경험이 없으면 선배들에게 배워야지. 감히 천하방의 기틀을 흔들려고 해!”
그때, 혼원문주가 앞으로 나섰다.
“조용하시오!”
혼원문은 천하방에서 입지가 탄탄한 문파다. 혼원문주가 나서자 아우성이 잦아들었다.
“나 역시 자네의 주장에는 공감하기 어렵네. 하지만 지금 전쟁이 확실히 이상하다는 건 동감하고 있지.”
혼원문주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너무 급작스럽게 전쟁이 벌어지고 있소. 게다가 두 곳에서의 전쟁이라니! 이 전쟁으로 무얼 얻고자 함이오? 아니, 과연 누가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소?”
“마천과의 전쟁은 이미 천하대전에서 결정된 것이잖소!”
도천부 지지파에서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다른 한쪽에서 반박이 나왔다.
“흑천과의 상황이 이리 되었다면 연기했어야 했소!”
한번 물꼬가 트이자 검천부 앞은 난상토론의 장이 되었다.
의견이 갈래갈래 갈리며 심지어 당장이라도 멱살잡이를 할 듯 언쟁을 높이는 이들도 있었다.
남궁우가 무한에게 말했다.
“천하방은 참 복잡하군. 세가 같으면 가주가 한마디 하면 끝인데 말야.”
“이런 분위기가 천하방의 강점이었던 시절도 있었을 거야.”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수많은 의견을 수렴하여 내린 결론이 꼭 옳거나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두가 동등한 한 형제라는 유대감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로가 막혔고, 수뇌부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암투를 벌이고 있으니, 각 문파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토론을 하는 군중들을 보던 무한이 형소에게 말했다.
“만재당에 부탁해서 천막과 인력을 동원할 수 있겠어? 자금은 검천부에서 대지.”
“왜?”
“저렇게 서서 이야기하게 놔둘 수는 없잖아.”
“그거야, 어렵지 않지.”
형소가 나는 듯이 달려갔다.
“술과 음식도 있어야겠지?”
소소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재당 인부들이 천막과 간이 탁자와 의자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들은 익숙한 솜씨로 천막을 치고 탁자를 배치하였다.
이어서 집화각주 신이화가 하인들과 함께 나타나 술과 음식을 깔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는데 사람들은 계속 몰려들었다.
검천전에서 난상토론 연회가 벌어진다는 소문이 퍼지며, 삼삼오오 무리지어 몰려왔다.
격앙되었던 토론도 술과 음식이 들어가니 점차 유쾌하게 바뀌어갔다.
어차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들이니, 몸싸움까지 벌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장소가 어딘가.
검신이 머물던 검천전 앞이 아닌가.
“아하하. 그때 이놈이 그러더라고. 다 함께 죽자! 그러면서 적진으로 달려 들어가는데, 이런 미친놈이 없는 거야. 어쩌겠어. 죽었구나 하고 따라갔지.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귀밑머리까지 희끗해졌구만.”
이어서 터지는 웃음소리.
술자리가 무르익자 나이든 이들은 지난날을 이야기하고, 젊은이들은 다가올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즉흥적으로 열린 난상토론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
“아버지가 보자셔.”
형소의 말에 무한이 잠시 생각했다.
형일천 아니라 권왕이 부른 것이다. 형소 역시 이를 아는 듯 무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거절해도 돼.”
“아니.”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권왕과도 한번 만나야 한다. 지난번 신분패를 줄 때 만나지 못했다.
권왕이야말로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인물이다.
“가자!”
바로 검천부를 나섰다.
패천부는 내성 서쪽에 있다.
두 사람이 대문을 넘어서자 패천부 총관이 마중 나왔다.
“권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형소에게 말했다.
“형 공자께서는 아버님께서 찾으십니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한 듯 형소가 눈짓을 하며 말했다.
“나중에 봐.”
권왕은 후원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 수련을 끝낸 듯 웃통을 벗고 있었는데, 칠순의 나이에도 상체의 근육이 폭발할 것처럼 팽팽했다.
다만, 크고 작은 흉터가 수없이 나 있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권왕은 구슬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왔나?”
무한을 흘깃 본 권왕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무한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권왕이 다가오니 마치 벽이 다가오는 듯했다.
“앉지.”
권왕이 연무장 가에 있는 나무 의자에 털썩 앉으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무한이 자리에 앉자 권왕이 말했다.
“고 이형(二兄)을 만났다며? 뭐라던가? 내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던가?”
권왕이 얼굴의 땀을 닦은 수건을 목에 걸치고는 발목에 찬 각반을 풀었다. 무쇠로 된 각반이 철커덩 떨어져 나갔다.
“그거 아나? 육체를 단련하는 것도 중독이 되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 거야.”
권왕은 대답을 원치 않았다. 자신의 말을 이어나가려는데 무한이 잘랐다.
“마치 욕망과도 같군요.”
그러자 권왕이 동작을 멈추고 무한을 보았다. 부리부리한 눈에 형형한 빛이 번뜩였다.
무한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먼저 물음에 답을 드리자면, 예, 죽여 달라 그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