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저, 저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느닷없는 무한의 도발에 일군사 공손승을 비롯한 군사들과 측면에 배석한 부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아우성을 쳤다.
손우자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무한을 쳐다봤다.
“당현전을 살해한 추노가 총군사 사가의 하인이었소.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당신의 수발을 들었던 자였음이 밝혀졌소.”
무한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중하였다.
대전의 소란은 더욱 커졌다.
“감히 총군사를 모함하다니!”
문요가 핏대를 세우며 삿대질을 하였으나 무한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손우자를 주시할 뿐이다.
이윽고 손우자가 손을 들자 모두 입을 닫았다.
말없는 손짓에 군사와 부사들이 주춤하다 자리에 앉았으나 얼굴에 분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손우자가 문요를 향해 물었다.
“군사들 사가 관리는 자네 소관이지, 아마?”
“예. 그렇습니다.”
문요가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내 사가에 추노란 자가 있었다고?”
“그게… 놈이 완벽하게 신분을 위장한 바람에 신원조사에서 거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문요가 반무릎을 꿇고 포권을 하며 죄를 청했다.
손우자가 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렇다는군.’
담담한 시선에는 조롱의 빛이 담겨 있었다.
무한은 개의치 않았다.
“그자의 신분과 살인청부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그놈은 흑천의 밀정이었다. 신분을 위장하여 총군사의 사가에 잠입한 뒤 천하방을 들락거리다 당현전을 살해한 것이지.”
“그런가? 그거 참 기이한 일이군. 이십 년 가까이 사가에 잠복해 있던 자가 고작 당가의 장로를 죽이고 자결하다니.”
무한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일단 해명을 받아들이겠소. 진위 여부는 알아보기로 하지.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소.”
무한은 지금까지 손우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게 아닐까?’
천심공을 운용해도 손우자의 속내가 읽히지 않았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무한 이상의 심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이렇듯 강한 심력을 지녔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약하여 칼자루를 쥘 힘도 없어 보이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라. 그 이면을 봐야 한다.’
무한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했다.
무한이 손우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문요를 바라보았다.
“내가 흑천과 결탁하여 고우를 죽였다고 했던가?”
“그날 흑천의 무력대가 거기에 있었다는 게 입증됐다!”
“맞다. 흑천 혈사대가 왔지. 하지만 그들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것도 알고 있겠지?”
“……?”
무한의 시선이 다시 손우자를 향했다.
“환노란 자가 나타났지. 수하들은 몇 되지 않았는데 무척이나 강했다. 혈사대 대부분이 그의 수하에게 죽었지.”
“…….”
“흑천과 결탁한 것은 아니지만 도움은 받았다. 우사란 자와 합세하여 환노를 죽였으니까. 그런데… 그자가 죽어가면서 이상한 말을 하더군.”
손우자의 표정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누군가를 조심하라고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적이 죽어가면서 조심하라고 하다니…….”
문요가 다시 끼어들었다.
무한은 손우자를 주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내게 그 이름을 들려주었을까 곰곰 생각을 했지. 총군사,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손우자의 미소가 사라졌다.
군사들과 부사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무한과 손우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윽고 손우자가 말했다.
“나도 궁금하군.”
밑도 끝도 없이 툭, 한마디 던지고 상체를 뒤로 기대더니 이번에는 느긋한 시선으로 장내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저으며 말했다.
“모두 물러가 있게.”
군사부에서 총군사는 절대권력이다. 일군사 공손승조차 궁금해 하면서도 아무 소리 못 하고 대전을 빠져나갔다.
손우자의 눈빛이 뱀같이 차가워졌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겠군.”
“네가 한 짓까지도 알고 있지.”
손우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도왕이 뭐라던가?”
“……?”
갑자기 도왕을 거론하자 무한이 흠칫하였다.
“손을 잡자고 했겠지. 큭큭큭.”
손우자가 기괴한 웃음을 흘리더니 말을 이었다.
“안됐군. 허나 늦었다. 이미 피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지.”
“…….”
손우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 벽으로 가더니 줄을 잡아 당겼다.
벽을 가리던 천이 스르륵 벌어지며 커다란 지도가 나왔다.
손우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도를 보며 말했다.
“검신이 죽었을 때 너를 죽였어야 했어. 고강후가 말렸지. 고작 경천신검을 얻자고 말이야. 그 탓에 놈은 여기서 죽는다.”
손우자가 지도 한 곳을 짚었다.
그가 짚은 곳은 호남과 귀주 사이였다.
“내가 작전을 짜주었지. 그대로만 하면 도천부가 압승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전적을 올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고강후는 욕심이 많지.”
지도를 짚은 손우자의 손가락이 선을 그으며 천천히 이동하였다.
“분명 퇴각하는 적을 쫓아가겠지. 피전격은 만만치 않은 자야. 맨주먹으로 사사천을 이룬 자란 말이지. 이쯤에 매복을 걸어둘 거야.”
손우자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좁은 협곡이었다.
“고강후는 아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선봉에 설 거야. 그러면… 여기서 죽는 거지.”
마치 눈으로 보듯 손우자가 설명했다.
“고강후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고강후는 천하방 내성주이자 도왕의 장자다. 장자를 잃은 도왕은 체면 때문에라도 흑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것이다.
“흑천과의 싸움은 물릴 수가 없는 것이야.”
손우자가 다시 감숙 쪽을 짚었다.
“도왕이 흑천과 전면전을 벌이는 사이 여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손우자가 클클, 웃으며 말했다.
“칠백 무력대가 갔지만 살아 돌아올 자는 없을 것이야.”
“……!”
“군사부의 작전은 신묘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 작전이 마천의 첩자에게 넘어가고 말았어.”
‘이런 미친!’
무한은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올 뻔했다.
“지금 마천은 아가리를 벌리고 천하방 무력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손우자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어찌될까? 믿었던 천하방의 대패! 대파와 세가는 어쩔 수 없이 마천과의 전쟁에 말려들 거야. 살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손우자가 손톱을 세워 지도를 북 그었다.
찌지직!
지도가 주욱 갈라졌다.
“이 싸움은… 중원 무림이 궤멸된 다음에나 끝날 것이야.”
“그렇게 해서 무얼 얻는 거지?”
“흐흐.”
손우자가 무한을 노려보았다. 광기 어린 눈이다.
“원하는 것? 말하지 않았나. 중원 무림의 궤멸이라고.”
“그렇게 한다고 오가촌에서 죽은 사람들이 돌아올까?”
손우자가 흠칫하더니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부로군. 우미충을 제거했던가?”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환노가 일러주더군. 게다가 고노가 다 털어놨지.”
손우자가 클클, 웃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 공교롭게도 다 죽어버렸네? 무엇으로 나와 만독문 간의 관계를 입증할 건가?”
무한이 피식, 웃었다.
“굳이 입증할 필요는 없지. 나 역시 천하방의 해체를 원하니까?”
손우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천하방을 해체한다고? 미쳤군.”
무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될 거야.”
손우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스쳤다.
천하방을 해체한다는 게 어림없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무한이 말하니 무게가 달리 느껴진 것이다.
“네 정체를 어떻게 입증하느냐고? 입증할 필요가 있나? 복수에 미친 자일 뿐인데.”
“…….”
“감찰은 여기까지. 증거불충분으로 처리하기로 하지. 천하방의 마지막은 그 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게 해주지.”
무한이 뒤돌아서서 대전을 나왔다.
손우자는 그런 무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천하방을 해체한다고? 어떻게? 미친놈…….”
***
은진언의 앞을 일군사 공손승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지금 총군사께서 신문 중입니다.”
“대체 누가 누구를 신문한다는 겐가? 조사받아야 할 자는 총군사란 말이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총군사를 조사하려면 방주의 재가를 받아오시지요.”
“자네들이 그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게 분명하군. 감찰단의 조사 권한은 방주의 재가를 필요치 않는다. 선조치 후보고란 말이다.”
은진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군사부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은진언의 뒤로 남궁우와 소소, 형소가 서 있었다.
무한이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와 부사들이 우르르 나오니 의아하여 밀고 들어가려던 참이다.
그때 무한이 군사부 대전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무한이 다가오자 은진언이 공손승에 막혀 잔뜩 불쾌한 감정을 실어 물었다.
“총군사가 뭐라 변명하던가?”
“부인하더군요.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증거불충분으로 남을 듯합니다.”
“그런 의혹이 있는 자를 총군사 자리에 둘 수 없지. 방주에게 총군사 해임을 요구해야겠네.”
은진언의 말에 공손승이 버럭, 화를 냈다.
“도가 지나치시군요. 정 그렇다면 군사부에서도 가만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만있지 않으면? 감찰단을 해체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꼬장꼬장한 은진언의 성격을 아는 무한이 웃으며 말렸다.
“전쟁을 앞둔 마당에 총군사를 해임할 수 있겠습니까? 총군사의 소명을 올리면 방주께서 판단하시겠지요.”
손우자를 총군사로 계속 두자는 말에 은진언이 의아한 눈초리로 무한을 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요.’
무한이 속으로 대답하고 군사부 대전을 돌아봤다.
손우자의 의도가 확실해진 이상 대응만 하면 된다.
군사부 건물을 나서니 수많은 이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무한이 그들 앞에 나가 포권을 하고 말했다.
“그동안 본 부주가 흑천과 결탁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군사부에 해명을 하였으니 여러분은 돌아가시지요.”
“그 소문들이 다 거짓이란 말이오?”
누군가 외쳤다.
“흑천을 찾아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흑천과 결탁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주의 생모가 흑월주라는 게 사실입니까?”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그러면… 지금 흑천과 전쟁 중인데 부주께서는 어떻게 처신할 거요?”
무한이 자세를 바로하며 정색을 하곤 말했다.
“전쟁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전쟁은 명분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명분이 없다니!”
“도천부 장자 고우는 만독문의 잔당에 의해 죽었습니다. 이는 본 부주가 직접 목격한 사실입니다.”
“뭐라고? 만독문?”
“만독문이 어딘데?”
오래전에 사라진 만독문이 거론되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한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였다.
사람들이 숨죽여 들었다. 심지어 공손승 등 군사부 군사들까지 인상을 쓰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무한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 외쳤다.
“부주의 말을 무엇으로 입증하겠소?”
그러자 남궁우가 나섰다.
“본인은 남궁세가의 지낭 남궁우요. 부주를 수행하는 특임감찰 호위로 그 자리에 있었소. 또한 흑천 혈사대와 우사, 당가의 소가주 등 목격자가 수도 없이 많소.”
“어찌 그런 일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지?”
사람들이 의아해하였다.
밝히고자 하면 어려운 일도 아닌데 흑천이 고우를 죽였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진실은 한 조각도 흘러나오지 않았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무한이 말했다.
“사실이 전해지지 않은 건, 누군가 정보를 조작했다는 뜻이지요.”
모두가 숨을 죽이고 무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한이 공손승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군사, 군사부의 정보체계가 어떻게 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