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62화 (162/250)

162화

강유의 표정이 굳었다.

이곳은 천기자의 거처로 기천부의 심처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무력으로 밀고 들어왔다는 뜻이다.

“내가 나가보겠네.”

강유가 일어서며 말했다.

“나가면서 입구를 폐쇄할 것이네. 자네는 저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일단 피신하게.”

강유가 맞은편 벽에 숨겨진 다른 출구를 가리켰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자가 침음성을 흘렸다. 제자가 자신의 거처에까지 무력대를 보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강유가 나가자 무한이 말했다.

“제가 어르신의 상세를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천기자와 무한은 서로 접점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다. 그럼에도 천기자는 선뜻 승낙하였다.

“그리하게. 하지만 지금은 오시라 우미충이 활동을 하지 않을 시간이네. 감지하기 어려울 것이야.”

무한이 천기자 등 뒤로 다가가 후부두 쪽에 손바닥을 대었다.

세심한 기운이 풀려나오며 천기자의 머리를 감쌌다.

천심공까지 끌어올리며 집중하였으나 우미충을 감지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완벽히 동화될 수 있을까?’

무한은 내심 놀랐다.

우미충은 성체가 되면 뇌의 일부에 붙어서 사는데, 대사활동으로 나오는 배출물에서 발생하는 독소가 치매를 유발한다.

몸체가 연약하여 억지로 떼어내면 몸이 터지며 독소가 흘러나와 숙주를 죽음으로 이끈다.

그러니 우미충은 시술자조차도 제거할 수 없는 고술로 알려져 있다.

‘유일한 방법은 우미충이 잠들어 있는 지금 기운으로 감싸서 밖으로 빼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감지조차 안 되는 우미충을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으음.”

무한이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천기자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말했다.

“나는 이미 살만큼 살았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건 천하방이 제대로 서는 것이야.”

평생을 천하방에 바쳐온 천기자로서는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적어도 강호에 폐해를 일으키는 집단이 되어선 안 된다.”

천기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쇠약했다.

팔 년간 석실 생활을 하면 그 누구라도 삶의 의욕을 잃고 말 것이다.

“한 달 후, 다시 올 수 있겠나?”

“그러겠습니다. 그때는… 우미충을 제거할 방법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천기자가 손을 저어 가보라고 하였다. 그러더니 침상에 누웠다.

쇠약한 천기자를 보는 무한의 마음이 무거웠다.

검신을 도와 천하방이라는 전대미문의 방파를 이룩한 천재의 말년 치고는 너무나 비참했다.

동시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듯 집념에 찬 천재가 제자의 배신에 낙담하는 모습이 생소했던 것이다.

‘둘 사이에 사제지간의 정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무한은 문득 스치는 생각에 천기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독을 쓴 제자를 용서할 만큼 관대한 천기자는 아닐 것이다.

무한은 기관을 작동하여 비밀통로를 열었다.

비밀통로를 들어서자 밝은 야명주 아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

기천부의 비밀통로는 검천부와 달랐다.

거미줄처럼 천하방 내성 곳곳으로 퍼져 있는데 그중에는 검천부와 연결된 통로까지 있다.

‘기천부야말로 천하방의 심장이었군.’

무한은 천기자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했다. 그러곤 기천부 외곽 전각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대로 혼자 피신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손우자는 조우해야 할 상대이니까.

잠시 후, 무한이 기천부 객사 뒤에 나타났다.

객사를 지키는 무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군사부 무력대가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모두 그쪽으로 간 모양이다.

무한이 되돌아서 천기자의 거처 쪽으로 향했다.

천기자의 거처가 있는 연못 아래쪽 너른 광장에 두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문요가 이끌고 온 군사부 무력대는 이백여 명에 달했다. 이에 맞선 기천부 역시 삼백여 명이 넘었다.

기천부 무인들 앞에는 강유가 버티고 서서 문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소와 형소, 남궁우가 강유의 뒤에 서서 군사부 무력대를 노려보고 있다.

강유는 만현각주.

총군사의 사제이기도 하니 문요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손우자는 기천부를 뒤집어엎어서라고 무한을 잡아오라 했지만 문요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

“심무한의 생모가 흑천 흑월주로 밝혀졌소. 그동안 이 사실을 숨긴 채 검천부주의 자리까지 오른 건 명백한 기만이오. 군사부 총군사의 구인장을 거부하면 공식적으로 천하대전을 소집할 것이외다.”

강유는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심무한에게 어떤 혐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천부에 와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이 문제지.”

담담했던 강유의 두 눈에서 날카로운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기천부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문요는 움찔하였으나 물러설 수 없었다.

“천하방의 안위가 달린 일이오. 군사부는 결코 위험을 좌시할 수 없소.”

그때, 무한이 팽팽하게 대치한 양 진영의 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이번에는 정식 구인장을 가져온 모양이군.”

문요가 흠칫 놀라는데 손에 들린 구인장이 휙 날아가 무한의 손에 잡혔다.

총군사 명의로 된 정식 구인장이었다. 명목은 흑천과의 밀착 여부에 대한 조사였다.

“가지.”

무한은 짤막하게 한마디하고는 강유에게 예를 취했다.

“군사부에서 보자고 하니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마치 옆집에라도 간다는 듯 태연한 모습에 문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력대 이대를 동원해 기필코 잡아가겠다고 왔는데 순순히 제 발로 간다고 하니 농락당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심지어 무한은 앞장 서 기천부 정문을 나섰다.

“……?”

기천부 정문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무한의 생모가 흑천 흑월주였다는 사실은 빠르게 퍼져 천하방이 발칵 뒤집혔다. 군사부에서 무한을 소환한다는 소식까지 퍼지며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모여든 이들 중에는 일문의 문주들도 보였다.

무한이 문파예방을 하며 안면을 익혔던 혼원문의 문주 홍주해가 나서더니 무한 앞에 섰다.

“정말 자네가 흑월주의 아들이란 말인가?”

홍주해는 믿기지 않았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어찌 어머니를 부인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은 이미 흑월주의 자리를 내놓으셨습니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홍주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검천부와 군사부가 알력을 빚고 있다고 들었을 때, 무한의 편을 들고자 했는데 흑월주의 아들이라면 섣불리 나서기 어렵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염려해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이 문제는 제가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무한이 걸어가자 인파가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그 길 끝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우곽?’

일선문의 우곽이 커다란 장검을 짚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한이 다가가자 우곽이 말없이 길을 비켜서더니, 무한의 뒤를 따랐다.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무한의 편에 서겠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의 뒤를 남궁우와 형소, 소소가 따라갔다.

그 뒤를 문요와 군사부 무력대가 따르고, 다시 그 뒤로 군중의 행렬이 이어졌다.

무한이 군사부로 소환되고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튀어나오며 천하방 대로가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윽고, 군사부에 이르자 문요가 뒤따라온 소소와 우곽 등에게 말했다.

“외인은 들어갈 수 없소.”

그러면서 무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기를 주시오. 군사부에는 무기를 소지한 채 들어갈 수 없소.”

무한이 경천신검을 풀어 형소에게 맡겼다.

“괜찮겠어?”

불안해하는 형소의 어깨를 말없이 다독인 무한이 군사부 건물로 들어갔다.

***

패천부 권왕의 집무실.

권왕이 흑천과의 싸움 현황을 담은 보고서를 형식적으로 살피고 있는데 형일천이 들어왔다.

“검천부 심무한이 군사부 소환에 응하여 지금 군사부에 출두했답니다.”

“…….”

“군사부가 무력대까지 동원했다더군요. 수백 명이 나와서 무한이 군사부로 가는 걸 지켜봤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권왕이 읽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에 툭 던지며 형일천에게 물었다.

“손우자가 심무한을 잡을 수 있을까?”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물음 자체에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형일천도 고개를 저었다.

“그간 보여준 행보를 보면 그 녀석도 머리를 쓰는 데는 손우자 못지않습니다. 두 번이나 거부하다, 군사부 정식 구인장이 오자 출두한 걸 보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겠지?”

권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신경 쓰지도 않았던 녀석이 순식간에 천하방의 중심이 됐어.”

“그래봐야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권왕이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경천신검을 매고 나타나지 않았는가. 제 할아버지의 무공을 이어받았다는 걸 세상에 공포한 거지.”

“제아무리 신검이라도 쓰는 자가 바뀌면 한낱 철검보다 못할 수도 있지요.”

“아니, 자네는 몰라.”

권왕이 고개를 저었다.

형일천은 검신이 경천신검을 구사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러니 경천신검이 단순한 검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 것이다.

권왕이 화제를 돌렸다.

“자네 아들이 심무한과 가깝게 지낸다지? 만재당까지 그만두고 검천부에 의탁하겠다고 했다며?”

형일천이 흠칫, 하였다.

자신도 아침에 알았던 일을 권왕이 알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내심 떨떠름해하며 대답했다.

“늦둥이라 오냐 오냐 하며 키웠더니 아직 철이 없습니다.”

민망한 일이긴 했다. 패천부 가신의 아들이 검천부에 의탁하다니.

그러지 않아도 듣자마자 형소를 당장 잡아오라고 했는데 기천부로 간 바람에 길이 엇갈려 놓쳤다.

권왕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젊은 아이들이 어울리는 걸 어찌 막을 수 있겠나.”

표정이 없으니 더 께름칙했다.

“형소에게 전하게. 무한을 봐야겠어.”

***

군사부 대전.

널따란 대전 상석 단상에 책상과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옆으로 군사부 부사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고, 그중 두 명의 책상 앞에는 지필묵이 놓여 있었다.

대전 정중앙 한가운데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저기 앉아 계시면 군사들께서 곧 오실 겁니다.”

무한은 정중앙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대전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무한은 단상의 빈 의자를 물끄러미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모의 신분을 알았을 때부터 결코 감출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노출될 줄은 몰랐다.

어차피 정면으로 돌파해야 할 사안이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손우자의 대처였다.

손우자는 자신이 기천부로 가자마자 무력대까지 동원하여 소환하려 했다. 이제까지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느긋해 하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뭐가 그리 다급했던 거지?’

자신과 천기자가 만나는 걸 우려한 것일까? 천기자가 우미충에 당했으니 굳이 염려할 이유가 없을 텐데?

“총군사께서 오십니다.”

대전의 고요를 깨는 낭랑한 음성과 함께 손우자와 세 명의 군사가 들어서더니 단상에 올랐다.

무한과 손우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언젠가 취조실에서 봤던 뱀 같은 눈이 아니라 피곤에 지친 책사의 눈이다.

‘천의 얼굴을 가졌군.’

옆에 배석한 부사가 소리쳤다.

“검천부주 심무한에 대한 군사부 심의를 열겠습니다.”

그러면서 무한에 대한 혐의 내용을 줄줄이 읽었다.

“……흑천과 결탁하여 도천부 고우를 살해했으며… 흑수애에서 흑천노조와 사사천주 피전격 등을 만나…….”

그동안 있었던 무한의 행적을 모조리 흑천과 결부시키는 내용이었다.

다 읽고 난 부사가 무한에게 말했다.

“위 내용에 대해 인정하시오? 혹, 사실과 다르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해명하시오.”

무한이 천천히 일어나 단상에 앉은 총군사들과 시선 높이를 맞췄다.

“모두 부인한다. 천하방 군사부의 정보 수집과 해석 능력이 이리 부실하다니, 실망스럽군. 해명할 가치도 없어.”

그러고는 손우자를 향해 말했다.

“천하방 총군사 손우자! 특임감찰의 권한으로 당신을 당가 장로 당현전 살인을 주도한 혐의로 감찰에 회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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