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이튿날.
무한은 의관을 정제하고 검천부를 나섰다.
남궁우에 이어 형소까지 좌우로 호위하듯 따랐다.
기천부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소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
소소를 따라 가는데 평소 가던 강유의 집무실이 아니었다.
기천부 수많은 전각들 사이를 지나 당도한 곳은 커다란 연못 옆에 있는 장방형 건물이었다.
담장을 두른 건물은 정문에 천의문(天意門)이라 적혀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할아버지의 거처야.”
소소의 표정은 침울하였다.
‘천기자의 거처?’
무한의 시선이 전각을 향했다.
치매에 걸린 뒤 천기자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망혼고…….’
다른 이름으로 우미충이라고 한다. 충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다른 고에 비해 크기가 크다. 보통 고가 좁쌀만하다면 우미충은 쌀알 크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할아버지가 도왕의 미혼고를 제거했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이 천기자의 우미충을 제거할 수 있을까?
사실 기천부를 찾은 데는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손우자는 천기자의 대제자다. 천기자는 손우자의 정체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왔으면 들어오지 뭐하고 있는 게냐?”
강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한이 일행과 함께 들어가려는데 다시 강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들어 오거라. 소소도 밖에서 기다려라.”
무한이 홀로 천의문을 넘었다.
작은 마당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에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으나, 대청 뒤 가벽으로 들어가니 널따란 장방형의 공간이 나왔다.
맞은편 벽에 빈 태사의가 보였다. 강유는 태사의 왼쪽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한이 공간을 가로질러 들어가자 강유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무한이 자리에 앉자 강유가 말했다.
“한때 여기에서 천하방 일급기밀이 논의되곤 했지.”
강유가 텅 빈 공간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검신을 비롯한 뭇 영웅들이 여기에서 회합을 가지고 우의를 다졌다.”
강유의 목소리가 허전한 공간에 쓸쓸히 맴돌다 사라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 완벽한 줄 알았던 체제도 완성된 순간 서서히 폐해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
“아버님은 일찍이 천하방이 변질될 것을 예측하셨다.”
강유가 빈 태사의를 보며 말했다.
“어느 날 점을 쳐보시곤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생(生)이 성한 가운데 사(死)가 태동하는 점괘를 얻으셨다며 천하방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 하셨지.”
강유가 깊은 탄식을 하였다.
“하늘과 땅의 이치를 꿰뚫고, 서너 수 앞을 보는 천재도 자기 발밑에서 자라는 반심(叛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기천부라고 할 수 있지.”
무한도 내심 탄식하였다.
희대의 천재가 제자의 역심을 몰랐다니.
“정이 눈을 가렸을 수도 있지.”
강유가 응어리를 내뱉듯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을 뵈러 가자.”
“……?”
“언제고 경천신검이 다시 세상에 나오는 날이 비틀린 천하방의 기운을 바로 잡는 날이라고 하셨다. 나는 오늘이 그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무한의 등 뒤에 매인 검을 보았다.
무한이 묵묵히 일어나자 강유가 단상에 올라가더니 태사의 팔걸이에 있는 용머리를 당겼다.
스르릉.
태사의 뒤로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
“기천부로 갔다고?”
손우자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연이어 무한의 구인(拘引)에 실패하자 군사부 무력대를 문요에게 주어 무한을 압송하라 일렀다. 그런데 검천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강유를 찾아갔다 그 말이지?”
손우자가 미간을 벅벅 문질렀다.
기천부.
사부가 있는 곳이다.
사부의 귀계는 그로서도 두렵다.
솔직히 정말 우미충에 당했는지 의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만일, 천기자가 제정신이라면 자신의 대업은 재고해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확인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것들이 드디어 마각을 드러내는구나.’
어제 도왕이 장로전을 한바탕 뒤집고 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가 미혼고에 당했는지 의심쩍어 했는데, 이로써 그간 감쪽같이 속여 왔음을 확인했다.
‘차라리 그게 나았을 것이다. 정말 뼈아픈 일을 제정신으로 겪는 것보다는 말이야.’
손우자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왕에 대해서는 차선으로 준비해놓은 바가 있어 별 염려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천부만은 신경이 쓰인다. 강유가 본색을 드러내면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테니까.
손우자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강유, 내 손으로 사부의 대를 끊고 싶지 않구나. 현명하게 처신하기 바란다.’
일전에 강소소를 데리고 만현각을 찾았을 때 충분히 경고를 했고, 강유도 받아들였다고 여겼다.
하지만 왜 이리 불안한 걸까.
손우자는 천기자의 상태를 확인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손우자가 문요에게 말했다.
“무력대 일대를 더 동원하게. 기천부를 뒤집어서라도 무한을 압송해 와야 하네.”
***
문 안으로 들어서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다시 문이 나왔다.
강유가 기관을 작동하자 철커덕, 하고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싸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강유가 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무한이 뒤를 따랐다.
원래는 연공실이었을 법한 석실이었다. 검천전 지하 연공실과 비슷한 구조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광경은 사뭇 달랐다.
석실 한쪽에 침상이 놓여 있고, 바싹 마른 노인이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
용모가 많이 바뀌었지만 무한은 저 노인이 천기자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천기자는 마치 자는 듯 보였는데, 이마 위쪽이 이상한 물체로 덮여 있었다.
강유의 얼굴은 무척이나 침통하였다.
“아버님께서 몸의 이상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우미충이 자리를 잡은 뒤였다. 그래서 이 만년한옥으로 우미충의 활동을 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기자의 머리를 덮고 있는 것은 만년한옥이었다.
“팔 년이다. 지난 팔 년 동안 이 차가운 한옥을 머리에 이고 사셨다.”
무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살 수 있을까?
“우미충은 망혼고 외에 자오고라고도 한다. 자시와 오시에 활동을 중지하고 잠이 들지. 그 시간에만 저 만년한옥을 벗으실 수 있다.”
무한은 숙연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곧 오시가 될 것이다.”
잠시 후.
천기자가 눈을 떴다.
파리한 낯빛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였다.
강유가 머리를 덮은 만년한옥을 벗기자 천기자가 자리에 일어나 앉아 좌정하였다.
강유가 한쪽 벽에 높인 선반에서 벽곡단과 물을 가져오자 천기자가 삼키고 물을 마셨다. 이어 무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무한이냐? 그새 많이 컸구나.”
천기자의 얼굴에 진한 감회가 어렸다.
무한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천기자 어른을 뵙습니다. 배려하신 덕분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무한이 화경에 이를 수 있었던 최초의 계기가 천기조양환이었다.
천기조양환 덕분에 화수전 살수로부터 입은 중상을 회복하고, 진경으로 나아가는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아니야. 그건 심 대형의 마지막 부탁이었지. 네 할아버지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 사이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천기자가 탄식을 하곤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구나.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경천십이식을 대성했겠지? 알고 싶은 게 무엇이냐?”
“오경연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무한의 물음에 천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우자의 본명이다. 나도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듣는군.”
무한이 환노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오경연은 만독곡 출신이 아니다. 마천에 의해 몰살당한 오가촌 사람이지.”
“만독곡주의 숨겨놓은 아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몰랐겠나?”
천기자가 대제자를 들이면서 신분을 확인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손우자의 의도가 짐작이 가십니까?”
무한의 물음에 천기자가 눈을 내리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천기자가 말했다.
“나 역시 지난 팔 년간 이 석실에 있으면서 그놈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수없이 생각했다.”
“…….”
“어쩌면 오가촌의 멸망이 천하방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천에 의해 멸망한 게 아닙니까?”
“당시 오가촌에 천하방 무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지. 이를 안 마천이 무력대를 보내 천하방 무인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까지 도륙했다. 그러니 오경연 입장에서는 천하방이 단초를 제공한 것이라 여길 수도 있겠지.”
무한의 머릿속에 손우자의 행보가 그려졌다.
폐허가 된 오가촌에서 살아남은 오경연은 마침 만독곡주의 아들 표무를 찾으러온 환노와 조우했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환노는 그를 표무라 하고 만독곡주의 뒤를 잇고자 했다.
손우자는 오경연이라는 진짜 신분으로 천기자의 제자로 들어왔고, 표무라는 신분으로 만독곡 오노로부터 고술과 독술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내가 그를 제자로 받은 것은 자질도 뛰어나긴 했지만, 천하방과 마천과의 싸움 와중에 부모형제를 잃었기에 그에 대한 보상 심리도 작용했지. 하지만 결과가 이리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신이 아닌 이상, 그의 속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강유가 아버지를 위로하며 말했다.
“무한의 말대로 그가 만독곡의 후인이라면 이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총군사의 지위에서 끌어내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독곡 오노가 모두 죽었습니다. 살인멸구를 완성했으니 증거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오노를 제거했다는 건 그가 노리는 일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뜻도 됩니다.”
무한의 말에 천기자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 녀석이 원하는 건… 무림인들이 서로 상잔하다 죽어가는 것일 게다. 오가촌의 멸망을 무림인 탓이라고 여기면 그럴 수 있지.”
무한 역시 오경연의 정체를 들은 뒤 비슷한 생각을 했다.
실제로 흑천과 교전을 벌이고 있고, 마천과의 싸움도 임박했다. 이러다 모두 공멸할 수도 있다.
무한이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께서 도왕의 미혼고를 제거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천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무한이 도왕과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심 대형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지. 내게 알리지 않은 건 아마도 반대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겠군.”
천기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들을 믿지 않았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천하사패를 엮은 구심점은 심 대형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으니 해체된 셈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면서 무한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들과의 싸움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하지만 만일 싸우게 된다면, 절대 손속에 정을 두지 말거라. 그들 역시 그럴 것이다.”
무한은 천기자의 말을 들으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실상 천하방은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천하방을 지탱하는 건 그저 권력욕에 취한 이들의 욕망이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요.”
무한이 에둘러 대답하곤 다시 물었다.
“기운으로 고를 제거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지요?”
천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독왕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들렸다.
“심무한! 구인장을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