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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60화 (160/250)

160화

운객은 자신이 살수행에 중독되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고수일수록, 난이도가 어려울수록 의욕이 불타올랐다.

살수행을 마치면 그만큼 회한도 컸다. 그 회한은 삶의 의지마저 꺾을 정도로 깊고도 깊어 그로서도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여야 할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무한은 좋은 대상이었다. 명분도 있다. 바둑친구 우객을 죽였으니까.

그래서 무한을 쫓았다. 그러다 생각지 못한 흥미를 느꼈다.

무한은 피를 몰고 다녔다.

천하방을 나서자마자 들이닥치는 괴한들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괴한들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어이없이 죽을 줄 알았던 무한이 엄청난 무위로 격퇴하자 바로 죽이기가 아까웠다.

그렇게 쫓아다니다 결국 무한의 목숨을 구하기까지 했고, 이제는 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살수라는 걸 안 뒤에도 눈앞의 어린 것들은 스스럼없이 대하고 있다. 형소란 놈은 가끔 흘깃거리며 동경의 빛까지 보낸다.

이런 기묘한 기분은 처음이다.

“형씨, 대체 그때 도와준 이유가 뭐요?”

무한이 제지했으나 남궁우는 들은 척 만 척 운객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 속내가 뻔히 보였다. 화수전주에 대해 알아내려 하는 것이리라.

화수전주의 정체는 강호십비(江湖十秘) 중의 하나다.

“하남성에 있는 거령문이라고 혹시 아세요? 거기 문주가 근자에 피살되는 바람에 한동안 떠들썩했는데…….”

소소도 간간이 끼어들었다. 천하방 군사부 요원답게 그동안 있었던 의문의 죽음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동안 벌어진 의문사들 모두가 화수전이 한 짓이 될 판이다.

운객은 구름처럼 세상 사람들 머리 위를 흘러 다니며 살았다. 이렇듯 세상에 내려와 어울리는 건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운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무한이 말했다.

“의뢰를 하겠소.”

“……?”

“한 사람을 지켜주시오.”

느닷없는 말에 모두 무한을 보았다.

살수에게 호위라니.

무한이 운객을 보며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할 줄 알면 지키는 일도 할 수 있을 게 아니오.”

“…….”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소.”

“호위는 하지 않네.”

“화수전은 하지 않겠지만 운객이란 사람은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운객이 반발하였으나 무한은 무시하고 반점 계산대로 가서 지필묵을 빌려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그러고는 돌아와서 운객에게 건넸다.

“내용은 이 안에 들었소. 맡고 싶으면 열고 아니면 그대로 태워버리시오.”

운객이 종이를 받았다.

무한이 호위를 맡긴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던 것이다.

“여는 순간 의뢰는 성사되는 것이오.”

무한의 말에 종이를 열어보려던 운객의 손이 멈췄다.

“나중에 열어봐도 되오.”

운객이 말없이 무한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히야. 조마조마했네.”

운객이 가자 남궁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풍운야우를 만나다니… 부주를 따라다니면 정말 재밌는 일이 많단 말이야.”

“풍운야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야?”

형소가 남궁우에게 물었다.

여자에게 말을 걸다니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다.

“풍운야우를 만나고 살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걸. 당대 최고의 살수들이야.”

그러면서 무한을 보았다. 무한이 우객을 만난 걸 아는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살수노릇을 하는 거지?”

“최고의 살수는 무공이 높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정면으로 대결하면 나도 겁나지 않아. 하지만…….”

남궁우가 눈알을 또르륵 굴리며 형소의 뒤를 보았다.

“어?”

형소가 무심코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젓가락이 날아가 형소의 뒤통수를 때렸다.

탁!

형소가 화를 벌컥, 냈다.

“무슨 짓이야?”

“방금, 너 죽었어. 이렇게 언제 죽는지도 모르고 죽일 수 있는 게 최고의 살수지.”

남궁우가 웃으며 말했다.

“이, 이…….”

차마 여자에게 손을 쓸 수 없는 형소가 씩씩거리기만 하였다.

소소가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장난 할 때야? 무한이 천하방에서 축출되게 생겼는데.”

소소의 말에 운객이 나타나며 흐트러졌던 화제가 다시 하나로 모였다.

“어떡할 거야?”

소소와 형소, 남궁우가 무한만 쳐다보았다.

“뭘 어떡해. 나는 검천부주야. 천하방을 떠나는 일은 없어.”

“난 또. 검천부가 텅 비었기에 천하방을 떠나는 줄 알았지.”

그러면서도 소소는 못내 걱정되는지 한숨을 쉬었다.

“장로전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걱정하지 마. 그보다 강 숙부께 전해줘. 내일 기천부에서 뵙고 싶다고.”

“아버지를?”

“꼭 뵈어야 한다고 해.”

무한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

“안하무인입니다. 어린놈이 이렇듯 천하방의 기강을 무시하다니.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여러 장로 앞에서 모욕을 당한 유곡명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장로전은 점심도 거르고 무한을 징계할 방안을 강구하느라 회의를 이어가고 있다.

“생모가 흑천이라니… 더군다나 흑천노조의 외손자 아닙니까? 자칫했으면 천하방이 통째로 흑천에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오. 한시바삐 축출해야 합니다!”

호중석은 더 강경했다.

“그냥 보낼 수 없소. 그의 무공은 천하방에서 얻은 것! 단전을 폐하여 내보내야 하오.”

“생모가 흑월주이지만 생부는 검천부 심군하요. 여필종부! 흑월주는 이미 지위를 내려놓고 심군하를 따랐으니 야인이나 다를 바 없소. 생모의 전력을 들어 아들에게까지 책임을 묻는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이오?”

강일모가 반박을 하였으나 그에 동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천하사패로부터 중립을 유지해온 백승포가 말했다.

“호 장로의 말대로 한다면 흑천노조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백승포의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흑천노조는 천하제일인 심양조가 살아 있을 때도 맞수로 여겨진 인물이다.

사실 심양조와 흑천노조, 마천주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흥! 흑천노조의 보복을 걱정하는 게요? 천하방에 몸담은 이가 할 말은 아니군. 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무사하지 못할 거요.”

호중석이 호기롭게 외치자 바깥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장로들이 내다보니 도왕이 박수를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호 장로의 호기가 참으로 대단하구려.”

도왕이 장로전에 들어서자 대장로 갈천경이 일어나 예를 취하며 맞았다.

“오실 거면 미리 연통을 (하시지. 어수선한 모습을 보여 드려 민망하구려.”

“방주가 방내를 다니는데 일일이 연통할 이유가 있소?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거지.”

도왕의 눈에서 광망이 쏟아졌다.

갈천경이 흠칫, 속으로 놀랐다.

어딘가 모르게 도왕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소란이오? 호 장로는 흑천노조와 한판 겨룰 듯한데, 참 장하십니다?”

“흠, 흠.”

호중석이 겸연쩍어 하면서도 도왕에게 예를 취했다.

“검천부주의 신분이 드러났습니다. 생모가…….”

“아, 그건 나도 들어 알고 있소. 돌아가신 심 대형도 당시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 그럼에도 그 아이를 받아들였소. 그게 무슨 의미겠소?”

도왕의 말에 장로들이 잠잠해졌다.

검신 심양조의 후광은 아직도 천하방 곳곳에 남아 있다. 게다가 현 방주인 도왕도 알고 있었다지 않은가.

“어찌 흑천의 피가 천하방에 있을 수가…….”

호중석이 말을 하려는데 도왕이 끊었다.

“호 장로, 내 그렇잖아도 흑천노조에게 전할 말이 있소. 지금 보니 호 장로가 가면 딱 어울릴 것 같소. 흑천노조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사람은 호 장로뿐인 것 같군.”

도왕의 말에 호중석의 얼굴이 썩은 감자처럼 꺼멓게 죽어갔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듣지 못했소? 검천부주의 신분이 드러난 이상 혼선을 막기 위해 서로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소? 흑천노조를 만나면 해치지는 마시오. 자칫하면 흑백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아…….”

졸지에 흑천노조를 찾아가게 된 호중석은 그저 입만 끔벅거릴 뿐이었다.

대장로 갈천경이 끼어들었다.

“방주,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외다. 천하방의 중지를 모아 결정을 해야…….”

“대장로.”

도왕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대장로가 말한 중지가 천하방 각 문파의 의견을 모은 것을 말하오? 아니면 장로전의 중지를 말하는 것이오?”

“아시다시피 장로전은 각파의 의견을 대표하는 곳이외다. 장로전의 중지가 곧 천하방의 뜻 아니겠소?”

“후후…….”

도왕이 나직이 웃다가 이내 크게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기운을 실은 웃음이 터지자 장로전 대전이 웅웅, 울렸다.

갈천경의 안색이 홱, 바뀌었다.

방주가 평소와 달랐다.

이윽고 도왕이 웃음을 멈추더니 갈천경에 이어 장로들을 주욱, 훑어보고는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장로전이 각 문파를 대표한다면 어찌 내게 이런 투서들이 들어온단 말인가?”

도왕이 손짓을 하자 무사 하나가 달려와 문서 보따리 하나를 받쳤다.

도왕이 문서 보따리를 장로전 탁자에 던졌다.

“봐라. 이게 각 문파에서 들어온 투서들이다. 이러고도 장로전이 각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나?”

세차게 던진 힘에 보따리가 풀리며 투서들이 좌르륵 탁자에 흩어졌다.

“일일이 밝히고 처벌하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몇이나 목이 붙어 있을지 모르겠군.”

도왕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대장로 갈천경을 비롯한 장로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동안 은둔하다시피 한 방주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도왕이 말했다.

“여기까지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묻어두겠다. 저 투서의 내용은 알아서 처리해라. 그리고… 검천부주의 신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는 나에 대한 항명으로 알겠다.”

도왕이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내뱉고는 장로전을 나갔다.

장로들은 멍하니 도왕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배웅할 생각조차 못했다.

***

무한은 남궁우와 함께 검천부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형소와 소소가 다시 왔다.

“또 무슨 일이야?”

“만재당 그만뒀어. 나 이제 할 일이 없어.”

형소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일을 그만뒀다고? 왜?”

“응. 검천부에 의탁할 생각이야.”

“뭐?”

무한이 놀라 형소를 봤다.

“친구가 백척간두 위기에 처했는데 두고 볼 수 없지. 지금 검천부에 아무도 없잖아. 나라도 있어야겠어.”

무한은 가슴이 뭉클했다.

형소가 검천부에 의탁한다는 건, 패천부 이인자 형일천의 힘을 뒷배로 가져오겠다는 뜻이다.

“나도 마찬가지야. 사직서 내고 오는 길이야.”

소소도 말했다.

이미 둘이 상의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소소는 신분이 형소와 또 다르다.

기천부 후계자 강유의 무남독녀 외딸이다.

소소가 말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대에서 기천부를 해체할 생각이야. 나는 물려받을 게 없거든. 그러니 검천부에 딱 달라붙어야겠어.”

무한이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뜻이 그렇다면 받아주지. 대신 좀 빡셀 거야. 보다시피 아무 것도 없거든.”

“그건 걱정 마. 만재당 인맥을 동원하면 돼.”

형소가 자신을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탁탁, 쳤다.

무한이 창밖을 보았다.

이른 매화가 피었다.

한 송이가 먼저 피면 나머지 꽃이 뒤이어 핀다.

누군가 먼저 가면 따라오는 이가 있다.

형소와 소소가 먼저 왔다. 그들의 뒤를 누군가 따라오지 않을까.

무한이 새삼스레 자신들을 쳐다보자 형소가 무안한지 툭, 치며 말했다.

“오랜만에 심의삼재검이나 같이 수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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