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59화 (159/250)

159화

무한이 감찰단을 나오는데 낯익은 모습들이 보였다.

형소와 소소가 다가왔다.

두 사람의 표정은 몹시도 불안해 보였다.

“무한아.”

형소가 조심스레 무한의 이름을 불렀다.

무한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뭘 물을지 알아. 여기서는 곤란하고, 같이 가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하자.”

어느새 점심 무렵이 됐다.

무한은 형소와 소소 그리고 남궁우와 함께 성밖마을로 갔다.

천하방 안에서는 지켜보는 이들이 너무 많아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다.

네 사람은 조용한 반점을 찾아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소소가 물었다.

“이분은 누구?”

소소의 시선은 남궁우를 향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는 뜻이다.

무한이 남궁우의 어깨를 툭 치고 말했다.

“특임감찰 호위. 이름은 남궁우. 자칭 남궁지낭이라고 하지.”

“아, 남궁세가?”

“하하. 그래. 맞아! 내가 바로 남궁가의 지낭이라 불리는 남궁우란다. 우리 어린 친구들은 이름이 어찌 되나?”

오만한 남궁우의 말에 형소와 소소는 대번 빈정이 상했다.

형소는 키가 작고, 소소는 가녀린 편이라 체형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데 남궁우가 대번 아이 취급하니 울컥하였다.

남궁우가 남궁세가라는 뒷배가 있다면 형소와 소소는 패천부와 기천부의 일원이니 꿀릴 게 없다.

“흥! 넌 나이가 몇인데?”

소소가 대번 받아쳤다.

“오, 성깔 있는데?”

“너, 너… 함부로 말하지 마.”

형소도 분노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 농을 한 거야. 하지만 내가 너희보다 두 살 위이긴 할 걸? 심 부주하고 동갑이지?”

“강호에서 두 살 차이가 무슨 대수라고. 위아래 십년은 맞먹는 거야.”

형소의 말에 남궁우가 하하, 웃었다.

“여기 이 작은 친구가 참 마음에 드네.”

“뭐? 작은 친구?”

형소가 발끈하여 일어나자 무한이 말했다.

“여자야.”

“뭐?”

형소와 소소는 물론이고 남궁우까지 무한을 쳐다봤다.

“남궁우는 여자라고.”

남궁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무한을 보며 말했다.

“그걸 왜 굳이 밝혀?”

“지, 진짜야……?”

형소가 동시에 물었다.

무한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니 굳었던 마음이 풀렸다. 형소가 낯선 여자 앞에서 수줍어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과연 형소의 얼굴이 붉게 물들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남궁우가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는 하하, 웃는데 소소가 노려봤다. 여자라니 더 밉살스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남궁우가 성격이 별나. 너희가 이해해.”

“으, 으응. 그래야겠지?”

형소가 남궁우는 쳐다보지도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 근데, 어찌된 거야? 왜 그런 소문이 났지?”

“날 만하니까 났지.”

무한이 웃으며 말하자 소소가 벌컥, 화를 냈다.

“너 때문에 나하고 아버지가 손 사백에게 얼마나 닦달을 당한지 알아?”

“그게 무슨 소리지?”

무한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너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잖아.”

“아는 대로 알려주면 되지.”

“믿지를 않아.”

“걱정 마. 해결됐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무한이 스르륵, 기막을 펼쳤다. 이를 알아챈 건 남궁우뿐이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

무한은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흑천노조의 외손자이자 흑월주의 아들이란 말에 형소와 소소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는지, 두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같이 다녔으면서도 이 같은 사실은 처음 듣는 남궁우 역시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무한이 말을 마쳤는데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형소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동안 말 더듬는 버릇이 고쳐진 줄 알았는데 워낙 놀라서 다시 나왔다.

“뭐가 어떻게 돼. 나는 심무한이야.”

“그렇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분명 꼬투리 삼을 걸?”

“사실이야. 벌써 장로전에서 문제 삼더라고.”

형소와 소소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장로전까지 알고 있다면 분명 무슨 조치가 있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무한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자신이 펼쳐놓은 기막에 미세한 기운이 스며드는 게 느껴진 것이다.

낯익은 기운이다. 무한의 눈에 창밖에 황급히 사라지는 얼굴이 걸렸다. 찰나였으나 무한은 알아보았다.

‘저 사람은?’

폐사찰에서 만난 이상한 화수전의 살수다.

공허함에 빠진 존재.

그가 운객의 복수를 위해 쫓는 줄 알았는데, 그가 만독곡 입구에서 자신과 일행을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기이하게 여겼는데 한동안 보이지 않아 궁금했었다.

무한이 기운을 퍼뜨렸다. 그러자 기막으로 스며들던 기운이 싹, 사라졌다.

‘놀랍군.’

무한이 다시 기운을 퍼뜨렸지만,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은신술만으로 보면 무흔 대협과 맞먹는 자다. 만독곡에서 자객을 처치한 걸 보면 무공도 뛰어나고…….’

대체 왜 나를 쫓는 걸까.

화수전은 세 번의 실패 이후 살수행을 접는다고 들었는데 운객은 집요하게 쫓아다닌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모두에게 전음을 하였다.

- 잠시만 내가 있는 것처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 줘.

“뭐? 무슨 일…….”

형소가 의아해 하며 묻는데 남궁우가 손을 내밀어 형소의 팔을 잡았다.

쉿!

남궁우가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자 형소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순간, 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운객은 흐뭇해하고 있었다.

무한이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운객은 무한이 든 반점 바깥벽에서 햇볕을 쬐며 기대어 있었다.

삿갓을 쓴 머리를 숙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누가 보면 길을 가던 이가 지쳐서 잠시 쉬고 있는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운객의 머릿속은 분주했다.

‘그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지.’

만독곡에서 자객과 접전을 벌이며 칼질을 하다 자신도 한칼 맞았다.

다행히 상세가 깊지 않아 붕대로 응급처치 하고 만독곡으로 들어간 무한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며칠을 기다렸다.

독왕의 독진은 그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으니 입구에 은신하며 기다려야 했다.

공교롭게도 생필품이 떨어진 운객이 마을을 잠시 다녀온 사이 무한이 만독곡을 빠져 나와 감숙으로 갔다.

그 사실도 모르고 만독곡 앞에서 기다리다, 독왕 일행이 나오는 걸 보고 그제야 무한이 먼저 빠져 나갔음을 알았다.

기가 막혔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무한이 살아 있으니 죽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바로 무한의 종적을 뒤쫓으려는데 공교롭게도 화수전에서 연락이 왔다.

살수행이 떨어진 것. 살수 대상은 장강수로십팔채에서도 상좌를 차지하고 있는 장강교룡이었다.

장강교룡은 강호의 거물이었으나 운객에게는 그저 작업대상일 뿐이었다. 가슴에 작살을 박아 강 밑바닥에 안장시켰다.

그리고 살행 후 어김없이 밀려오는 회한에 사로잡혀 정처 없이 온 곳이 천하방 성밖마을.

그제야 운객은 자신이 아직도 무한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무한이 천하방으로 왔다.

‘이건 운명이야.’

만독곡 앞에서 무한을 왜 구했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해치워야 한다는 건 살수로서 할 말이 아니다. 살수들이 가장 원하는 게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이니까.

‘복수. 그래 이건 복수야. 우객, 너를 위한 복수행이야.’

운객이 굳이 변명을 하며 어떻게 죽일까 궁리하는데 따스하던 햇볕이 사라지고, 그늘이 진다.

운객이 고개를 들며 오른손으로 삿갓 챙을 밀어 올렸다.

“……!”

무한이 앞에 서 있다.

포권을 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채로.

“만독곡 앞에서는 감사했소.”

무한은 삿갓 아래 운객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운객이 당황하였다.

분명 반점 안에 네 명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무한의 대답이 없다.

지금도.

“무한아. 너, 그러다 정말 큰일 난다. 내 말 들어.”

형소의 소심한 목소리에 이어지는 소소의 쨍쨍한 목소리.

“그래. 그러지 말고 장로전에 가서 빌자. 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해.”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무한이 속으로 웃었다.

참으로 죽이 잘 맞는 형소와 소소다.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운객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무한도 씨익, 웃었다.

“우객의 복수를 하기 전 술이나 한잔 합시다. 목숨을 구해준 보답은 해야 하지 않겠소?”

“그 목숨, 다시 가져갈지도 모르는데?”

“그럴 수 있다면. 그런데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오.”

무한이 웃으며 말하고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반점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하였다.

운객은 풍운야우를 제외하고 이렇듯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반점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무한이 낯선 이를 데려오자 모두 입을 닫고 궁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운객이 자리에 앉자 무한이 소개했다.

“소개하지. 화수전 풍운야우 중 운객이야. 살수 중의 살수랄까?”

자신의 정체를 까발리는 소개에 운객이 벌떡 일어났다.

살수로서 범하지 말아야 할 금기가 얼굴이 노출되는 것이다. 살수 운객의 얼굴을 보는 자는 죽기 직전의 암살대상들 뿐이다.

그런데 무한이 태연히 운객의 정체를 밝혔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일격에 운객이 침음성을 흘렸다.

운객은 후회했다.

무한이 기막을 펼쳤을 때 설마, 하였다. 진경에서 그새 화경이 된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에 확인 차 기운을 보냈다가 발각되고 말았는데, 이제 얼굴까지 노출됐다.

순간적으로 다 죽일 생각을 했다가 이들의 배경이 머릿속을 스쳤다.

‘남궁세가, 기천부, 패천부…….’

제아무리 운객이라도 이 세 곳에서 쫓으면 중원에서 발붙이고 살기 어렵다.

‘그냥 뜰까?’

운객이 자리를 피할까 갈등하는 사이.

“오! 풍운야우! 정말 반갑군요. 우리 만난 적이 있지요?”

남궁우가 벌떡 일어나 포권을 하며 아는 척 했다.

‘뭐지, 이 녀석은?’

그동안 무한을 쫓으며 남궁우가 괴짜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자신을 반길 줄은 몰랐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소. 하하. 그 신세는 꼭 갚을 거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남궁우의 화술에 자기도 모르게 말려 들어간 운객이 잠시, 멈칫하였다. 그 바람에 도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렸다.

무한이 운객의 소매를 잡아 당겨 자리에 앉혔다.

남궁우가 그런 운객에게 대놓고 물었다.

“작년에 강소 동고방 방주가 급사를 했는데 혹시 화수전 풍운야우 중 한 분의 솜씨였소?”

운객은 기가 막혔다.

살수의 정체를 까발리고, 살수행을 묻고…….

도무지 살수행에 대해 개념이 없는 놈들이다.

형소와 소소도 눈빛을 반짝이며 운객을 쳐다봤다.

운객은 낯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모르는 일이다.”

“분명 화수전인데… 혹시 후환 때문에 밝힐 수 없다면 걱정하실 것 없소. 방주는 후사가 없고, 동고방도 해체되어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운객이 난감해 하자 무한이 남궁우의 말을 막았다.

“손님을 난처하게 하면 곤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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