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무한의 느닷없는 도발에 장로전이 얼어붙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것이다.
지금까지 장로전에서 무기를 꺼낸 이가 없었다. 이는 방주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장로전은 천하방 최고 의결기구로써 방주와 함께 최고의 권위를 누려왔다.
그런데 무한이 들어서자마자 이를 깼다.
“네, 네가 감히 장로에게…….”
무한은 부들부들 떠는 유곡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장로 갈천경을 향해 포권하였다.
“대장로께서 소환령의 이유를 말씀해주시지요.”
갈천경이 황당한 표정을 수습하고는 그제야 노기를 분출하였다.
“장로전에서 이리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이다니! 검천부라는 명성을 믿고 이러는 겐가?”
무한은 포권을 풀지 않고 말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소환령의 이유를 말씀하시지요.”
“지금 내게 강요하는 겐가?”
대장로 갈천경이 호통을 쳤다.
“부주가 사사로이 흑천을 방문한 이유가 무엇이오! 검천부주로서 행동을 할 때 응당 신중해야 할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흑천을 방문한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오!”
대장로는 흥분한 와중에도 장로전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하오체를 썼다.
무한이 포권을 풀고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아직까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 두 가지 이유가 있었소.”
말투가 바뀌었다. 그는 지금 검천부의 주인으로 장로전 장로들을 대하고 있는 중이다.
“사적인 이유는 밝힐 의사가 없소. 공적 이유는 천하방 감찰관으로서 당가장로 살인사건을 조사 중 확인 차 간 것이오.”
“뭐라?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흑천을 찾았다고? 그걸 믿으란 말이냐?”
유곡명이 삿대질을 했다.
무한이 그를 돌아보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두 번째 경고요. 말조심하시오. 나는 이 자리에 검천부주이자 천하방 감찰관으로 와 있는 것이오.”
유곡명이 입을 딱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무한의 표정은 한마디만 더하면 정말 죽일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귀밑을 스쳐가던 비도를 보지도 못했다. 다만 싸늘한 기운이 스쳐갔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이다. 비도가 벽에 박히고서야 자신이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한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찌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곡명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천하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흑천을 찾았다?
누가 봐도 무리한 대답이었다.
대장로 갈천경이 침중한 안색으로 문서를 하나 집어 들었다.
“밝힐 수 없는 사적인 이유가 생모를 만나기 위함이었소?”
대장로가 문서를 앞에 놓인 긴 탁자에 던졌다.
“자네의 모친이 흑천 흑월주였더군.”
“뭣이?”
“대장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이 내용은 장로들도 처음 듣는지 경악을 하였다. 장로들이 문서를 돌려가며 읽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흑천노조의 외손주가 검천부주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도왕이 군사부의 보고서를 보여주었을 때부터 예상했던 상황과 반응이었다.
대개 도천부 쪽 사람들의 반응이 그러했다.
기천부나 패천부 쪽 장로들은 입을 닫고 상황을 주시했다. 도천부 장로들이 탐탁지 않긴 하지만 무한의 생모가 흑월주라는 건 섣불리 옹호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무한이 장로들을 둘러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소. 내 모친이 전대 흑월주였소.”
무한이 바로 인정하자 도천부파 장로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찌 이럴 수가!”
“그렇다면 당장 천하방을 떠나야지!”
“이런 후안무치한 경우가 있나. 그러면 흑천의 피가 검천부를 접수했다는 말인가?”
대장로 갈천경은 장로들이 떠드는데도 제지하지 않았다.
무한이 픽, 하고 웃었다.
그러자 장로 하나가 소리쳤다.
“웃어? 지금 우리를 비웃는 건가? 그동안 감쪽같이 속여 놓고…….”
무한의 시선이 소리친 이를 향했다.
모우극의 부친 모공연이었다.
“모 장로, 내가 천하방을 떠나기를 바라오?”
“당연하지! 흑천의 종자가 어찌 천하방에 발을 붙이려는…….”
쉭!
무한의 손이 허리춤을 스치는가 싶더니 모공연의 희끗한 귀밑머리가 흩날렸다.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흑천의 종자라고 했소?”
모공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아, 아니… 감히 장로전에서…….”
“지겹군. 그 말은 유 장로도 했던 말 같은데. 내가 분명히 말했소. 검천부의 주인이자 천하방 감찰관으로 이 자리에 와 있다고.”
무한이 장로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 경고였소. 하고 싶은 말은 하되, 부디 가려서 하시기를 바라오. 검천부를 모욕하는 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오.”
장로들은 기가 막혔다.
그들 또한 고수 중의 고수라고 자부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무한의 비도술만큼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무한이 천하제일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방금 보여준 비도술은 이 자리 그 누구도 막을 수 있다 자신할 수 없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비도술이었다.
그때.
“생사비도! 생사비도가 부주였소?”
기천부파 장로 강일모가 놀라서 물었다.
무한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생사비도, 그게 누군데?”
소식에 어두운 장로 하나가 옆에 있는 이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감숙 변방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장로들은 관심이 없었다.
도천부 세 봉공이 비도를 맞고 죽었으나, 천종해가 잡혔기에 소문은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강일모의 말에서 생사비도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있었다.
“한 자루에 한 목숨을 거두는 생사비도. 듣지 못했소? 마천 지옥곡의 무수한 고수들이 비도 한 자루에 죽었다는 것을?”
강일모가 설명하자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설마 자신이 비도 하나 막지 못하랴 하는 자만심으로 운을 시험해볼 사람은 없었다.
무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장로들은 이제 무인이 아니다. 권력을 쥐고 있다 보니 놓을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졌고, 그렇기에 목숨이 아깝다.
게다가 모두가 추앙하고 받드니 목숨을 거는 싸움은 자신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묵직한 침묵이 흐르자 대장로 갈천경이 입을 열었다.
“검천부주는 장로전을 겁박하고 있소. 천하방이 생긴 이래 지금과 같은 경우는 없었소. 부주의 조부이신 검신께서도 장로전의 결정에 귀를 기울이셨소.”
대장로 갈천경의 목소리를 진중하였고, 위엄이 어려 있었다.
“지금 부주는 한 자루의 비도로 장로들을 위협하며 말문을 막고 있소. 무슨 의도로 장로전에 와서 도발하는 것이오?”
무한이 대장로를 향해 말했다.
“말문을 막는 게 아니라 막말을 조심하라는 뜻이었소. 그리고 나를 부른 건 장로전이오.”
무한의 목소리는 더없이 냉랭하였다.
“나를 모욕해 검천부를 퇴출하고자 하는 게 목적이었소?”
갈천경이 당황하였다.
나이가 어리니 찍어 누르면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경하게 나오니 그로서는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장로답게 노회하였다.
“부주야말로 말조심하게. 장로전은 천하방 최고 의결기구이자 심의기관이네. 다른 문파도 아니고 천하사패의 일원인 검천부 수장이 흑천과 관련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니 당연히 소환하여 사실 여부를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곤 정중하게 포권을 하였다.
“이해하오. 사실이 확인됐으니 이만 가겠소.”
“잠깐, 이건 중대한 사안이오. 천하사패는 천하방의 사대 기둥 아니오? 그 기둥이 무너질 판이니 검천부주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소.”
이장로 호중석이 일어나 발언을 하였다.
도천부파 장로들의 수장격인 호중석은 지난번 멸마대 사안을 처리하는 장로회의에서 무한에게 면박을 당한 후 앙심을 품어왔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무한을 얽어매고자 했다.
무한의 비도가 놀랍긴 하지만 대장로를 비롯해 열 명의 장로가 이 자리에 있다.
합공을 하면 무한을 무릎 꿇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몰아붙일 심산이다.
무한이 호중석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대장로에게 말했다.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리시길 바라겠소. 내가 이 자리에서 논의 과정을 지켜보면 누군가에게 후환이 미칠 수도 있으니 이만 가보겠소.”
그러고는 바로 돌아서 장로전 대청을 나왔다.
“저, 저런…….”
건방진 놈이라는 소리가 나올 뻔한 유곡명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장로전을 나온 무한은 곧바로 감찰단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남궁우도 함께 감찰단으로 들어갔다.
“올 줄 알고 있었네.”
감찰단주 은진언이 침중한 안색으로 맞았다. 그가 무한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무한이 품에서 문서를 하나 꺼냈다.
“당가장로 살인사건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은진언이 보고서를 펼쳐 읽다 말고 안색이 홱 변했다.
잠시 후.
“자네는 이 보고서가 가져올 파장을 감당할 수 있나?”
“저는 알아낸 대로 사실만 적었을 뿐입니다.”
무한의 대답은 간결했다.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는 말일세.”
“사실을 사실이라 말하는데 거리낄 게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자네는 흑천과 결탁했다는 소문이 있네. 그런데 이렇게 흑천을 변호하는 내용을 보고하면 어찌 되겠나?”
무한이 담담하게 웃었다.
“지금 내 형편에 따라 사실을 감춘다면, 그게 어찌 특임감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니 은진언은 머리가 아팠다.
보고서에는 당가장로를 살해한 추노의 행적에 대해 소상히 적혀 있었다.
“이자가 총군사 손우자의 사택 하인으로 오랫동안 지내왔다는 게 사실이란 말인가?”
“두 사람이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총군사에게 직접 확인해봐야지요.”
특임감찰이니만큼 은진언의 허락 없이 손우자를 만나 신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군사부와 감찰단이 반목을 하고 은진언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이를 감안하여 무한은 은진언에게 먼저 중간보고를 하였다.
“원하신다면 제가 손우자를 만나 물어보겠습니다.”
“으휴…….”
은진언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무한을 특임감찰로 임명하라는 명이 내려왔을 때만 해도 검천부라는 뒷배를 배려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무한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살수를 직접 잡아 집법당에 넘겼을 뿐 아니라, 흑천에 가서 연관성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게다가 살수의 정체까지 밝혀냈다.
“군사부 외에 연관 있는 부서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끄응”
은진언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군사부만 빼고 다른 모든 부서가 연관 있는 게 차라리 나았다.
무한은 이 시점에서 손우자를 만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역효과가 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은진언의 결정에 맡길 생각이다.
은진언이 한동안 고민하다 말했다.
“나를 감찰단주로 임명한 분은 검신이시네. 명패를 내리며 하신 말씀이 있지.”
“……?”
“그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말라고 하셨네. 방주인 자신을 조사할 게 있다면 서슴지 말고 하라 하셨지.”
은진언이 단호하게 말했다.
“방주도 감찰할 수 있는데, 총군사를 못 할 게 뭔가?”
그러면서 명령서를 꺼내 요지를 적고 감찰단주의 인을 찍어 건넸다.
“가서 확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