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묻고 싶은 것부터 물어라.”
무한이 묵묵히 도왕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고에 당하셨습니까?”
도왕이 고개를 저었다.
“고에 중독되긴 했지만 오래전 해독하여 지금은 없다.”
고를 제거한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심양조조차 천일고를 해독하지 못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고, 천기자 역시 고에 당해 치매에 걸렸다.
스스로 고를 제거했다면 도왕이야말로 천하제일인이어야 했다.
도왕이 무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어 말했다.
“내가 당한 고는… 심 대형이 제거했다.”
“……?”
“미혼고(迷魂蠱)였다더군.”
미혼고는 중독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고를 쓴 자의 명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된다.
다만, 시전자가 길들인 성충을 집어넣어야 하기에 쓰기가 더 어렵다.
도왕 같은 고수가 미혼고에 당하다니 의외였다.
게다가 고를 제거하다니.
“중독된 당사자는 고를 죽일 수 없다. 신체에 동화되어 의식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타인은 가능하지. 고를 제거할 정도의 경지에 이른 이가 드물 뿐이다.”
무한은 혼란스러웠다.
할아버지가 도왕의 고를 제거해줬다고?
도왕은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솔직히 고가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심 대형이 말해주고서야 알았지. 아니, 내게 정말 고가 있었는지 하는 의심도 있었다.”
도왕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도왕이 무한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심 대형이 천일고에 당하고, 천기자가 망혼고에 당했으니 나도 당했을 가능성이 높긴 했지. 하지만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다.”
이는 심양조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무한은 개의치 않고 계속하여 물었다.
“만일 고가 있었다면 누가 손을 썼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
“손우자를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내가 고에 걸렸다면 손우자를 배제할 수 없지. 검신과 나, 천기자를 동시에 중독 시킬 수 있는 기회를 지닌 자는 그뿐이니까.”
도왕의 얼굴에 자괴감이 어렸다.
“놈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깟 놈은 언제든 죽일 수 있지.”
도왕의 눈에 살기가 스쳤다.
순간, 무한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화경에서 현경을 바라보는 자가 살기를 노출한다?
그 자신도 심적 동요를 느꼈는지 도왕이 묵묵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지금껏 살려두셨군요. 그것도 총군사의 자리에 두고 말입니다.”
“…….”
무한은 그의 고충을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동조하는 자가 있었겠지요. 내성주가 간여되어 있는 겁니까?”
내성주는 도천부 고강후를 이른다.
도왕 같은 고수가 성충에 중독되었다면 내부의 협조가 있었을 것이다.
감았던 도왕의 눈이 뜨였다. 눈에서 광망이 폭사되었다.
순간, 무한은 천목혈이 찌릿, 하면서 경고를 보내는 걸 느꼈다.
전신에 퍼진 기운이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나와 심 대형 간의 약조는 여기까지다.”
도왕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음침하였다.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였으나 눈빛의 광망은 더욱 짙어졌다.
“고를 제거하고 천하방주의 자리를 물려주는 대신, 네가 경천신검을 쥐는 날까지 안위를 보장하는 게 약조였지. 그리고 오늘 네가 경천신검을 쥐고 나타났구나.”
도왕의 말에는 지금 무한이 살아 있는 게 자신의 배려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언제가 나는 네 적이 아니라고 했지. 하지만 이제 너는 내 적이 될 수도 있다. 네 선택에 달렸지. 내 곁에 서겠는가?”
도왕의 물음은 짧았으나 그 무게는 태산처럼 다가왔다.
무한이 도왕의 시선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건 방주께서 어디에 서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혔다.
이윽고 도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검신은 고를 쓴 배후로 손우자와 고강후, 그리고 권왕을 의심하였다. 그들이 담합했다고 여겼지.”
도왕이 아들을 고강후라고 부를 때 눈가 주름이 파르르 떨렸다.
믿었던 큰아들이 자신에게 고를 썼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혼고에 당하여, 이를 제거하기 위해 폐관수련을 하는 척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동태를 지켜봤지.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 간의 연관고리를 찾지 못했다. 아니, 정말 그들이 담합 했는지도 확실치 않아.”
도왕이 내심 탄식을 하며 태사의의 팔걸이를 툭툭, 쳤다.
“이 자리는 말이지…… 최고의 권력을 지녔음에도 앉는 순간, 모든 이와 단절이 되고 만다. 아무도 내게 진실을 보고하지 않는다.”
깊은 회한이 어린 어조였다.
“지금 내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저는 믿을 수 있습니까?”
도왕이 클클, 웃었다.
“내 아들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찌 너를 믿을 수 있단 말이냐? 너는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다만, 우리는 한배를 탄 셈이니 손을 잡자는 뜻이다.”
서로 믿지는 못하지만 공동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자는 뜻이다.
“나는 한번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킨다. 그건 심 대형이 잘 알고 있지.”
도왕이 덧붙이는 순간, 무한의 천목혈이 찌릿하고 울렸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굳이 자신이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지킬 것이니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다.
무한은 어떤 금제가 걸려 있기에 도왕이 할아버지 심양조와의 약조를 지켰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우리가 한배를 탔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모르겠나? 권왕과 손우자가 한통속이다. 고강후는 거기에 놀아난 멍청이지. 그놈은 자신이 팽 당한 줄도 모르고 흑천과 싸우러 갔다.”
도왕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스쳐갔다.
“그놈은 거기서 죽을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손우자가 죽을 구덩이를 파놓고 고강후를 밀어 넣은 거지.”
아비를 배반한 자식이라도 차마 자기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 죽을 구덩이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도왕의 눈에서 흉흉한 빛이 터졌다.
“권왕은 아마 내게 도전할 것이다. 손우자는 너를 죽이려 하고…….”
그러면서 옆에 있는 서탁에서 문서 하나를 집어 무한에게 던졌다.
무한이 문서를 잡아 펼쳤다.
[긴급 보고 : 심무한의 생모는 흑천의 흑월주 진소향으로…….]
무한의 안색이 굳었다.
지금 와서 어머니의 존재가 노출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손우자는 너를 흑천의 첩자로 몰아갈 것이다. 근거 또한 충분하니까.”
생모 출신이 밝혀지면 무한의 흑천 전향이 사실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손우자는 오늘과 같은 상황을 노리고 진소향이 심군하에게 접근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쉽게 반박하기 어렵지.”
무한은 분노가 치밀었으나 억누르며 물었다.
“그들이 방주께 도전하는 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나를 죽여 무얼 얻는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천하방을 완전히 장악하려면 검신의 자취를 지워야 한다.”
도왕이 탄식을 하였다.
“지난 팔 년 이 자리에 있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검신과 비교되어 왔다. 만일, 내가 진정 천하방을 장악하고자 했다면 너부터 제거했을 것이다. 그들도 마찬가지겠지.”
“…….”
“네가 나와 손을 잡으면 검천부는 도천부와 함께 천하쌍패로 자리 잡을 것이다.”
도왕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권왕은 전력이 드러나 있으니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손우자의 전력은 알 수 없습니다.”
“흥! 손우자가 만독곡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다. 당가에 의해 멸문된 곳이다. 약물로 힘을 기르는 건 한계가 있지.”
도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나를 미혼고에 중독되었거나, 아니면 발현을 막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 하지만 내게도 길러놓은 힘이 있다. 그들이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죽은 목숨이다.”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없겠군요.”
“아니,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
“권왕을 제거해라.”
“……!”
뜻밖의 주문이었다.
검신 사후 권왕은 천하방 제이인자로서 군림해왔다. 무공 또한 도왕에 필적한다. 무한이 무슨 수로 권왕을 제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권왕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 철포횡련공을 익힌 그의 피부는 어지간한 도검으로 흠집조차 낼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곳! 제대로 격중 하면 권왕은 쓰러질 수밖에 없다.”
말이 쉽지, 번개보다 빠른 권이 몰아치는 와중에 권왕의 신체 한 부위를 노린다?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다.
“그의 조문은 회음혈이다. 그러기에 항상 호신구를 착용하지.”
권왕은 항상 두터운 장포를 착용한다.
‘호신구를 가리느라 그랬던 모양이군.’
자신의 조문은 부부지간에도 알려주지 않는다.
권왕은 혼인조차 하지 않았다. 도왕이 이를 어찌 알았는지 궁금하였다.
어쩌면 진짜 조문이 아닌 도왕의 추정일 수도 있다.
무한은 도왕의 의중을 깨달았다.
천하사패의 전신, 사천방은 심양조가 힘으로 규합하였으나 세간에는 뜻이 맞은 네 명의 영웅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왕이 권왕을 제거한다면 의제를 해쳤다는 비난을 받는다.
‘나를 내세워 권왕을 제거하면 좋고, 권왕이 나를 죽이면 이를 빌미로 권왕을 제거하고.’
도왕으로서는 양수겸장의 수다.
무한이 말했다.
“방주나 권왕 모두 할아버지의 의제이시니, 제게는 의종조부가 되십니다. 그가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데 어찌 먼저 검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거래다. 내가 손우자를 죽여주마.”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손을 쓸 일이 있으면 제 손으로 처리합니다. 남의 손을 빌릴 생각 없습니다.”
도왕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나와 적이 되겠다는 뜻이냐?”
“서로 하는 일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 적이라 할지라도 손을 잡지요.”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드릴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
쿠쿵!
무한이 천하전 정문을 열고 나갔다.
수많은 이들이 쳐다보았다. 눈빛이 화살이라면 무한은 전신이 꿰뚫려 죽었을 것이다.
도왕과의 비무에서 터진 기파와 굉음으로 천하방 각 부와 당, 전에서 사람을 보내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
무한은 자신을 보는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묵묵히 발길을 옮겼다.
남궁우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조용히 뒤를 따랐다. 보기에는 정말 충직한 수행호위처럼 보였다.
무한은 말없이 장로전으로 향했다.
검천부주 무한이 천하전을 나와 장로전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정문 앞에는 장로전 호전무사들이 도열한 채였다.
“여기서 기다려.”
무한이 남궁우에게 이르고 호전무사들 사이를 지나 정문을 넘어갔다.
너른 마당을 지나 장로전 대전에 오르는 순간, 안에서 고함이 터졌다.
“여기가 어디라고 무단으로 들어오는 것이냐!”
대전 상석에 대장로 갈천경이 앉아 있고, 좌우로 열 명의 장로가 앉아서 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를 지른 이는 천무행 당시 죽은 유곡선의 아우 유곡명이었다.
무한은 거침없이 계단을 올라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장로전의 소환령을 받고 오는 길이요. 따로 허락을 구해야 하오?”
무한의 눈이 유곡명을 향했다.
깊고 서늘한 눈빛에 유곡명이 흠칫하였다.
무한이 대장로 갈천경에 이어 좌중의 장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를 소환한 이유가 무엇이오?”
“건방진 놈! 어린놈이…….”
쉭!
유곡명의 귓불을 스친 비도가 벽에 박혔다.
“말조심하시오. 어린놈의 비도도 당신의 목에 박힐 수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