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쿠쿵!
엄청난 기운이 검극에서 터졌다.
경천신검이 신검으로 불리는 이유가 이렇듯 강대한 기운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천부를 울린 기운에 남궁우가 자다 놀라 뛰쳐나왔다.
“뭐야?”
남궁우는 연무장에 선 무한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한을 감싸며 도는 기운의 소용돌이에 가까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람도 없는데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이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찌른 검에서는 끊임없이 예리한 기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퍼져갔다.
허공에 기운이 첩첩이 쌓이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치 검기로 벽을 쌓은 듯했다.
마왕검벽!
무한은 소마의 마왕검벽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검벽 안 무한의 신형이 아지랑이 너머로 보는 듯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쿠쿵!
검벽이 내려앉으며 묵중한 기파가 터지고, 한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그, 그게 뭐였어?”
남궁우는 보고도 믿기지 않은 듯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화경의 경지를 제대로 본 무인이 얼마나 있을까.
‘제아무리 천하제일인의 후계자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무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단을 걸어 올라오며 말했다.
“밥 먹자. 오늘 할 일 많다.”
***
운무대진 때문에 무한이 검벽을 시도하며 일어난 기의 폭풍은 검천부 안에서만 일어났다.
하지만 새벽 연공을 하고 있던 도왕은 검천부에서 일어난 막강한 기의 파동에 눈썹을 꿈틀하였다.
잠시 후, 눈을 뜬 도왕이 천천히 일어나 검천부 쪽을 바라보았다.
늘 무심했던 도왕의 얼굴이 미미하게 떨렸다.
또 한 사람.
막 새벽 연공을 마치고 손을 씻던 권왕이 흠칫 놀라 검천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두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가득했다.
어젯밤 무한이 돌아왔다는 보고는 받았다.
‘설마…….’
***
천하방 분위기는 흉흉하였다.
두 곳에서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흑천과의 전쟁은 도천부 고강후가 무력대를 끌고 이미 사천으로 출발했다.
감숙에서 마천을 공략할 무력대도 출정 준비로 한창 분주하였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각자의 일터로 들어설 무렵.
검천부에 내려앉았던 운무가 걷혔다.
지나던 이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검천부 쪽을 보았다.
쿠우웅.
거대한 대문이 활짝 열리고 무한이 걸어 나왔다.
검은 장포를 입고 등에 검을 맨 무한은 거침없이 발길을 옮겼다.
무한의 일보 뒤에서 남장을 한 남궁우가 호위로 수행하였다.
단, 두 사람뿐이지만 무한의 전신에 어린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아무도 길을 막지 못했다.
무한의 귀환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부터 검천부의 동정을 주시하던 이들이 멀찌감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일터로 가던 이들도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무리에 섞여들었다.
무한이 대로를 따라 걷는데 수십의 무사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 앞에 삼군사 문요가 서서 다가오는 무한을 노려보고 있다.
무한이 다가오자 문요가 두루마리를 펼치며 외쳤다.
“멈추시오. 검천부주, 장로전의 소환령이오. 군사부로 가서 일차 조사를 거친 후 장로전에 와서 해명을 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소.”
어젯밤 수모를 당한 문요는 이번에야말로 무한을 끌고 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감히 장로전의 소환을 거부할 자는 없으니.
그러나 무한은 소환령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묵묵히 걸어갔다.
문요의 안색이 홱, 바뀌었다.
“거부하면 강제로…….”
그러나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쿠웅!
무한의 전신에서 기파가 터지며 묵직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으윽!”
문요는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휘청거렸다.
무한이 말했다.
“장로전에 가서 말하라. 내가 직접 찾아가겠다고.”
무한의 싸늘한 목소리에 문요는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다.
무한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문요를 지나쳤다.
도열한 무사들도 무한의 기세에 압도되어 꼼짝하지 못했다.
무한의 걸음은 천하전 정문에서 멈췄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무한이 예를 취하며 말했다.
“검천부 심무한이 도왕께 여쭈고자 하는 바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으나 기이하게도 하늘에서 울리는 듯 천하방 내성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군사부 깊숙한 자신의 집무실에 있던 손우자는 무한의 목소리를 듣자 미간을 찌푸렸다.
무한을 끌어오라고 문요를 보냈건만 소식이 없다.
“도왕을 찾아갔단 말이지…….”
손우자가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때 이른 매화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너희 무인들은 그게 문제란 말이다. 힘이 있다고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지. 사람 목숨을 가지고 놀다보니 자신들이 신이라도 된다고 여기는 게야…….”
손우자가 창문 밖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매화 한 송이가 소리도 없이 떨어진다. 그저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뿐인데 꽃은 칼날에 베인 듯 잘려나갔다.
누가 봤으면 경악했을 것이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알려진 손우자였다.
“철 모르고 피어나면 곤란하해…….”
손우자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왕이 아니야, 신도 아니지……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마.”
쿠쿠쿵!
굳게 닫혔던 천하전 정문이 활짝 열리고, 한가운데 선 사내가 보였다.
너른 광장을 뒤로 하고 선 사내는 무한을 향해 예를 취하며 고했다.
“방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한은 천천히 천하전 정문을 넘어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남궁우가 뒤따르려 했으나 문이 바로 닫혔다.
“부주만 들라 하셨습니다.”
대문 너머 들려오는 소리에 남궁우가 쳇, 하고는 대문 앞 계단에 털썩, 앉았다.
무한을 따라왔던 무리들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추이를 지켜봤다.
사내는 무한을 데리고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광장 끝 계단 위에 도왕이 서서 다가오는 무한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왕의 손에는 피처럼 붉은 도집이 들려 있었다.
혈천마도.
한때 도왕의 별호는 하늘을 피로 물들인다 하여, 마도였다. 정파임에도 그런 별호가 붙은 건 손속이 잔혹했기 때문이다.
무한이 계단 아래까지 와서 멈춰서더니 예를 취했다.
“검천부 심무한, 방주를 뵙습니다.”
붉은 장포를 입은 백발의 도왕은 무심한 얼굴로 무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무한의 삼 장 거리에 마주 섰다.
“경천신검이 다시 세상에 나왔군!”
스르릉!
도왕이 자신의 애병 혈도를 뽑았다.
붉은 손잡이와 달리 새하얀 도가 눈부신 아침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넓은 도신을 지닌 장도(長刀)였다. 싸늘한 한기가 도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검을 뽑아라!”
무한이 도왕을 주시하다 손을 하늘로 뻗었다.
그러자 뒤에 맨 검이 스르륵, 빠져 나와 하늘로 솟구쳤다가 자연스레 떨어지며 무한의 손에 잡혔다.
기운으로 검을 뽑아 쥐는 모습을 도왕은 묵묵히 쳐다보았다.
도왕이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전력을 다해야 할 게다.”
의미 모를 경고를 한 후 도왕이 도를 찔렀다.
도는 베는 무기다. 그러나 도왕은 찌르기부터 시작했다.
쉬익!
허공을 가르며 도가 찔러오자 무한이 검을 뻗었다.
도와 검극이 부딪혔다.
쿠웅!
쇠붙이가 부딪혔을 뿐인데 진중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한의 굵은 눈썹이 꿈틀하였다.
검을 타고 전해오는 묵직한 기운.
도왕의 내공은 그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이였다.
도왕 역시 무한의 내공에 놀란 듯 눈가 주름이 살짝 깊어졌다.
가볍게 부딪히는 한 수로 서로의 내공을 파악한 후, 둘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샤샤삭!
백발의 노인이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수많은 도가 나타났다.
혈도가 잠시 머무는 곳마다 자신의 분신을 남겨두기라도 하듯 허공에 도가 찍힌다.
무한이 검을 세웠다가 전신의 기운을 끌어 앞으로 서서히 뉘였다.
서서히 기울어가는 검신에 무한의 전신공력이 이어지고,
쿠웅!
어느 순간 기파가 터지며 검기로 이룬 장벽이 형성되었다.
소마의 마왕검벽을 보고 무한 스스로 창안한 검벽.
아직 이름조차 짓지 못한 검벽은 닿는 것 모두를 갈아버릴 듯 예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얀 눈썹에 덮인 도왕의 눈이 꿈틀하였다.
순간, 허공에 찍힌 도가 무한을 향해 날아갔다. 그건 도가 아니라 도로 찍어낸 도강이었다.
수십 자루의 도가 날아들자 검벽의 기운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쾅! 콰광!
날아온 도는 검벽에 부딪혀 깨어지기도 하고, 검벽에 박히기도 하였다.
개중에는 검벽을 뚫고 무한을 향해 날아오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힘을 잃어 무한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스러졌다.
어느 순간, 날아오는 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왕은 처음 그대로 무심한 얼굴로 무한을 보다 이번에는 도를 늘어뜨렸다.
도왕의 공격은 순서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한의 내공 깊이를 알아보았고, 두 번째는 운기 능력을 파악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초식 대결인가?’
과연 도를 늘어뜨린 채 도왕이 다가왔다.
일 장 거리에 이르렀을 때 그대로 도를 사선으로 후려치며 달려들었다.
무한의 검도 아래서 위로 사선으로 올라왔다.
“지천격!”
도왕이 대신하여 검초를 외치며 도세를 급변하였다.
두 사람이 격돌하였다.
채채채채챙!
검과 도가 한 번 얽혔을 뿐인데 부딪히는 소리가 수십 차례 터져 나왔다.
그사이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좋구나!”
도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간 도를 쳐왔다.
무한은 말없이 검을 찔렀다.
채앵!
쳐내려오는 도를 살짝 옆으로 튕겨내며 도왕을 찔렀다.
중천격이다.
도왕이 도를 기울이자 검이 튕겨나가며 검세가 깨어졌다.
그사이 도왕이 바싹 다가와 도를 그어 내렸다.
그러나 이미 무한의 검이 도왕의 복부를 베어가는 중이다.
도왕이 도를 내려 막았다.
채챙!
두세 차례 타진하듯 손을 섞더니 이내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사람 그림자와 검과 도가 만들어낸 빛만이 번뜩이고, 쇠붙이가 부딪는 소리만 요란하였다.
채채챙!
햇볕이 가득한 천하전 너른 광장에 칼빛이 난무하고, 기파가 비산하였다.
천하에 다시없는 비무였으나 이를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그만하면 됐다!”
도왕이 어느 순간 뒤로 물러나며 도를 거두었다.
무한 역시 검을 거두었다.
도왕은 처음 그대로 차분한 자세였지만 무한은 호흡이 약간 거칠어지고, 검을 쥔 손아귀가 떨렸다.
이로써 두 사람 간에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다.
무한을 보는 도왕의 눈빛이 복잡하였다.
“따라오거라.”
도왕이 계단을 올라가며 무한에게 손짓을 하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천하전으로 들어갔다.
천하전 너른 대전에 들어선 도왕이 뚜벅뚜벅 걸어 태사의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짓을 하여 단 아래 좌측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거라.”
무한은 자리에 앉는 대신 도왕의 앞에 마주 섰다.
도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들었으나 다시 권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느새 화경에 이르렀구나. 심 대형의 안배는 정말 신묘하기 짝이 없군.”
진정 감탄한다는 말투였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이른 시점이군. 이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구나.”
도왕과 무한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혔다.
‘역시 도왕이구나.’
무한은 도왕의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이제까지 천하방주로 보여준 무능함과 유약함이 의도적인 모습이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