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무한이 성밖마을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길 양편으로 비키며 수군거렸다.
“어찌된 거지? 전향한 게 아니었어?”
“당연하지! 천하제일인의 손자가 왜 흑천으로 간단 말이야!”
성밖마을 사람들은 무한의 귀환을 당연히 받아들이면서도 우려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방 수뇌부에서 어찌 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요즘 천하방은 영 이상하단 말야.”
“그러게. 갈수록 안하무인이야.”
구시렁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무한은 홍반 앞에서 말을 멈췄다.
예전에 유아와 가끔 오던 반점이다.
“저녁을 먹고 들어가지.”
무한은 서두르지 않았다.
지금 검천부로 들어가봐야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검천부를 비울 것임을 산도에게 알렸으니 오도(五道)도 떠났을 것이다.
홍반의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점소이가 나왔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였다.
늘 사람들로 붐볐던 홍반이 왠지 썰렁했다.
무한 옆자리에 노인 둘이 앉아서 소면을 먹고 있었다.
무한이 두리번거리는 걸 본 노인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담뱃대를 내밀어 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심이 예전 같지 않아. 여기 홍반만 해도 주인이 바뀌니 음식도 영 아니란 말이지. 쓸 만한 솜씨를 가진 이들은 하나둘 떠나고 뜨내기들이 설치니…….”
마치 무한더러 들으란 듯 한탄을 이어갔다.
“전쟁을 핑계 삼아 떠난다지만 사람이 터전을 떠나기 쉬운가. 살 곳이 못 되면 떠나는 게지. 야반도주하는 사정은 또 뭔지…….”
무한이 노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봤다.
이미 어둠이 짙어 가는데 살림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아비로 보이는 사내가 말을 끌고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은 수레에 탔다. 여자가 작은 보따리를 지고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짐이래봐야 솥단지와 옷짐 몇 가지뿐이다.
“고리채에 털린 게지.”
마주앉은 노인도 짐수레를 보며 안됐다는 듯 혀를 찼다.
무한이 일어나 노인들을 향해 다가가서 물었다.
“말씀 좀 여쭈겠습니다.”
“이게 누구신가? 검천부주 아니시오?”
노인이 마치 이제 알아봤다는 듯 의뭉스럽게 대꾸했다.
무한이 짐수레를 보며 물었다.
“고리채라니… 성밖마을에 고리채를 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자 노인들이 봇물이라도 터진 듯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몰랐었나? 몇 년 전부터 고리채에 도박장에 기루까지… 그런 것들만 들어서고 있다네.”
“제대로 된 반점이나 가게는 문 닫고, 그 자리를 요사스런 짓을 하는 놈들이 차지하고 앉는다고…….”
무한이 창밖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청등과 홍등을 건 집이 꽤 많아 보인다.
“돈을 못 갚으면 집이나 가게를 뺏고, 사람을 잡아다 곤죽을 만들어. 노예로 판다는 소문도 있다고.”
무한이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천하방 경비대나 순찰대가 있을 텐데 그런 짓이 가능합니까?”
“그게 다 한통속이여. 관리들이 뇌물 받는 것이나 매한가지라고.”
노인들이 고자질하듯 미주알고주알 다 늘어놓았다.
다 들은 무한이 포권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있던 남궁우도 이야기를 다 들었다.
“이건 흑도 관할 영역에서나 벌어질 법한 이야기인데? 과장된 거겠지?”
“…….”
무한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도천부나 손우자 등을 상대하느라 밑에서부터 곪아가는 건 몰랐다.
‘아니지. 윗물이 썩었으니 아랫물도 더러워진다는 게 맞겠구나.’
장로전이나 내외전 주요 직책을 맡기 위해 암투가 치열한 이유를 하나 더 깨달았다.
이렇게 거둬들인 검은 돈이 아래서 위로 올라갈 것이다.
‘이래서야 흑천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성밖마을이 이러니 천하방 지부가 있는 주요 도시는 더할 것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으나 예전 같은 맛이 아니었다. 대충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한의 무거운 표정에 남궁우가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말했다.
“말한 것처럼 아주 맛있지는 않지만 먹을 만은 했어. 그러니 표정 풀어.”
“할아버지는 이런 일을 예상하셨던 것 같아.”
심양조와 심군하 모두 천하방을 해산하려 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서로 달랐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심군하는 힘이 집중되면서 상대 또한 이에 맞서기 위해 결집하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국지전을 벌여야 하는 걸 원인으로 삼았다.
심양조는 권력이 커지고 집중되는 것 자체가 독선과 오만, 부패의 씨앗이라고 보았다.
‘인간 속성에 대해 환멸을 느꼈기에 불인의 길을 택하셨던 건가?’
천하방에 이르니 성벽에 등이 주렁주렁 거리고 곳곳에 화로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성벽 앞에 이십 명의 무사들이 두 줄로 도열하여 통로를 만들고 한가운데 검을 든 경비대장이 서있었다.
무한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이미 전해졌는지 경비대장의 얼굴은 냉랭하게 굳어 있었다.
무한이 가까이 다가가 하마비 앞에서 말을 내렸다.
경비대장은 다가오는 무한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눈에는 적대감이 가득했다.
“신분패를 보여주시오.”
무한이 검천부주의 신분패를 건넸다.
경비대장이 앞뒤로 확인하고 돌려주며 말했다.
“들어가시오.”
경비대장은 규정에 따른 절차만 수행할 뿐 의례적인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무한이 정문을 지나 들어가자 너른 광장 맞은편에 무사들이 도열한 모습이 보였다.
양옆으로는 구경을 나온 듯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무한을 보며 수군거렸다.
도열한 무사들 앞에 있는 자는 삼군사 문요였다.
사람들은 문요가 직접 마중 나온 걸 보고 약간 놀랐다.
천하방 네 명의 군사들은 요인 중의 요인으로 경호가 엄중하고, 평소에는 모습을 보기조차 어렵다.
그런 삼군사가 직접 나왔다는 건 사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한의 생각은 달랐다.
문요는 천하방 작전을 입안한 자로 손우자의 수족이나 다름없다.
문요는 거만한 얼굴로 무한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광장을 가로지른 무한이 문요를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문요가 당황했다.
수십 명의 무사들을 대동하고 서 있는 자신을 허수아비 대하듯 하니 모욕감마저 느꼈다.
문요가 지나치려는 무한을 향해 말했다.
“검천부주, 이 길을 지나려면 해명해야 할 일이 있소.”
무한이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요를 보았다.
“삼군사가 검천부주에게 해명을 들을 자격이 있나?”
작지만 기운이 실린 목소리는 광장에 있는 모든 이에게 똑똑히 들렸다.
“일개 참모 주제에 천하방 주장(主將)의 길을 막고 무얼 하는 거지?”
이어진 말에 문요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지금 그 말은 군사부를 무시하겠다는 뜻이오?”
“군사부가 뭔가?”
“뭐…….”
문요는 말문이 막혔다.
“전략을 짜서 의견을 내는 곳 아닌가? 가서 하던 일이나 하게.”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귀하의 행보는 천하방의 안위와 명성에 심대한 누를 끼쳤소. 군사부는…….”
“다시 말하지. 군사부는 내 행적을 물을 자격이 없다. 삼군사란 자가 그런 것도 모르나?”
무한의 목소리는 지극히 싸늘하여 문요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어 무한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운이 흘러나왔다.
“우욱.”
도열한 무사들이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무한은 아무 말도 않고 열린 길을 따라 들어갔다.
남궁우가 몽롱한 눈빛으로 무한의 뒤를 따라갔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슬그머니 무한의 뒤를 따라갔다. 검천부와 군사부의 대립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고자 하는 것이다.
검천부에 이르렀는데 담벼락 너머 짙은 운무가 보였다. 목령산인의 진법이 아직까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이 정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밤인 데다 짙은 운무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한은 거침없이 운무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우가 흠칫 놀랐으나 곧바로 따라붙어 무한의 소매를 잡았다.
“생로를 아는 거야?”
“…….”
굳이 생로를 찾으려 할 필요 없었다.
목령산인에게서 조화지도를 익힌 무한은 조화지기의 맥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운무를 통과하자 검천부 전각들이 나왔다.
텅 빈 검천부 전각은 어둠 속에 거대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남궁우가 뒤쪽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운무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신묘한 진이야. 막무가내로 들어서면 몇 날 며칠 헤매다 다시 대문 앞으로 온다더라고.”
무한이 어떻게 이를 통과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무한이 객사를 가리켰다.
“저기가 객사야. 오늘 밤은 저기서 자.”
남궁우가 펄쩍, 뛰었다.
“싫어. 저 큰 객사에서 혼자 자라고? 무섭단 말야.”
무한이 어이없어 남궁우를 쳐다보았다.
“나는 여자야. 담이 작다고. 귀신이라도 나오면 기절하고 말 거야.”
남궁우가 우기고는 무한의 거처 검각의 빈방에 들었다. 비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실내는 깨끗했다.
“쉬고 있어.”
무한이 남궁우에게 이르고는 우천각을 통해 비밀연공실로 갔다.
지하 특유의 퀴퀴한 공기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원형 연공실 한쪽 벽에 검이 걸려 있다.
경천신검.
무한이 천천히 경천신검 앞으로 가서 예를 취했다.
‘부족하나마 경천십이식을 완성한 듯합니다. 이제 검을 쥐겠습니다.’
무한이 마음속으로 심양조에게 고하고 경천신검을 집었다.
잠시 검을 내려다보던 무한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싸늘한 한기가 연공실에 가득 찼다.
검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워 무한의 얼굴이 생생하게 비쳤다.
무한이 벽에 그려진 경천십이식 제일초 천의격 그림 앞에 섰다. 그러곤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내력을 주입하지 않았건만 검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태산이라도 벨 듯 무거웠다.
제일초 천의격에서 지천격, 회천격… 마지막 경천격까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경천십이식을 마친 무한의 검이 어느 순간 맹렬하게 움직였다.
쉬쉬쉭!
파파팟!
놀랍게도 벽면에 금이 가며 조금씩 허물어져갔다.
쩌적.
한 치 깊이로 파인 벽면이 허물어지며 경천십이식 도해도 사라졌다.
경천십이식 도해를 지운 무한은 서가로 가서 책들을 가지고 연공실을 나왔다.
검각으로 돌아온 무한은 책들을 다시 한번 살펴 머릿속에 새기고는 한 권씩 불에 태웠다.
할아버지가 세상에 나오면 안 된다고 한 금서들이니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이 책도 태워야 하나?’
무명공을 집어든 무한은 잠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안에 담긴 내용은 머릿속에 있으나 오의를 다 깨치지는 못한 상태다.
머릿속에 있는 것과 책으로 보는 건 약간 다르다. 책이 있다면 수시로 들여다보며 새로운 관점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무한도 이 금서들이 세상에 나가면 일어날 파장을 이제는 안다.
책의 내용이 알려지면 이를 얻기 위해 엄청난 혈풍이 몰아칠 것이다.
무한은 주저하지 않고 무명공을 불구덩이에 넣었다.
그런데 다른 책과 달리 무명공은 불에 타지 않았다.
“……?”
무한이 무명공을 꺼내 집어 들었다.
책은 그을음만 입었을 뿐 그대로였다.
‘어찌된 일이지? 종이가 아닌가?’
무한이 무명공의 재질을 살폈다.
확실히 여느 종이와는 질감이나 촉감이 달랐다. 책을 잡고 살짝 힘을 주었으나 찢어지지도 않았다.
무한은 다른 책부터 태우고 도가 양생결인 황정기공과 무명공은 검각의 지하석실에 보관하였다.
어느새 새벽이 밝아왔다.
무한은 검각 대전 문 앞에 서서 떠오르는 해를 봤다.
검천부를 두른 운무 사이로 해가 비치는 광경이 책에서 읽은 태풍의 눈 같았다.
무한이 천천히 검각 앞 연무장으로 내려가 경천신검을 뽑아 아침 햇살을 담았다.
우우웅!
검이 울며 강렬한 빛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