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54화 (154/250)

154화

쌰아악!

무량산의 폭풍 같은 도기가 밀려들었다.

살을 에는 듯한 도기의 그물이 무한을 에워쌌다.

무한이 비수를 양손에 나눠 쥐고 왼손에 든 비수를 앞으로 뻗었다.

치치칙!

도기의 그물망을 찢고 비수가 나아갔다.

자신이 형성한 도세가 흐트러지자 무량산이 이를 악물고 도를 내리찍었다.

순간, 무한의 신형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무량산의 앞에 나타났다.

콰악!

비수가 무량산의 오른 어깨를 그대로 그었다.

강기가 어린 비수에 그만 팔이 뚝, 떨어졌다.

그 순간 오른손에 든 비수가 날았다.

무량산의 뒤를 따라오던 복면인이 황급히 몸을 비틀며 도를 횡으로 내리찍었다.

무한이 무량산의 어깨를 베어낸 도를 던져 복면인의 도를 튕겨냈다.

콱!

그사이 먼저 던졌던 비수가 허공을 선회하여 복면인의 목덜미 옆에 박혔다.

“꾸륵!”

복면인이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무량산은 베인 어깨를 부여잡고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나 간신히 몸을 곧추세울 수 있었다.

“이기어검! 화경이었단 말이냐!”

경악한 무량산이 고통을 참으며 외쳤다.

“대체 경지란 게 무엇이오?”

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아를 해치지 말라는 말을 한 게 당신을 살렸소. 그러나 도천부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오.”

너무 놀란 무량산은 항거할 기운조차 없었다.

도천부에서 십여 년 봉공으로 대접 받으며 살아온 자신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무량산이 장탄식을 하더니 자신의 오른팔을 주워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한의 시선이 놀라서 얼어붙은 천종해를 향했다.

무한이 뚜벅뚜벅 다가오자 천총해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황급히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며 외쳤다.

“쳐라! 저놈을 죽여라!”

그러나 길 양편에 웅크리고 있는 자들은 숨만 죽이고 있을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엄청난 고수를 단숨에 죽인 무한에게 덤벼들 무모한 자는 없었다.

무한이 다가가 천종해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민간인이니 내공을 쓸 수 없었다. 그래도 수련으로 단련된 무한의 손바닥은 철판 같았다.

짜악!

천종해가 나뒹굴었다.

“크윽!”

천종해는 도천부에서 세 명의 봉공을 보내자 이번엔 확실히 원한을 갚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군자금으로 막대한 돈을 상납했지만 무한을 죽일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가 처참했다.

위세 등등했던 도천부의 삼봉공은 둘이나 황천길로 가고 한 사람은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기다.

“말하라. 어디 가뒀나?”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년은 굶어 죽는다. 그래도 좋으냐?”

천종해는 악바리였다. 어차피 죽을 것이란 생각에 이를 악물고 협박했다.

그때 누군가 어둠속에서 달려오며 말했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놈은 죽여도 됩니다!”

무한이 보니 오산사걸 셋째 주풍호였다.

오산사걸은 천해상단 근처에 머물려 수시로 천해상단의 동정을 살펴 보고하라는 귀영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만일 한 번이라도 보고를 빠뜨리면 다 죽이겠다고, 귀영이 추종향까지 묻히며 윽박을 질렀으니 오산사걸은 살기 위해서라도 열흘마다 백가상단을 통해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이놈들의 움직임이 수상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오늘은 백주대낮에 여자를 납치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오산사걸은 납치범들이 여자를 가두며 검천부를 거론하는 걸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희 형제 모두가 출동하여 지켜봤지요. 그런데 이놈들이 한밤중에 우르르 몰려가더라고요.”

셋째 주풍호가 천종해와 무리를 따라오고, 나머지가 여자를 구출하기로 하였다.

“상단에 남아 있는 놈들이 몇 안 되니 지금쯤 구출했을 겁니다.”

무한이 천종해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앞장서라.”

천종해는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 순순히 상단으로 향했다.

설마 관부가 있는 현에서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천해상단에 이르자 과연 불이 환히 밝혀져 있고, 이곳저곳 뒤지고 다니는 이들이 보였다.

무한을 잡기 위해 대부분이 출동했는지 수색하는 인원이 몇 안 되어 보였다.

마침 대문 밖으로 나오던 이가 천종해를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무한은 그자의 표정을 보고 오산사걸이 유아를 구출했음을 알았다.

빠각!

무한이 잡고 있던 천종해의 팔을 그대로 부러뜨렸다.

“이건 유아를 납치한 대가다. 그리고 이건…….”

빠각!

천종해의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

“죽은 사람 목숨 값이다.”

천종해는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살았다는 생각에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무한이 주풍호에게 말했다.

“이 자를 천하상단 천평산 단주에게 데려가시오.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전하고 관부에 넘기시오.”

그러자 천종해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자신의 악행이 아버지 천평산의 귀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다.

펄썩!

천종해가 그 자리에 엎드려 무한에게 빌었다.

“내가 한 일이니 그냥 관부로 넘기게.”

무한은 천종해의 말을 무시하고 주풍호에게 반드시 천하상단으로 가서 먼저 고하라 일렀다.

주풍호가 무슨 뜻인지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이놈을 관부로 넘기면 뇌물 받아 처먹은 관리들이 그냥 풀어줄 겁니다. 당연히 그리 해야지요.”

주풍호는 신이 났다.

대단한 공을 세운 데다 자신들의 족쇄나 다름없는 천종해가 끌려가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되니 그럴 만도 했다.

“우선 가시지요. 사람을 구출하면 접선하기로 한 곳이 있습니다.”

무한은 주풍호의 안내를 따라 동이현 으슥한 골목으로 갔다.

“왜 이제 오는 거야?”

어둠 속에서 망을 보고 있었던지 오산사걸의 넷째 주재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스윽, 문을 밀치고 나오다 무한을 봤다. 주재호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협,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면서 집 안으로 안내하였다.

침실에 유아가 마혈이 짚인 채 누워 있었다.

오산사걸의 첫째 조대오와 둘째 석보가 달라붙어 있다가 무한을 보고는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어 주풍호와 끌려온 천종해를 보고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곤 말했다.

“마혈을 풀려고 하는데 도무지 저희 실력으로는…….”

조대오가 재빨리 변명하였다.

무한이 침상에 누운 유아에게 다가가서 마혈을 풀어주었다.

유아가 벌떡 일어나 석보의 따귀를 때리려 하였다.

석보가 피하며 외쳤다.

“낭자, 왜 그러시오!”

“너, 혈도 푼다면서 왜…….”

유아가 차마 말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씩씩거렸다.

무한이 석보를 바라보자 하얗게 질려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오해입니다. 그저 마혈을 풀고자 여기저기 찔렀을 뿐입니다.”

무한이 유아에게 말했다.

“유 총관을 구해준 사람들이잖아. 한번 넘어가주자.”

“부주를 봐서 이번엔 용서하지. 네 이름이 뭐야? 다시 한 번 여자를 희롱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너는 죽는 거야.”

“낭자, 정말 오해요.”

석보가 변명을 하였으나 유아가 끝내 이름을 받아냈다.

유아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풍호에게 질질 끌려온 천종해를 보고는 달려가 따귀를 때렸다. 그러고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이놈들이 마영을 죽였어요.”

마영은 죽은 호위의 이름이다. 오랫동안 유아를 호위했으니 정도 들었을 것이다.

무한도 가슴이 아팠다. 당장이라도 천종해를 죽이고 싶지만, 자신마저 정도를 어길 수는 없었다.

천종해가 무림인이라면 바로 처치했겠지만, 민간인이니 어쩔 수가 없다.

다만, 이번에는 천평산도 감싸지 못할 것이니, 관아로 가면 사형될 것이다.

“마영을 죽인 무림인들은 이미 죽었어. 이놈도 죽을 거야. 원한을 갚았으니 가서 장례를 치러주자.”

무한이 유아를 달래고 오산사걸에게 말했다.

“이번에 큰 공을 세웠소. 귀 호위를 통해 후한 보답을 하겠소.”

“아닙니다. 거리의 흑도를 거두어주셨잖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동안 천하방 검천부의 일을 하며 은근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던 조대오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은근히 물었다.

“이제 저희는 무얼 해야 할까요?”

“천종해가 잡혔으니 동이현에 머물 이유가 없지요. 함께 갑시다.”

오산사걸이 감격해하며 뒤를 따랐다.

***

천하방으로 가는 길.

무한과 남궁우 두 사람만 가는 길이다.

웬일인지 남궁우는 여장을 하였다. 심지어 약간 화장을 한 듯도 했다.

‘쳇!’

여자란 사실을 알았으니 좀 다정하게 말이라도 건넬 줄 알았는데 목석이 따로 없다.

참다 못 해 남궁우가 말을 걸었다.

“부주, 무얼 그리 생각해?”

“도천부가 대놓고 나를 죽이려 했어. 천종해의 부탁이라 들어준 게 아니야.”

무한은 고강후의 의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남궁우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말했다.

“당연하지. 고강후 입장에서 생각해봐. 고우는 죽었는데 함께 있던 눈엣가시가 아직 살아 있다면… 게다가 고우가 천하방 소방주 감이었다며?”

“…….”

“고우가 죽었으니 차기 소방주 감으로 누가 거론되겠어?”

“지금 천하방에서 나는 배신자로 낙인 찍혀 있어.”

천하방은 무한이 당 가주를 죽였다는 누명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흑천으로의 전향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니 주의하라는 첨언도 붙었다.

남궁무룡이 오대세가와 휘주 일대에 무한의 흑천 전향은 날조된 것이며, 흑천과 당가의 중재를 선 것이라 밝혔으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중이다.

“그러니 이때다 하고 제거하려는 거지. 죽은 자는 말이 없어. 영원히 흑천으로 전향한 자가 되는 거지.”

남궁우가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무한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다만, 도왕의 한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 나는 네 적이 아니다.

마지막 문파 예방 차 도왕을 찾았을 때 그가 한 말이다.

그는 무한의 적의를 느꼈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도왕과 고강후… 부자의 생각이 다르다는 건가?’

무한은 고노로부터 천기자도 고에 당했다는 사실을 들은 뒤로 도왕도 고에 걸린 게 아닌가 의심하는 중이다.

천하대전에서 보여준 무기력한 모습은 천하방주에 어울리지 않았다. 충분히 할 만한 의심이다.

고노는 손우자가 직접 천기자에게 고술을 걸었다고 했다. 이는 손우자 역시 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무한은 이번에 천종해를 잡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천평산은 우곤충에 당했다.

당시 여러 가지 일이 있어 깊이 생각지 않았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의아한 점이 있었다.

천종해와 손우자는 접점이 없는데 어떻게 고를 구했을까?

반면 천종해와 도천부는 밀접하다. 만일 천종해가 고강후에게 고를 받았다면… 고강후와 손우자는 한 배를 탄 사이라는 뜻이다.

이는 고강후가 아버지 도왕에게 직접 고를 썼거나, 누군가 고를 쓰는 데 동조했다는 말이 된다.

도왕마저 고에 당했다면…….

‘천하를 일통한 천하사패 중 세 사람이 고에 당하다니.’

무한의 말이 멈춰 섰다.

처음 천하방으로 오던 날, 담철조가 자신을 마차에서 내리게 하고 천하방을 보여주던 고갯마루다.

그날처럼 해가 기울어가고 있다.

천하방 성벽은 그때처럼 황금빛으로 빛났지만 무한에게는 왠지 바래 보였다.

마치 기울어가는 천하방의 앞날처럼 황금빛이 생기를 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