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꾸나.”
무한은 심군하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거실에 마주 앉자 여자가 차를 내왔다. 아이는 궁금한지 아버지 옆에 착 달라붙어 무한을 살폈다.
“나도 어떻게 하여 이곳에 왔는지 모른다.”
심군하는 불망객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으나, 그 자신도 왼팔을 잃고 절벽에서 떨어졌다.
명란하에 빠져 목숨은 건졌으나 급류에 휘말려 내려오다 암초에 머리를 부딪쳤다.
“명란하에 떠내려가던 나를 이 사람이 구했다. 그러나 모든 기억을 잃었지. 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다.”
열흘 만에 깨어난 심군하는 피범벅인 자신을 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충 짐작했다.
불망객과의 접전에서 잃은 것은 왼팔만이 아니었다. 단전이 깨져 내공도 상실했다. 심군하는 반년여의 시간이 흘러서야 거동할 수 있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누군가를 죽이는 삶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심군하는 자신의 이름을 유수행이라 이름 짓고 물처럼 흘러가듯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언제고 나를 찾아오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게 아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나.”
심군하가 말을 마치고 여자를 소개하였다.
“봉영영이라 한다.”
무한이 봉영영에게 예를 취했다.
“아버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봉영영은 불안한 눈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심군하가 무한을 따라 떠날까 염려하는 게 분명했다.
무한이 속으로 탄식했다.
아버지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해보였다.
“잠시 원봉을 데리고 자리를 비켜주겠소?”
봉영영이 아이와 함께 거실을 나갔다.
심군하가 장탄식을 하였다.
“이곳은 절지라 세상과 격리되어 있지. 그런데 네가 찾아온 걸 보면 하늘의 뜻인가 보다. 내가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았더냐?”
무한이 그간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를 마치자 심군하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눈을 뜬 심군하가 입을 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치 않은 신분이었군. 하지만 지나간 일이다. 나는 다시 세상에 나설 생각이 없다. 다만, 네 어미에게 미안하구나.”
천하제일인의 후계자에서 무공을 잃은 불구의 몸이 되었건만 심군하는 동요하지 않았다.
“살아계신 걸 알면 당장 달려오실 겁니다.”
심군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과거 역모의 죄를 짓고 유배를 가다가 반대 세력에 의해 몰살당할 뻔했다. 그래서 외부에 알려지는 걸 두려워한다. 그러니 내가 서안으로 한 달 후에 찾아가겠다고 전해라.”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머물면서 네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한다.”
심군하는 장성한 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무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거실에서 나오자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심군하가 그들에게 무한을 데려가 소개했다.
마을사람들은 심군하의 아들이라고 하자 경계의 빛을 누그러뜨렸다.
무한은 며칠간 머물며 아버지와 낚시를 다니고 밭을 갈았다.
또한 원봉과도 친해졌다. 홀로 자란 무한에게는 의붓동생도 친혈육처럼 느껴졌다.
원봉도 무한을 친형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무한은 아버지의 허락을 얻고 원봉에게 경천심결과 심의삼재검을 알려주었다.
며칠 후 무한이 떠나려하자 원봉이 아쉬워하며 따라 나가겠다고 떼를 썼다.
“네가 경천심결과 심의삼재검을 다 익힐 무렵 형이 다시 오마.”
“금방 익힐 건데? 그럼 형도 금방 오나?”
무한이 웃으며 원봉의 더벅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심군하는 마을 밖까지 배웅 나왔다.
“이 길을 따라가면 커다란 고목나무를 만나고 그 옆으로 산을 넘는 작은 길이 나올 것이다.”
심군하가 절지 밖으로 나가는 아주 작은 소로를 알려주었다.
무한이 다시 한번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길을 떠났다.
심군하는 아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
전쟁이 임박했다.
손우자의 집무실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밤늦도록 지도를 보며 손우자가 궁리를 하는데 찬바람이 슬쩍 불며 한 사람이 나타나 부복하여 문서를 올렸다.
“심무한이 난주에 나타났습니다.”
무한의 행적을 정리한 문서를 받은 손우자가 미간을 문질렀다.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는 데 전념해야 할 시기이다. 그럼에도 무한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손우자의 직감은 무한이 전쟁의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십여 년을 공들인 대계가 어그러지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일전에 무한에 대해서 강유와 강소소를 떠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월야루라… 거기가 흑천의 난주지부였던가?”
“기루로 위장한 흑천의 지부입니다.”
“알았다.”
손우자가 손을 젓자 나타난 이가 사라졌다. 손우자가 서랍에서 문서철을 꺼냈다.
표지에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문서철을 열자 무한에 대한 기록이 나왔다.
손우자가 무한의 난주 행적을 적은 문서를 문서철에 끼우며 최근 행적을 적은 서류를 다시 한 번 살폈다.
“흑천노조와 피전격, 흑선수사를 만나고… 흑천 난주지부에 갔다? 정말 전향이라도 한 건가?”
문서철을 뒤적이던 손우자의 손이 멈췄다. 문서를 뽑아든 손우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왜 이걸 확인하지 않았지?”
서류는 무한이 천하방에 들어오기 전 서안에서의 행적을 적은 것이었다.
열 살 어린아이의 행적이니 별게 없었는데, 한 가지, 생모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었다.
단지 기녀였다는 소문이 있었다는 것과 무척 미인이었다는 것 외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기녀, 월야루…….”
손우자의 뇌리에 퍼뜩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진소향!’
흑천노조의 외동딸이자 흑월의 주인이었던 진소향이 이십 년 전 실종되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손우자의 입술이 비틀리며 기괴한 미소가 얼굴 가득 퍼졌다.
“그런 거였어? 심군하,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냐?”
손우자가 책상 옆에 있는 끈을 당기자 사라졌던 사내가 다시 들어왔다.
“당장 서안으로 가서 팔 년여 전 이곳에 살던 여자의 용모파기를 그려 와라.”
사내가 문서를 받아들고 사라졌다.
손우자는 문서보관실로 가서 흑천에 대한 기록을 뒤졌다.
“여기 있군.”
손우자의 손에 들린 건 흑월주 진소향의 용모파기였다.
“심무한, 너는 원래 검천부주의 자격이 없었구나. 흑천의 종자가 감쪽같이 속이고 들어오다니.”
그러다 의문이 들었다.
천하제일인 심양조가 이를 몰랐을까?
아니, 당시 무한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러 간 천기자가 이 사실을 몰랐을까?
손우자의 입 끝에 다시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
“다 알고도 그랬단 말이지? 내가 그래서 당신들을 용서할 수 없는 거야.”
손우자의 독백이 집무실을 흐르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서현 외곽의 한 장원에 무한이 나타났다.
난주에 들러 어머니 진소향에게 아버지의 생존 소식과 서안에서의 만남에 대해 알리고 곧바로 휘주까지 달려왔다.
남궁세가는 검천부 식솔들을 위해 남궁세가 방계 상단으로 위장한 장원을 마련하였다.
무한이 대문에 이르자 지키던 무사가 알아보았다.
“부주께서 오셨다!”
무한이 장원에 들어서자 검천부 식솔들이 모두 달려 나왔다.
중원 전역에 전쟁 소식이 퍼져 흉흉한 가운데 무한의 행적이 묘연하니 모두가 걱정했던 것이다.
유아가 특히 반겼다.
“부주가 흑천으로 전향했다고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몰라요.”
검천사위의 수장 염량도 한마디하였다.
“이제 부주는 저희 없이는 한 발짝도 못 나가십니다.”
무한 일행이 괴인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에 검천사위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검천부 식구들을 잘 지키시는 게 저를 지키는 겁니다.”
“하하하. 아우 왔는가?”
멸마대도 이미 와 있었다. 연추산과 오상 등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강문평이 쏜살같이 튀어와 무한을 얼싸안았다.
“사형!”
악가복이 민망한 표정으로 멀찌감치서 바라보고 있었다.
무한은 새삼 자신에게 딸린 식솔들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귀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두 호법을 찾으러 간 무흔도 소식이 없었다.
하기주와 신검무적대는 그다지 염려가 되지 않았으나 담철조와 공곤은 걱정이 되었다.
소식이 끊길 무렵 담철조는 하북을, 공곤은 강서 지역을 순회하고 있었다.
손우자가 무한을 노린다면 두 호법부터 제거하는 게 수순이다.
“경험이 많은 분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염량은 담철조와 공곤을 믿었다.
무한은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회포를 풀고, 다음 날 남궁세가로 향했다.
검천부 식솔들이 무사히 천하방을 빠져나와 서현에 안착하기까지 남궁세가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남궁세가에 이르자 남궁세가 삼형제와 남궁우가 마중을 나왔다.
“무사히 왔군.”
남궁명이 반겼다.
무한이 남궁호를 향해 포권을 하며 감사 인사를 하였다.
“덕분에 검천부 식솔들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게 없네. 다들 고수들이더군.”
남궁호가 손사래를 쳤다.
남궁우는 여전히 건들건들하며 무한을 맞았다.
“어서 와. 가주께서 기다리고 있어.”
남궁무룡은 차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한이 포권을 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이번에 남궁세가의 덕을 입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렇게라도 도울 수 있어 다행이네.”
남궁무룡이 손을 저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게.”
무한과 남궁 삼형제, 남궁우가 빙 둘러 앉았다.
차를 내는 남궁무룡의 표정은 침중하였다.
각자에게 한 잔씩 차를 따라주고서 남궁무룡이 입을 열었다.
“천하방에서 동원령을 발동하였네.”
과거 대파의 장문인들과 세가의 가주들이 모여 심양조에게 한 가지 약조를 하였다.
천하방이 마천과 싸울 경우 동원령을 발동하면 무조건 참전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이 내용을 적은 영패를 심양조에게 건넸다.
남궁세가 역시 전대 가주가 약조한 바가 있으니 이에 응해야 한다.
“본가는 소가주가 무룡대와 함께 출전하기로 했네.”
내키지 않지만 남궁세가는 약조를 지키고자 했다.
무한이 마천의 상황을 전했다.
“소마는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천하방 강경파들만 숙청하면 되지 않겠는가?”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감숙 변방에서 전쟁이 그친 지 팔 년여밖에 되지 않지만, 중원은 평화의 시기가 길었습니다.”
무한이 천하대전에 참석하여 느낀 바를 전했다.
“체제가 안정되면서 각 문파는 물론 지역 내 문파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권력과 이익을 차지한 쪽은 더욱 많은 걸 원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불만은 더욱 커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남궁세가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기에 남궁무룡은 듣기만 하였다.
“그러니 권력을 쥔 자들이 위기를 조장해서라도 없는 자들의 불만을 누르려 하는 겁니다.”
“그러다 자신들도 패망할 수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오만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게 크니 설마 지겠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이지요. 게다가 설령 앞날을 걱정하는 이가 있더라도 여러 사람의 주장에 휩쓸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건가?”
남궁무룡의 물음에 무한은 가만 고개를 저었다.
“막아야지요.”
“어떻게 말인가?”
이어진 무한의 말에 남궁무룡은 물론 함께 있던 남궁 삼형제와 남궁우가 깜짝 놀랐다.
“천하방을… 해산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