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49화 (149/250)

149화

동사철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어렸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았기에 고벽후가 선수를 쳤다.

“당가에서 골육상잔이 벌어졌소. 그 와중에 제 아우가 누명을 쓴 것뿐이오. 국주가 강호의 헛소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믿소.”

동사철이 고벽후와 심무한을 번갈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 대주의 말이라면 믿겠소.”

무한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동사철이 무한을 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어디에선가 보지 않았소?”

“초면입니다만.”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동사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긴 한데 왠지 낯이 익소.”

동사철은 무한을 다시 한 번 훑어보고는 혈랑에게 시선을 주었다.

“혈랑, 잠시 할 이야기가 있네.”

“나는 없소.”

혈랑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동사철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자네와 나는 가는 길이 다르네. 비록 구명지은을 입었지만 오은과의 혼인은 허락할 수 없네.”

“바라고 한 일이 아니오.”

혈랑이 냉랭하게 대꾸하였다.

“나는 은원이 분명한 사람이네. 자네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할 수 있게 해주게.”

그러면서 동사철이 품에서 옥합을 꺼냈다.

“이건 가보로 내려오는 만년은옥이네. 대단한 기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품에 지니고 있으면 몸을 훈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네.”

“그딴 거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혈랑은 여전히 돌아보지도 않았다.

고벽후가 웃으며 말했다.

“혈랑,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줄 때 받아라.”

“어린애라니!”

혈랑이 고개를 휙 돌려 고벽후를 노려보았다.

고벽후는 혈랑의 시선을 무시하고 동사철에게 말했다.

“난주 정파인들의 중지는 모으셨습니까?”

“우리는 천하방과 함께 마천을 상대할 것이네.”

고벽후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그럼 마천을 용인하기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고벽후가 심무한을 슬쩍 보곤 말했다.

“천하제일인 사후 천하방은 변질되었습니다. 예전의 천하방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도 천하 정도의 기둥일세. 마천과 대적할 유일한 세력이기도 하고.”

그때 무한이 말했다.

“두 거대 세력의 싸움입니다. 천하방은 난주 무림을 마천의 칼받이로 내세울 겁니다.”

동사철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천하방 사람이지 않나?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사람이 바뀌면 조직도 바뀝니다.”

무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동사철도 알아들었다. 또한, 가장 우려하는 일이기도 했다. 한숨을 쉬듯 말했다.

“우리에겐 대안이 없네.”

“아니, 있습니다. 난주 정파만으로는 부족하지만 난주의 흑백 양도가 합심하면 스스로를 지킬 정도는 될 겁니다.”

“지금 흑도와 손을 잡으라고 하는 건가?”

동사철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무한을 보았다.

고벽후의 보증이 있긴 했지만 흑천으로 전향했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하는 눈치다.

“과거 정마대전 당시 흑백 양도가 동맹하여 마천에 대적했습니다. 난주 무림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요.”

“강하보가 멸문 당했네. 난주 흑도에서 패권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질 걸세. 아마도 그들이 누군가와 손을 잡을 형편이 되지 않을 걸세.”

“그야 누군가 난주 흑도를 일통하면 되지요.”

무한이 웃으며 홀로 앉아서 술을 마시는 혈랑을 보았다.

혈랑은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도 모르고 연신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동 국주께서 귀한 따님을 마적 소굴로 보낼 수 없겠지만, 난주 흑도의 수장이라면 고려해보실 수 있지 않을까요?”

무한의 말에 동사철의 표정이 묘해졌다.

변방인 난주는 사실 흑백이 분명하지 않다. 정파도 뒤로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기도 한다.

반면 강하보는 흑도라고는 해도 대부분의 사업을 떳떳하게 운영해왔기에 난주 무림에서 무시하지 못했다.

동사철의 최대 고민은 딸이 마적인 혈랑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이다. 난주 정파의 명숙이라는 자신이 딸을 마적에게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흑도라면…….

체면에 손상이 가지만 그래도 마적보다 낫다.

무한의 말에 혈랑도 움찔하였다. 연거푸 마시던 술잔이 멈췄다.

무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동사철이 말했다.

“어려서 어미를 잃은 터라 더욱 귀하게 키운 딸이네. 정파인과 맺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지만… 흑도라도 떳떳한 대장부라면… 딸이 좋다면 받아들일 수 있네.”

동사철은 난주 무림의 안위라는 대의를 위해 자신의 체면을 양보할 의사를 밝혔다.

혈랑이 벌떡 일어나더니 뚜벅뚜벅 나갔다.

“난주 흑도에 벼락이 떨어지겠군.”

혈랑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고벽후가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신기하다는 듯 무한을 보았다.

말 몇 마디로 혈랑의 혼인 문제를 해결하고, 난주 흑백 양도를 단합시킬 방도를 마련한 것이다.

“누추하지만 두 분을 모실 만한 곳은 있소.”

동사철이 고벽후와 무한에게 난주표국으로 가자고 청했다.

고벽후가 여기에 온 것은 마천의 습격 때문이라는 걸 아니,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만 갈 곳이 있어서 사양하겠습니다.”

무한이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혈랑이 지옥곡 고수를 해치웠으니 머물 이유가 없다.

고벽후도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 바로 가봐야 합니다.”

“그렇구려. 난주표국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 부담 없이 오시오.”

동사철이 아쉬워하며 돌아갔다.

“나를 찾은 이유가 무엇이냐?”

둘만 남자 고벽후가 무한에게 물었다.

“멸마대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

무한은 검천부 인원을 서현으로 보냈으나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검천사위가 있고 신검대와 무적대 출신들도 있기는 하지만 무력대의 습격을 받는다면 위험해질 수 있다.

당초 신검무적대가 돌아오면 스무 명을 조장으로 삼아 무사들을 충원하여, 신검대와 무적대 각기 일백 명을 꾸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무사를 충원할 여유가 사라졌다.

“힘을 합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그러잖아도 그놈들 먹여 살리느라 뼛골이 빠질 지경이었는데 잘됐군.”

고벽후가 쾌히 승낙하였다.

“다만, 나는 합류하기 어렵다. 따로 갈 곳이 있다.”

고벽후는 신강 북쪽 마천의 본산으로 갈 생각이었다.

마천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위험한 일이다.

“괜찮겠습니까?”

“네게 말하지 않은 게 있다.”

고벽후가 주저하다 말했다.

“심 부주께서 실종될 당시 일이다.”

심군하가 실종되자 고벽후는 심군하와 불망객이 싸운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수색하였다.

그러다 다 죽어가는 불망객을 발견했다.

“심 부주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라도 일단 숨을 붙여 놓아야 했다.”

고벽후가 상세를 돌봐주자 불망객은 자신의 완월도법을 물려주었다.

“불망객도 심 부주가 어찌 되었는지 몰랐다. 최후의 순간 두 사람 다 전력을 다했고, 심 부주가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까지만 봤다고 했다.”

내장이 이미 상한 불망객은 며칠 살지 못하고 죽었다.

고벽후는 불망객을 묻어주고 두 사람이 싸웠다는 곳으로 가서 절벽 아래를 뒤졌지만 심군하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심 부주가 살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고벽후가 두 사람이 싸운 장소를 알려주었다.

“신강으로 가는 건 불망객의 부탁 때문이다. 사제지연을 맺지는 못했지만 무공을 전수받았으니 들어줘야 한다.”

고벽후가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와 동귀어진한 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무한에게는 좋게 들릴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은 개의치 않았다.

“망자와의 약속을 잊지 않다니, 대형은 대협이 맞습니다.”

고벽후가 감탄하였다.

“부주께서 자네를 봤다면 정말 뿌듯해하실 것이야.”

몇 달 보지 않은 사이에 무한이 훌쩍 성장한 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비무나 한 번 할까?”

“지금은 검을 쓰지 않습니다.”

무한이 사양하자 고벽후가 의아해하였다.

“검을 버렸다고?”

“당분간입니다. 대신 당가 소가주에게 비도술을 좀 배웠지요.”

무한이 허리춤의 비도를 툭툭 쳤다.

“비도술이라니. 뭔가 심득을 얻는 중인가보군.”

고벽후는 무한의 의중을 바로 알아차렸다.

비도는 한번 손을 떠나면 생사가 갈린다. 던지고 나서 후회해도 무를 수가 없다. 그만큼 생사에 대한 판단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무한은 생사경 공부를 하는 중이다.

“참, 막내가 생겼습니다.”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당전수라고 당가의 가주가 될 것인데 의형제가 됐습니다.”

“오대세가의 가주가 의제라니… 감당하기 어렵군. 하하.”

고벽후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면 술 대작이나 제대로 해보자.”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

난주 흑도가 발칵 뒤집어졌다.

혈랑이 흑도의 수장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렸다. 게다가 수하들까지 불러와 혈랑문이라는 문파까지 개파하였다.

무한은 서현으로 가는 멸마대 편으로 강문평과 악가복을 딸려 보냈다.

고벽후가 신강으로 떠난 뒤에도 무한은 난주에 머물렀다.

며칠 후 월아가 무한이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찾아왔다.

“루주께서 오늘 밤 이경에 보자고 하십니다.”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지 월아의 안색은 아직 창백했다.

무한이 독왕에게 받은 요상환을 건넸다.

“이건 사기를 몰아내고 내상을 회복시켜주는 약이랍니다.”

“괜찮습니다. 귀한 약을 함부로 쓸 수 없지요.”

“아닙니다. 어서 회복하셔야 제 마음도 편합니다.”

어머니의 제자이니만큼 신경이 쓰였다.

무한이 강권하니 월아가 약을 받았다.

그날 밤 이경 무렵.

무한이 월야루를 찾았다.

언제 싸움이 있었냐는 듯 월야루는 손님들로 붐볐다.

월아가 나와서 무한을 후원으로 안내하였다.

후원 정자에 진소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월아가 물러나자 둘만 남았다.

“왜 난주에 머물고 있는 것이냐?”

“한 번 더 뵙고자 했습니다.”

“너를 천하방으로 보냈을 때 우리의 인연은 끝났다.”

진소향이 냉랭하게 말했다.

“너와 나는 서로 선 자리가 다르다. 네가 무사히 장성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족하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외조부께서 그러시더군요. 어머니와 절연하였다고요. 그래서 흑월전을 동흥전으로 바꿨지만 일하던 하인까지 그대로 두고 이전 모습 그대로 관리하고 계셨습니다.”

“…….”

“억지로 끊는다고 끊어지고 잇는다고 이어진다면 어찌 인연이라 하겠습니까.”

무한의 말에 진소향이 한숨을 쉬었다. 굳었던 표정을 풀고 말했다.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면 나와 왕래하면 안 된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아니라 뜻을 받들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아버지는 천하방을 해체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요.”

“천하방을 해체한다고?”

진소향이 의아해하였다.

“천하방 자체가 권력화 되며 폐해가 커졌습니다.”

“원래 조직이란 건 권력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권력이 강해졌다고 해체한다면 어떤 조직이 유지되겠느냐?”

흑월주였던 진소향은 무한의 말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네가 결정해서 할 일이다.”

무한이 화제를 돌렸다.

“피전격을 만났습니다.”

진소향의 얼굴에 서늘한 한기가 내려섰다.

“그자가 뭐라더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