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무한이 창밖을 보니 건장한 청년이 서서 외치고 있었다.
“이 오라비가 들어가 끌고 나와야겠느냐?”
혈랑의 앞에 앉은 여자가 힘없이 일어났다. 여자의 이름이 동오은인가 보다.
혈랑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퉁명스레 말했다.
“가지 마라.”
그녀는 멈칫했다가 이내 발걸음을 뗐다.
혈랑이 탁자를 쾅, 쳤다.
“가지 말라고 했다!”
여자가 잠시 멈췄다가 눈물을 한 방울 떨구더니 그대로 나갔다.
동오은과 청년이 난주표국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혈랑이 돌연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탁, 빈 술병을 내려놓은 혈랑은 점소이를 향해 소리쳤다.
“술 더 가져와라. 아니 동이째 가져와!”
혈랑이 마치 원수라도 된 듯 노려보며 소리쳤기에 점소이는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갔다.
혈랑이 반점 안을 휘휘 둘러보다 어딘가를 지켜보는 무한이 눈에 들어왔다.
“야, 너… 고마귀 의제란 놈 맞지?”
그러면서 무한이 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반대편 창가 구석 쪽에 노인과 서생, 장한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서로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혈랑이 다시 무한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무한이 술병을 들어보였다.
혈랑이 벌떡, 일어나 무한 쪽으로 가서 의자에 털썩, 앉더니 술병을 잡으려 했다.
무한이 먼저 술병을 잡아 잔에 따르며 말했다.
“천천히 드시오.”
그러면서 노인 쪽을 바라보았다.
무한의 시선을 느낀 듯 노인이 이쪽을 보았다.
그때 서생이 전음으로 뭐라 하는데, 입술의 움직임이 읽혔다.
- 정파 놈들이 다 모여 있는 모양인데 꼭 오늘 해치워야 하나?
서생의 맞은편에 앉아 등만 보이는 장한도 전음으로 대답했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놈들이 맞군.’
겉으로 보기에는 어쩌다 합석한 사람들이 말없이 술을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울화를 풀 대상이 필요했던 혈랑이 이쪽을 보는 노인을 향해 윽박질렀다.
“뭘 그렇게 보나, 사람 술 마시는 거 첨 봐?”
노인이 눈살을 찌푸리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장한이 돌아보더니 혈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거냐?”
“그래. 근데 너 맷집 좀 있어 보이는구나.”
혈랑이 풀썩,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장한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노인이 일어나 장한을 잡아 앉혔다. 그리고 혈랑을 향해 포권을 하였다.
“죄송하게 됐소. 자꾸 이쪽을 보시기에 아는 분인가 하여 본 것이오. 사과드리겠소.”
노인은 무척 몸을 사렸다.
장한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장한은 묵묵히 앞에 있는 술을 들이켰다.
노인이 극진히 사과하자 혈랑도 더 시비를 걸 수가 없었다.
사방에 관군이 깔려 순찰을 돌고 있다. 싸움이 벌어지면 관군이 몰려올 것이고, 현상수배 된 마적 신분이 들통 나면 자신도 곤란해진다.
혈랑이 인상을 쓰고 다시 앉아서 술병을 잡고 들이켰다.
“커흑!”
독한 술이 들어가자 혈랑이 비틀하였다. 혈랑 같은 고수도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내지 않으면 취한다.
“제기랄.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냐고.”
혈랑이 혼잣말처럼 중얼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점소이가 술동이를 가져오자 혈랑이 무한에게 말했다.
“나와 대작할 자신이 있나?”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소.”
“흥! 고마귀의 의제라면서 술도 못하나? 아니면 너도 내가 마적이라서 상대하기 싫다는 거냐?”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주표국 동사철은 난주 정파의 명숙이오.”
“그래서? 마적에게 딸을 주지 못하겠다?”
“당신 같은 고수라면, 마적 생활만 청산하면 반길 거요.”
“흥! 여자 때문에 형제들을 버리란 말이냐?”
“귀하라면 딸을 마적 소굴로 보내겠소?”
무한의 말에 혈랑이 묵묵히 술을 마셨다.
밤이 이슥해졌다.
노인과 서생, 장한이 슬그머니 일어나 객잔을 빠져나갔다.
무한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혈랑이 물었다.
“대체 그들은 왜 감시하는 건가?”
“저들은 마천 지옥곡의 고수로, 강하보를 멸문시킨 놈들과 한 패요.”
혈랑이 미간을 찌푸렸다.
“놈들이 왜 아직 난주에 남아 있지?”
“난주표국을 칠 생각이오.”
“뭐라?”
술에 취해 게슴츠레 했던 혈랑의 눈이 매섭게 바뀌었다.
“난주표국을 노린다고?”
“동 국주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난주 정파의 고수들을 초빙한 것 같소.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저들을 막지 못할 거요.”
“으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혈랑이 다시 술병을 들다 이어지는 무한의 말에 멈췄다.
“저들은 강하보 모두를 죽였소. 심지어 기르던 개까지 쳐 죽였다고 하오.”
혈랑의 눈에서 흉흉한 빛이 폭사되었다.
이어 손바닥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낸 것이다.
“소마, 이 작자가 미쳤구나!”
“소마가 아니오. 마천주가 직접 보낸 자들이오. 마천주는 난주를 피로 씻어 소마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속셈이오.”
혈랑의 눈빛이 더더욱 흉험해졌다.
“마천주가 보낸 자라고? 감숙을 먹겠다는 건가?”
그때 난주표국 쪽에서 비명성이 터졌다.
혈랑이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서 혈랑아를 뽑아 들었다. 그러곤 말없이 객잔을 나가 난주표국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 혈랑의 고함이 들려왔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여자 집안을 건드려?”
이어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터졌다.
그리고 얼마 후.
혈랑이 난주표국을 나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혈랑아를 객잔 말구유 통에 든 물에 담가 휘젓고는 칼집에 넣고 객잔으로 들어왔다.
격전을 벌였는지 어깻죽지의 옷이 찢어지고 핏줄기가 보였다.
혈랑이 무한의 자리에 와서 앉더니 술병을 들어 상처에 붓고는 천으로 묶었다.
“모양 빠지게… 제법이더라고. 다 죽었지만.”
그러고는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잠시 후 난주표국에서 한 사람이 나와 객잔으로 왔다.
동오은을 데려갔던 청년이다.
객잔 반점으로 들어온 청년이 혈랑을 향해 말했다.
“혈랑, 아버님이 보자고 하오.”
“난 만날 이유가 없다.”
혈랑이 거절했다.
무한이 웃으며 권했다.
“난주표국 동 국주는 은원이 분명한 자라고 들었소.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거요.”
“흥! 난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난주에서 마천 놈들이 날뛰는 꼴이 보기 싫어 손을 쓴 것뿐이라고.”
혈랑이 딱 잘라 거절하자 청년이 머뭇거리다 돌아갔다.
무한이 말했다.
“조만간 감숙에 피바람이 불 거요.”
“……?”
“난주도 혈풍을 피하지 못할 것이고,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냐?”
무한은 고벽후로부터 혈랑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혈랑은 고원에 버려진 고아였다. 그래서 고원이 자신을 낳고 길렀다고 생각한다.
괴팍한 대막혈사가 키워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천성적으로 잔인한 자는 아니었다.
마을을 약탈하는 마적떼를 보고 격분하여 때려잡다 아예 부하로 삼아 통제하는 게 낫다 싶어 스스로를 혈랑이라 부르며 마적이 됐다.
마을 약탈을 금하고 상단으로부터 통행세를 받으며, 다른 마적을 소탕하기에 고벽후도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마천도 천하방도 전쟁을 원하고 있소. 아마도 감숙에서 맞붙지 않을까 싶소.”
“흥! 천하방이든 마천이든 감숙에서 함부로 날뛰다간 다 내 손에 죽을 것이다.”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막을 수는 없소. 하지만 난주 무림을 규합한다면 다르오.”
혈랑이 무슨 소리냐는 시선으로 무한을 보았다.
“한 사람의 영웅이 있다면 그 휘하에 많은 이들이 모이게 되어 있소.”
“나보고 난주 무림맹이라도 만들라는 말이냐?”
혈랑이 어이없어 하는데 문 쪽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제멋대로 살아가는 마적에게 그런 제의를 하는 건 너뿐일 것이다.”
무한과 혈랑이 돌아보니 고벽후가 웃으며 다가왔다.
“고 대형, 그렇잖아도 어디로 찾아가야 하나 하고 있었습니다.”
무한이 반가이 맞았다.
“난주에 혈풍이 불었다고 해서 급히 달려왔는데 늦었군. 누군가 난주표국을 이미 구했더라고.”
고벽후가 자리에 앉아 술병을 들어 잔에 따라 벌컥, 마셨다.
“고마귀, 그거 내 술이야.”
“내 술이 내 술이고, 네 술이 내 술이지. 구차하게 그런 걸 따지나?”
고벽후가 한 잔 더 따라 마시고는 말했다.
“마천 본산의 무력대가 이미 감숙으로 넘어왔다. 고수들도 상당수 섞여 있다.”
고벽후는 감숙으로 온 뒤 마천 본산의 움직임을 꾸준히 감시해왔다.
“이번에 강하보를 멸문시킨 건 예고일 뿐, 본대가 당도하면 감숙이 통째로 마천에 넘어갈 것이다.”
혈랑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천하방에서도 본방 무력대와 섬서, 산서의 무력대를 감숙으로 보냈다.”
“정말 전쟁이라도 한다는 건가?”
혈랑이 뇌까렸다.
“지금 난주표국에 감숙 정파인이 모인 것도 사실 이를 논의하기 위함이지.”
그러면서 혈랑을 흘깃 보곤 말했다.
“솜씨가 늘었더군. 지옥곡 놈들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흥, 하찮은 놈들이었어.”
“그래서 어깨에 부상까지 입었나?”
“아, 이거? 이건 실수야. 그 늙은이가 그렇게 악독할 줄 미처 몰랐지.”
혈랑이 계면쩍어하며 자신의 어깻죽지를 피풍의로 가렸다.
“악독하기로 따지면 네 사부가 으뜸인데, 제자인 너는 그렇게 물러서 어디다 쓰겠냐?”
“고마귀! 말조심해라.”
혈랑은 버려진 자신을 키워준 대막혈사를 친혈육으로 여긴다. 고벽후가 사부를 욕하자 발끈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벽후가 무한에게 물었다.
“네게 지명수배령이 내려진 건 알고 있냐? 당 가주를 죽이다니, 대체 무슨 일이냐?”
무한이 당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혈랑이 격분했다.
“아니, 혈육을 죽였다는 말이냐? 중원 놈들은 정말 악독하구나.”
“으음. 손우자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너를 강호공적으로 몰아세웠으니 검천부가 설 자리가 없겠군.”
고벽후도 분개하며 말했다.
“우리는 이미 천하방을 탈퇴하였다.”
마흔 명의 멸마대가 동시에 천하방을 나와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후후, 그럼 네 아우와 함께 마적의 길에 들어서려는 건가? 고원에서 먹고 살려면 하는 수 없지.”
“나는 부자 아우가 있어서 걱정 없다.”
고벽후가 무한을 보며 눈을 찡긋하였다.
“흥, 역시 마귀야. 아우를 등쳐먹고 살다니.”
혈랑이 기가 막혀 했다.
그때, 난주표국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나와 객잔 쪽으로 몰려왔다.
키가 커다랗고 긴 수염이 위엄 있어 보이는 장년인이 앞장섰다.
“동 국주로군.”
고벽후가 난주표국 동사철 국주를 알아보았다.
“네가 난주표국 금지옥엽과 정분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장인이 오시는데 어서 가서 맞이하지 않고 뭐하냐?”
고벽후의 말에 혈랑이 코웃음 쳤다.
“흥! 나는 여자 따위는 필요 없다.”
방금 전까지 동오은 때문에 술을 퍼마셨음에도 자존심을 굽힐 수 없었던지 혈랑이 허세를 부렸다.
정파인들이 객잔에 이르자 동사철이 혼자 반점으로 들어왔다.
고벽후가 일어나 동사철에게 예를 취했다.
“동 국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고 대주가 여기 계셨구려.”
동사철이 반가워하였다.
“혈랑은 이미 아실 테고, 여기 있는 이 친구는 제 의제 심무한입니다.”
“심무한?”
동사철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