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어머니와 아들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팔 년 만의 해후.
자신을 속이고 떠난 어머니에 대해 약간의 원망도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한 이 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제가 왔습니다. 어머니.’
‘미안하구나.’
어머니와 아들은 묵묵히 시선으로 대화를 하였다.
지켜보던 소마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몇 년 만에 보는 걸로 아는데 부둥켜안고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거 아닌가? 모자간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군.”
진소향은 소마의 흰소리를 무시하고 몸을 돌려 내원으로 갔다.
무한은 이미 시선을 통해 많은 걸 확인했다.
난주에 온 것은 고벽후와 어머니를 만나고자 함이었다.
어머니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한 가지는 달성한 셈이다.
무한 역시 어머니 진소향의 입장을 알고 있다.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원을 향하여 묵묵히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고 돌아섰다.
무한의 시선이 소마를 향했다.
“소천주를 여기서 뵙다니 뜻밖입니다.”
하오문에서 월야루와 난주표국이 마천의 표적이라는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 왔는데 뜻밖에도 소마를 만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어머니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으니 내심 놀라는 중이다.
“환골탈태했군.”
소마가 감탄했다.
일 년 사이에 무한의 기도가 완전히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한의 시선이 쓰러진 사내들을 향했다.
머리가 터진 모습이 참혹하였다.
무한이 눈살을 찌푸리자 소마가 말했다.
“저놈들은 저리 죽어도 싸다.”
“저들도 마천도 아닙니까?”
수하가 아니냐는 물음이다.
“살귀들이다. 죄를 지은 놈들을 지옥곡에 처박아두고 이럴 때 써먹지.”
무한이 오는 길에 해치운 다섯을 떠올렸다. 확실히 피 냄새가 몸에 밴 자들이었다.
“월야루에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정마대전 당시 천하방과 흑천은 손을 잡고 마천과 싸웠다. 분명 적이었을 텐데 소마는 무척 친근하게 굴었다.
“예전에 무림에 사룡삼봉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봤나?”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섭섭하군. 한때 강호를 대표하는 후기지수였는데. 중원 정파란 놈들이 지워버린 모양이군.”
소마가 씨익, 웃었다.
“사룡은 천하방의 심군하와 마천의 소무극, 사사천의 피전격과 남궁세가 남궁무룡, 삼봉은 흑월 진소향과 마천 혁련가의 혁련향, 그리고 황산여음 향적연이었지.”
소마가 젊은 날을 회상하는 듯 아련한 시선으로 내원 쪽을 보자 안에서 진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무극,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가라.”
“흥! 내 입을 막을 수 있겠소?”
소무극이 코웃음치고 말했다.
“네 모친은 마천 혁련향과 무척 친한 사이였지. 그래서 나도 알게 된 거지.”
무한은 혁련향이라는 말에 약간 놀랐다.
천하상단의 금지옥엽, 천소향의 모친이 혁련향이다.
그제야 천소향의 이름이 어머니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혁련향은 지기인 진소향의 이름을 따서 딸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어머니는 혁련향의 소식을 알고계실까?’
무한의 시선이 내원으로 향했다.
“고원의 맹약이 성사된 것도 네 어머니가 심군하와 나를 연결해준 덕분이었지. 뭐, 그전에 하도 싸우다 보니 정이 들기도 했지만.”
소마가 화제를 돌렸다.
“흑천으로 전향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잘 생각했다.”
“와전된 소문일 뿐입니다.”
“그래? 들은 것과 다르군. 피전격이 순순히 자네를 놔주던가? 그놈, 자네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 텐데.”
무한은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
“검마는 돌아왔습니까?”
무한은 그동안 검마의 중원행이 마천의 내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어쩌면 소마와 손잡고 세상을 속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하는 중이다.
무한이 갑자기 검마를 거론하자 소마의 웃음이 짙어졌다.
무한이 천심공을 일으켰으나 소마의 의중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인연이 많군.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 있나?”
소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원 쪽에서 진소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무극! 죽고 싶으냐?”
소마가 피식, 웃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장성한 아들을 간섭할 생각이오? 그는 천하방 검천부주요.”
소마의 말은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둘 다 가라.”
축객령이 떨어졌다.
소마가 웃으며 무한을 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내쫓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하기는… 자네 모친은 원래 저렇게 매정한 사람이었으니 상심할 것 없어.”
그때 대문 밖에서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이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비켜라!”
누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한이 대문으로 나가 보니 수많은 이들이 월야루를 주시하고 있었다.
대낮에 난주 복판 기루에서 싸움이 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모여든 사람들 뒤쪽으로 말을 탄 군장과 관군이 오는 게 보였다.
“자리를 옮기자. 해줄 말이 있다.”
소마가 말하고는 몸을 날렸다.
무한이 뒤를 따랐다.
소마는 난주 지리에 익숙한 듯 강이 보이는 언덕 위 정자를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고원의 맹약을 논의했다.”
소마의 말에 무한이 정자를 둘러보았다.
소마 역시 멀리 강을 내려다보며 회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만큼은 웃지 않았다.
“과거 정마대전은 내 아버지, 그러니까 전대 천마께서 돌아가신 후 벌어진 마천의 내분 때문에 일어났다.”
전대 천마가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팔대마가의 가주들은 그의 유일한 핏줄인 소무극이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천마의 자리에 오르는 걸 반대했다.
“서로 천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다투다, 결국 마천이 깨질 위기에 처했지. 그래서 나온 게, 중원 정벌에 가장 큰 공을 세우는 자가 천마가 되기로 한 거야.”
소마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지. 여러 사람이 모이면 때로는 그렇게 어이없는 결정이 나오기도 하더라고.”
그리하여 마천도가 물밀듯이 중원으로 몰려들었고, 마천검가 혁련무가 가장 유력한 천마 후보로 떠올랐다.
“당시 마천의 내분 상황을 모르는 중원에서는 혁련무를 천마로 오인했지. 하지만 그는 진정한 천마가 아니었다.”
중원에는 천하제일인 심양조가 천마 혁련무와 일대일 생사결 벌여 승리하면서 정마대전의 승기를 잡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심무한은 이미 검마에게 들어 사실과 다름을 알고 있다.
“혁련무가 네 할아버지와 생사결을 벌이러 간 건 사실이다.”
두 절대고수의 대결이 어디서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죽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혁련무는 살아 돌아왔지.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분명히 죽을 정도는 아니었거든.”
그런데 마천 진영으로 돌아온 혁련무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상을 돌보지 않고 한밤중에 딸과 함께 어디론가 외출을 했다.
그러곤 소식이 끊겼다.
“검마는 혁련무의 친아우다.”
무한은 검마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형과 조카딸의 행적을 추적해왔는데, 최근 혁련무의 유골을 발견했지.”
검마는 수십 년간 사람을 보내 당시 마천 진영 주위 천 리를 훑었다.
그러다 일 년 전쯤 만장절벽 아래 바위틈에서 혁련무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검마가 나를 찾아왔다. 마천으로 운구해온 유골에 남은 상흔이 혁련가의 무공이라며 배신자가 있었다고 하더군.”
“그 배신자가 지금 천마 혁련후겠군요.”
무한은 어찌된 사정인지 알 것 같았다.
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마는 그리 생각하지. 그래서 마천검을 찾으러 간 것이다.”
검마는 형의 유해가 발견됐던 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조카딸의 유해를 못 찾자 그녀가 살아 있을 것이라 추정했다.
그리고 당시 천하상단이 그 길을 지났음을 알아내고 서현으로 향한 것이다.
소마가 말했다.
“향 누님이 천하상단에 의탁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마도 가문의 사람이 배신했으니 돌아올 수 없었던 게지.”
소마는 혁련향과 친했던 모양이다. 멀리 타지에서 죽은 혁련향을 안타까워했다.
무한은 소마의 한탄을 듣고 그가 이미 검마를 만났다는 걸 알았다.
“마천검이 왜 그리 중요한 겁니까?”
“마천검은 가주의 신물로 혁련가라면 마천검의 주인을 따라야 하거든.”
“일개 검일 뿐인데 그런 권위가 있습니까?”
“그 검에는 혁련가 사람들만 아는 비밀이 있다고들 하더군.”
무한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마의 의도가 궁금했다.
소마 역시 무한의 속을 알아챘는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마천을 되찾을 것이다.”
천마의 자리에 오른 혁련후는 여론을 의식하여 소무극을 소천주로 삼았다.
하지만 천마의 위를 물려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끊임없이 자객이 들었지. 독은 수도 없이 먹어봤다.”
소마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모두 실패하자 혁련후는 나를 중원 정복의 선봉에 세우고자 했다. 실력을 보여 달라는 명분을 내세웠지.”
무한이 소마를 주시했다.
웃음 뒤에 가려진 속내가 읽히지 않는다.
“나는 중원 정복 같은 건 관심 없다. 나의 적은 마천 내부에 있지.”
무한은 소마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걸 깨달았다.
소마가 무한을 주시하며 말했다.
“너의 적도 천하방 내부에 있지 않나? 손우자인가? 헛소문을 퍼뜨린 자가?”
소마는 천하방 내부사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소마가 지금껏 장황하게 이야기를 한 의도도 깨달았다.
서로 손을 잡자고 한 것이 어느 정도 진심이었던 것이다.
소마가 이제껏 보여준 적이 없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맹약을 준수해왔다. 감숙지부를 차지한 뒤로 경계선을 넘은 적이 없지. 하지만 이번 강하보의 멸문이 마천의 소행으로 밝혀지면… 천하방은 이를 빌미로 전쟁을 하려들 것이다.”
“승룡대와 현무대가 몰살당했을 때 이미 전쟁은 예정되어 있었지요.”
무한의 말에 소마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본보기다.”
“과했습니다.”
“흥! 착각하지 마라. 나는 천하방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남의 의도에 놀아나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다.”
소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천의 일은 내가 정리한다. 천하방이 전쟁을 하겠다면 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알아둬라. 그때는 천하가 피로 물들 것이다.”
무한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도왕과 장로전이 전쟁을 결정하면 그가 막을 방도가 없다.
소마는 무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라도 한 듯 말했다.
“한 사람이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지. 하지만 물길은 돌릴 수 있다.”
소마의 두 눈이 무한의 얼굴을 꿰뚫기라도 하듯 바라보았다.
“너라면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 믿는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소마가 사라졌다.
***
어둠이 내릴 무렵 무한은 난주표국으로 향했다.
난주표국이 천하방 소속 문파는 아니지만, 몰랐으면 모르되 습격당할 걸 알고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난주표국은 강을 끼고 있었다.
무한은 표국의 앞 대로상에 있는 객잔에 들었다.
“……!”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객잔 반점에 있었다.
‘혈랑?’
공교로운 일이었다.
난주에 오자마자 지난해 인연이 있었던 이들을 죄다 만나고 있지 않나.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혈랑 앞에는 아리따운 여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약간 고개를 숙인 여자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혈랑 역시 무거운 표정이었다.
혈랑의 시선이 문으로 들어서는 무한을 향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혈랑은 무한을 알아본 듯했으나 말없이 시선을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무한은 묵묵히 구석진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그때,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오은,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