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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43화 (143/250)

143화

“크아악!”

마지막 호위가 쓰러지며 지른 비명이 등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이럇!”

강하보 총관 악가박이 어금니를 악물고 말채찍을 휘둘렀다.

그의 등 뒤에는 마혈이 짚인 소가주 강문평이 매여 있다.

다가닥, 다가닥!

말은 미친 듯이 달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말을 달리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걱정할 계제가 아니다.

사신 같은 놈이 악귀처럼 따라붙고 있다.

‘고작 다섯 놈에게 강하보가 멸문 당하다니!’

적은 불과 다섯이었지만 흑도에서 잔뼈가 굵은 자신이 놀랄 정도로 강하고 잔혹한 손속이었다.

‘보주… 함께 죽지 못해 미안하오.’

보주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 가박, 이자들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고수다. 문평이를 부탁한다. 너를 믿는다!

보주는 어린 아들을 당부할 때 이미 피를 토하고 있었다.

악가박은 의형의 당부를 외면할 수 없어 그길로 문평을 찾아 강하보를 빠져 나왔다.

히히힝!

기어이 말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악가박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착지한 뒤 경신법을 펼치려 하였다.

“크크크. 도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한 사람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두 자루의 낫을 든 사내는 전신이 피범벅이다.

물론 자신의 피가 아니다. 낫으로 사람을 찢어발기며 튄 피들이다.

‘아아. 하늘이 강씨의 대를 끊는구나!’

악가박이 속으로 탄식하며 문평과 자신을 동여맨 밧줄을 풀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참이다.

악가박은 문평의 마혈을 풀어주기 전 전음을 하였다.

- 마혈이 풀려도 잠자코 있다가 내가 저놈과 싸우면 바로 도주해야 한다.

강문평의 눈은 분노로 가득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찾아갈 생각이다.

악가박이 그런 강문평에게 말했다.

- 보주는… 이미 당하셨다. 네가 살아야 강씨의 핏줄을 이어갈 수 있다.

강문평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 울지 마라. 흑도의 사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사내가 진정한 흑도라고 할 수 있다.

악가박이 말을 마치고 강문평의 마혈을 풀어주었다. 그러곤 돌아서서 칼을 뽑고 칼집을 버렸다.

“크크크. 순순히 칼을 받으면 고통 없이 죽여주마.”

사내가 낫을 휘둘러 보였다. 단숨에 목을 잘라주겠다는 뜻이다.

악가박은 대꾸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삭풍이 부는 고원에서 강문평이 살아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죽음이 코앞이다.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끄는 것뿐.

악가박이 삭풍이 몰아치는 고원의 밤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바람이 좋구나. 고원에서 태어나 고원에서 죽는데 무슨 미련이 있으랴!”

한바탕 고함을 지른 뒤 악가박이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문평아, 뛰어라!”

악가박의 도기가 낫을 든 사내의 가슴과 배를 베어갔다.

“흥! 기어이 고통스런 죽음을 택하는구나!”

사내가 왼손의 낫으로 악가박의 도를 막으며 오른손의 낫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악가박이 몸을 비틀며 옆으로 빠지는 순간, 왼손의 낫이 기이하게 휘어지더니 악가박의 옆구리를 훑으려 들었다.

사내의 낫질이 신묘하였으나 악가박 역시 나름 고수 소리를 듣는 자였다. 도를 꺾어 내려찍자 낫이 걸렸다.

까앙.

낫과 부딪히는 순간 반탄력을 이용해 빠져 나오며 악가박이 도를 크게 휘둘렀다.

낫보다 길이가 긴 이점을 살리려 했으나 사내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가 도가 지나가자마자 바로 파고들었다.

오른손의 낫이 목을 자르려 들자 악가박이 도를 세워 막는데 옆구리에서 스윽, 살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윽.’

신음성을 삼키며 악가박은 사력을 다해 목을 노리는 낫을 쳐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우열이 갈렸다.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군. 꽤나 아플 텐데 비명을 참다니.”

사내가 약간 놀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들은 누구냐?”

악가박은 마혈이 풀렸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문평을 의식하며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을 걸었다.

“크크, 아직 몰랐나? 마의 하늘에서 왔다.”

“역시 마천!”

악가박이 탄식을 하듯 내뱉었다.

그러면서 왜 강문평이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 하였다.

‘문평아, 제발 가라.’

그러다 사내가 자신의 뒤쪽 먼 곳을 바라보는 걸 알았다.

‘어디를 보는 거지?’

궁금했으나 돌아볼 수 없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순식간에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희미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각, 다각…….

늦은 밤에 누가 고원을 가로지르는 걸까.

맹렬하게 몰아치는 삭풍에 대비되어 너무나 한가한 말발굽 소리다.

‘혹시 흑월이 아닐까?’

강하보가 당한 소식은 월야루에도 들어갔을 터.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가한 말발굽 소리로 보아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말발굽 소리가 멈춰 섰다.

낫을 든 사내가 악가박의 뒤를 향해 말했다.

“어린놈이군. 재수도 없지. 하필이면 이리 오다니…….”

“무슨 일이지?”

생각보다 젊은 목소리에 기어이 악가박이 뒤를 돌아봤다.

‘저자는?’

말을 탄 청년의 용모가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는데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네 이름이 강문평이었지 아마?”

청년, 무한이 입을 떼자 악가박은 그제야 기억을 해냈다.

‘작년 봄 문평과 시비가 붙었던 천하방 무관생 중 하나로구나.’

그중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실력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과 대등하게 겨루었던 그 무관생이 분명했다.

모습은 그대로인데 풍기는 기도가 달라져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강문평은 애초에 도주할 생각이 없었다.

악가박이 낫을 든 사내를 공격할 때, 틈을 보아 기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단 몇 초 만에 악가박이 부상을 입자 오늘 밤 강하보를 습격한 이들이 괴물이라는 것과 어찌하여 강하보에서 둘째가는 고수 악가박이 자신을 데리고 도주했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강문평은 자신이 도주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악가박과 함께 이 자리에서 죽을 결심을 하였다.

그러다 삭풍에 실려 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말을 타고 온 청년이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의아해하였다.

“기억 안 나? 작년 봄에…….”

“아! 천하방?”

천하방이라는 말에 낫을 든 사내의 눈에서 흉흉한 빛이 폭사되었다.

“저놈이 천하방도라고? 잘됐군. 이런 수확이 다 있나.”

사내가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무한의 시선이 낫을 든 사내를 향했다. 피투성이 사내를 보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마천도가 왜 난주까지 내려왔지?”

천하방이 남하한 뒤 난주는 마천과 천하방 경계선 사이에 낀 형국이 됐다.

낫을 든 사내가 미간을 우그러뜨렸다. 어린놈이 죽을 지경인 것도 모르고 자신을 하대하고 있지 않은가.

“건방진 애송이. 네놈부터 죽여줄 테니 어서 이리 와라.”

무한이 가만 사내를 보다 허리춤에서 비도를 뽑아 던졌다.

비도는 천천히 날아왔다.

사내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비도를 빠르게 던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천천히 날릴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저런 속도로 날아오면서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경력이 받쳐주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사내는 그 정도의 고수도 죽여봤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낫을 들어 올리는 순간.

쌔애액!

비도가 순간적으로 폭사해왔다.

“큭!”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박힌 비도를 보았다. 그제야 상대가 자신을 뛰어넘는 고수라는 걸 깨달았다.

무한이 말했다.

“소마에게 진 빚이 있으니 목숨은 살려주겠다.”

사내가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서 있다가 무한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데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인영들이 있었다.

“혈겸, 쥐새끼들을 아직 처리하지 않고 뭐 하고 있나?”

“어린놈은 꼭 잡아야 한다. 제 아비와 함께 머리를 걸어놓아야 하거든.”

잔혹무도한 말이 먼저 들려왔다.

“어서 처리하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 피를 보니 술이 당긴단 말이다.”

잇달아 지껄이는 말 또한 가관이었다.

다가오는 이들을 보는 악가박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저들이 나타났다는 건 강하보에 있는 일백여 식솔이 모두 죽었다는 뜻이다.

‘저놈들 중 단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는 건가?’

순식간에 혈겸 옆에 내려선 이는 모두 네 명.

그들 역시 혈겸처럼 온몸이 피투성이다. 마치 피바다를 건너온 듯했다.

‘강하보의 피가…….’

강문평도 그들을 보고 강하보가 멸문했음을 깨달았다.

“이익!”

눈이 뒤집힌 강문평이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걸 악가박이 재빨리 붙잡았다.

“크윽!”

그 통에 찢어진 옆구리가 뒤틀리며 벌어지자 무지막지한 고통이 밀려왔다.

“아!”

악가박의 신음성에 강문평이 정신을 차렸다.

혈겸이 어깨에 박힌 비수를 뽑으며 말했다.

“저놈 고수다. 그리고 소마를 거론했어.”

나중에 나타난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무한을 향했다.

“저 어린놈에게 당했다고? 혈겸, 너 녹슬었구나?”

그중 얼굴에 점이 있는 점박이 사내가 혈겸을 비웃었다.

“놀라운 비도술이었다. 막을 수 없었다.”

혈겸이 변명하듯 말했으나 네 명은 믿기지 않았다.

점박이가 놀리기는 했으나 혈겸은 마천 제일의 무력이라는 지옥곡에서도 고수로 꼽힌다.

“바람이 차다. 빨리 해치우고 가자.”

점박이가 허리에 찬 도를 뽑는데, 극(戟)을 든 사내가 무한을 향해 말했다.

“소마와 무슨 사이냐?”

무한은 그들이 소마를 소천주라 부르지 않는 게 이상했다.

천목혈에 집중하자 삼 장 거리에 있는 그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소마를 거론하면서도 존중하는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적대감이 느껴진다.

‘이 자들은 천주파로군.’

손우자는 천하대전에서 마천 내부의 갈등에 대해 거론한 바 있다.

혈겸을 비롯한 이들은 천주가 보낸 자들이다.

‘그렇다면야.’

손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다.

“저놈, 천하방도다.”

혈겸이 말했다.

극을 든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천하방도라고? 그런데 소마를 아나?”

아직 어려 보이는데 소마를 안다니 의외였나 보다.

무한이 허리춤에서 비도를 다섯 자루 뽑았다.

심단에 입문한 뒤 생각한 바가 있어 검을 버렸다. 비도를 열 자루 마련해서 가지고 다니는 중이다.

강기로 무형검을 만들어 쓸 수도 있으나,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었다.

무한이 한꺼번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날렸다.

다섯 자루가 날아가는 속도는 제각각이었다.

쌔애액!

가장 빠른 건 혈겸을 노리는 비도였다.

혈겸이 움찔하며 피하려 했으나 비도가 목에 박혔다.

“컥!”

혈겸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어엇!”

다른 네 명은 놀라운 상황에 일제히 병장기를 치켜 올렸으나 비도는 아직도 날아오는 중이었다.

“조심해라. 정말 비도술의 달인이다.”

극을 든 사내가 옆으로 몸을 날려 비도의 궤적을 벗어나며 외쳤다.

그러나.

극을 든 사내에게 날아가던 비도가 방향을 바꿨다.

“이기어검!”

사내가 놀라 외치며 극을 세워 자신의 앞을 방어하려 했다.

순간 비도가 폭사되었다.

쌔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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