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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42화 (142/250)

142화

무한이 아무런 반응 없이 돌아서자 당황한 고노는 마지막 수를 꺼냈다.

“내게… 비밀공간으로 가는 지도가 있다!”

가짜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떻게든 살고자 제의를 했으나 무한은 말없이 창고를 나갔다.

철저한 무시에 고노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절망보다 더한 비참함이었다.

무한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니 독왕의 하인 주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주.”

“무슨 일입니까?”

“독진 앞에 수상한 여자가 서성거리고 있어 잡았는데 부주를 찾아왔다는군요.”

“나를요?”

“정체를 밝히지 않기에 일단 포박을 해두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가봅시다.”

주복이 무한을 외진 방으로 안내하였다.

검은 무복을 입은 여자는 연이설이었다. 밧줄에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무한을 보자 반색하였다.

“아시는 자입니까?”

“그렇긴 합니다.”

무한이 내심 웃었다.

어째 볼 때마다 부상을 입거나 포박을 당한 상태이니 공교롭고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그러다 사뭇 신색을 다잡았다.

연이설은 아마도 무흔의 전갈을 가지고 왔을 터.

‘죽을 각오를 하고 왔겠군.’

사천을 침범한 흑천도가 독왕의 거처를 찾다니.

배짱 하나는 두둑한 여자다.

“거봐요. 이거 빨리 풀어줘요.”

연이설이 주복을 향해 소리치며 자신을 묶은 밧줄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복이 밧줄을 풀어주고 나갔다.

연이설은 문밖의 기척을 살피곤 나지막하게 말했다.

“무흔이 대신 알려달라고 해서 왔어요.”

전갈은 무흔의 성격답게 길지 않았다.

검천부는 운무대진으로 싸여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고, 무흔 자신은 성밖마을에 은신한 채 잠적한 두 호법을 기다리고 있다는, 두 마디뿐이었다.

말을 마친 연이설이 슬쩍 물었다.

“그런데, 독왕이 여기 은거하고 있는 게 진짜예요?”

무한이 웃으며 말했다.

“독왕께서 곧 출도하실 게요. 피 천주가 계속해서 사천을 공략한다면 호되게 당할 수도 있소.”

“그자는 한번 당해봐야 해요.”

흑월 쪽 사람인 연이설은 오히려 피전격이 당하여, 세력이 축소되기를 바랐다.

“흑월과 사사천은 물과 기름 같은데 왜 함께 하고 있는 게요?”

“정확히 말하면 피전격이 월주님을 노리고 들어온 거죠. 언감생심도 유분수지. 감히 월주님을…….”

연이설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언제 왔는지 당전수가 문밖에 서 있다. 연이설이 고개를 꾸벅했다.

“소가주를 여기서 뵙네요.”

“누군가 했더니 천하방 사람이었군요.”

당전수는 집화각에서 일하던 연이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흑월 사람이야. 천하방에는 첩자로 들어온 거지.”

무한의 말에 연이설이 기겁하였다.

당전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흑천이 사천을 공략하고 있으니 적이나 다름없다. 엄밀히 말하면 사사천 피전격이 벌인 전쟁이지만, 외부에서는 흑천 내부의 사정을 모르니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다.

“흑천이 왜 형을 찾아?”

“흑천의 일로 온 게 아니에요. 저는 그저 소식만 전하러 온 것뿐이니 이만 가볼게요.”

연이설이 재빨리 무한에게 포권을 하고는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독진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을 텐데?”

“아, 아하하하…… 제가 좀 급해서. 어떻게, 좀 안 될까요?”

무한이 피식 웃고는, 주복을 불러 연이설을 독진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주복을 따라 멀어져가는 연이설의 뒷모습을 보던 당전수가 말했다.

“흑천과 자주 어울리면 계속 오해를 받을 거야.”

“내 걱정은 마라. 그보다 몸은 다 회복한 건가?”

“덕분에 살았어. 참, 할아버지가 보자고 하셔.”

당전수가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무한과 당전수는 독왕의 거처로 갔다.

독왕은 차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이건 내가 직접 만든 차라네. 홀로 산속에서 살다보니 맛을 평해줄 사람이 없었는데 자네가 시음을 하고 한번 평해보게.”

세 사람이 다탁에 둘러 앉아 차를 마셨다.

차는 아무런 향기가 없었으나 마시자마자 아랫배가 뜨끈해지고 가슴은 반대로 시원해졌다.

단순한 차가 아니었다. 심단 수련에 든 무한은 바로 차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살짝 놀라 물었다.

“이게 무슨 차입니까?”

“화심(和心)이라 이름을 지었네. 몇 봉 줄 테니 가져가게. 심단 수련에 도움이 될 걸세.”

그 말에 당전수가 한 모금 훌쩍 마셔봤으나 심신이 편안해지는 느낌뿐이다.

“나는 보통 차 같은데?”

“네놈은 아직 멀었다. 이번에 당가타로 가면 폐관수련을 해서라도 경지를 올려야 할 것이야.”

독왕이 손자에게 이르고는 무한에게 물었다.

“놈은 어찌했나?”

“아직 살아 있습니다.”

“자네 손으로 끝내지 그랬나.”

독왕은 무한이 제 할아버지의 원수를 살려둔 것이 의아했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만독곡의 비밀공간으로 가는 지도가 있다더군요.”

독왕이 만독곡에 있는 이유가 비밀공간 때문이다. 비밀공간을 찾아 없애면 독왕은 자유로워진다.

“그렇군. 놈은 만독곡 출신이니 어떻게든 비밀공간을 찾아내겠지. 내게 맡겨두게.”

독왕은 내심 감탄했다.

무한은 이미 복수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심양조가 살아 있었다면 정말 뿌듯해했겠군.’

독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손자에게 고를 쓴 놈을 편히 보내줄 수는 없지.”

손속이 독하기로 유명한 독왕의 분노를 샀으니 고노의 앞날은 정해진 바나 마찬가지다.

“반역세력이 당가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게 있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네. 이놈들… 아주 뼈까지 녹여버릴 것이야.”

독왕은 새삼 화가 치미는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하기는 독왕이 나타나면 당가에서 그 누구도 심기를 거스를 수 없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이 강한 당가에서 가문의 일을 처리하는 데 외인을 끌어들이지 않을 것이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보다 자네가 문제야. 흑천으로 전향한 데다 당가주를 살해한 누명까지 썼으니 온 무림이 자네를 쫓을 걸세.”

독왕은 오히려 무한을 걱정하는 듯 보였다.

“만독곡이 지낼 만하니 잠시 은신하고 있는 게 어떻겠는가? 노부가 당가를 되찾고 진실을 밝히면 그때 나오는 게 좋을 듯하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 덕분에 제 한 몸 건사할 수는 있습니다.”

독왕이 웃으며 말했다.

“내 자네를 걱정하는 게 아니네. 자네를 쫓는 이들이 걱정이지. 그들도 정파인데 일일이 상대하다 보면 진짜 공적이 될 수도 있네.”

확실히 독왕은 강호 경험이 풍부했다. 게다가 화경을 넘어서 현경으로 가는 경지다. 독왕이 충고했다.

“이제 막 심단에 들었는데 살생을 많이 하면 주화입마 당할 수도 있네.”

너무 이른 나이에 심단에 입문한 무한이다.

수십 년을 살아 온갖 풍파를 겪고, 마음이 돌처럼 단단해진 나이에 들어도 주화입마를 당하는 이가 허다한 게 심단의 경지이다.

무한처럼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심단의 경지에 든 이는 이제까지 없었다. 독왕이 우려하는 것도 당연하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일을 없을 겁니다.”

“알겠네. 그럼 당가의 일을 정리하는 대로 기별하겠네.”

“바로 떠나겠습니다.”

무한이 독왕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자 당전수가 따라 나왔다. 이렇게 헤어지는 게 아쉬운 모양이다.

“가주께서 당하신 현장에 들어왔을 때 뒤따라온 무인들 기억하지?”

“응. 아버지와 내 호위들이지.”

“그들이 현장 상황을 목격했어. 은신하고 있으라고 했으니 그들을 찾으면 일의 전모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거야.”

“고마워. 형.”

당전수가 진심으로 감사해하였다.

무한이 거처로 돌아오자 귀영과 남궁우, 남궁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우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주절거렸다.

“내가 대담한 계획을 짰어.”

남궁우는 창궁대가 오면 당전수를 지원하여 당가를 되찾고, 다시 당가의 백독대와 함께 천하방으로 진군하자고 했다.

“창궁대와 백독대면 천하방에서도 섣불리 대할 수 없지. 그때 모두 앞에서 사실을 밝히는 거야.”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천하방에 갈 필요 없어.”

“으, 응? 갈 필요 없다고?”

무한은 고개를 갸웃하는 남궁우에게 검천부 영패를 주며 말을 이었다.

“수고 좀 해야겠어. 천하방 성밖마을에 있는 천병각 알지?”

“당연히 알지.”

“가서 경천신검을 사러 왔다고 해. 그럼 천병각주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경천신검? 그건 천하제일인의 검이잖아? 네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냥 그렇게 말하면 돼. 그럼 검천부로 들어가는 비밀통로를 알려줄 거야.”

“오! 그런 수가 있었어?”

검천부를 설계한 자가 천기자다. 지략으로는 천하제일이라는 그가 비밀통로를 마련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다.

무한은 검천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빼낼 참이다. 운무대진으로 보호하고 있지만 식량이 떨어지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무한은 유아와 산도, 그리고 무흔에게 보내는 서찰을 적어 남궁우에게 건넸다.

“검천부 사람들이 임시로 묶을 만한 곳이 있을까?”

그러자 남궁호가 나섰다.

“일단 휘주로 가는 게 어떻겠나? 본가의 세력권이니 함부로 못할 것이네.”

“그게 좋겠어.”

남궁우가 맞장구쳤다.

무한이 생각하니 백가상단이 있는 서현이 유아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신세를 지겠습니다.”

무한이 남궁호에게 포권을 하였다.

“좋아. 창궁대와 합류하여 안전하게 호위할 것을 약속하겠네.”

무한은 담담히 웃기만 하였다.

검천부 사람들은 과거 신검무적대원들이다. 백전노장들이니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으나 창궁대가 함께 한다면 보탬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귀영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뭐하죠?”

“귀 호위가 할 일도 있습니다. 하 숙부를 찾아서 소식을 알려주고 서현에서 기다리라고 하세요.”

“그럼 부주는? 혼자 다니면 위험할 텐데요.”

귀영의 말에 무한이 웃기만 하였다.

만독곡 입구 혈전에서 마지막 자객이 손을 쓰는 순간 귀영이 제 몸으로 대신 막으려 한 게 생각이 났다.

“대신 칼을 맞아줄 사람이 없으니 허전하긴 한데… 어쩔 수 없군요.”

***

만독곡을 나온 무한은 감숙으로 향했다.

어머니 진소향부터 찾을 생각이다.

가는 길에 들리는 소문은 온통 당가주의 죽음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섬서에서 감숙으로 넘어가는 변방 마을의 객잔.

검천부주의 전향을 두고 여러 사람이 떠들고 있었다.

“헛소문이라고. 심무한이 누군가? 천하제일인의 손자라고. 그가 뭐가 아쉬워 흑천노조 밑으로 기어들어간다는 말인가?”

“이미 천하방에서 공적으로 발표했단 말일세. 지금 온 무림이 눈에 불을 켜고 그놈을 찾고 있다고!”

“도천부에서는 현상금까지 걸었다는군. 무려 십만 냥이라고 하네.”

“허억! 그놈만 잡으면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네?”

“예끼, 이 사람아. 당가주를 죽인 고수야. 자네 같은 사람은 숨 한 번 쉬기도 전에 죽는다고.”

그때, 한 사내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청년에게 향했다.

청년은 말없이 소면을 먹고 막 일어나던 참이다.

보기 드물게 준수한 청년을 보자 사내는 혹시,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심무한이 여기에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검 같은 병장기도 보이지 않는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다시 사람들과 어울렸다.

청년, 무한은 객잔을 나와 말에 올랐다.

사람들이 뭐라 하건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돌처럼 단단한 부동심을 향해 가는 무한이다.

감숙으로 넘어간 무한은 건량을 씹어가며 며칠을 달렸다.

난주를 백여 리 앞두고 말이 지쳤는지 터덜터덜 걸었다.

무한은 그제야 자신이 지나치게 서둘렀음을 깨달았다. 말에게 기운을 불어넣으며 속으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서둘렀어.’

이미 한밤중이다.

삭풍이 부는 고원을 지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러나 무한에게는 그저 시원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삭풍을 헤치고 어둠을 가르며 나아가는데, 멀리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졌다.

“크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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