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고노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무한은 서늘한 눈으로 고노를 바라볼 뿐이다.
‘저놈의 눈빛이…….’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에 고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무한은 이번 싸움에서 생사의 경계를 보았다.
천독단을 복용하고 운기를 하며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누군가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악착같이 살겠다고 아등바등하고…….
무수한 삶의 편린들을 되새기며 무한의 천심공이 한층 깊어졌다.
천심공은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다.
사람이 생각을 할 때 미미한 감정 변화가 일고, 그에 따라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기운의 변화를 감지하고 해석한다.
고노는 다리가 잘리고 척추가 끊겨 창고에 갇혀 있는 동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고노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삶을 갈구하는 욕망이 커져갔다.
다만, 이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아주 미묘한 감정 흐름이기에 고노 스스로도 몰랐다.
고노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무한에게는 오히려 살고 싶다는 외침으로 들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무한이 말했다.
“네게 들려줄 말이 있을 뿐이지.”
무한의 서늘한 말이 떨어지자 고노가 움찔하였다.
“너는 죽을 것이다.”
무한이 의자를 끌어다 고노 앞에 앉았다.
차분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방금 사람을 죽이겠다고 한 말과 대비되었다.
고노의 어두운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공포의 감정이 일렁거렸다. 자신의 죽음이 확정되었음을 인지하는 동시에 삶에 대한 욕구도 더욱 강렬해졌다.
무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죽여야 할 자를 알아서 보내준 자에게 오히려 감사하는 중이다.”
고노는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천일고를 쓴 흉수다.
고노는 천하제일인을 해치웠다고 자랑한 자신의 가벼운 주둥이를 원망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위안했다.
‘아니지. 그 사실을 몰랐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 거야. 독노처럼 바로 죽었겠지.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산 거야.’
그러다 자신을 지켜보는 무표정한 무한을 보곤, 다시 절망과 공포로에 휩싸여 내심 한탄했다.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나았을 것을…….’
불구가 된 채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독노처럼 부지불식간에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은 고노가 잠시 생각을 하게 놔두었다.
고노의 기운이 시시각각 변하는 게 느껴진다.
고노 역시 고수였기에 내심을 감추는 데 능숙했지만,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이 낳은 감정의 변화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 고노 스스로는 그런 감정의 변화가 이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무한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노의 감정 변화를 읽으며 말을 이었다.
“잔노가 실혼인 일백을 끌고 왔다 모두 죽었다.”
“…….”
“그 다음에 환노가 역시 실혼인 여섯을 끌고 왔지. 그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고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쳐다보았다. 정말 의아해 하는 눈빛이다.
“너를 보낸 자는 스스로를 무척 똑똑하다고 여기는 자다. 실제로 그런 평가를 받고 있지.”
고노의 머릿속에 자연히 손우자가 스쳐갔다.
‘이놈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정말 그에 대해 아는 걸까?’
고노는 자신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여겨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코웃음을 쳤다. 그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강호의 노괴물이다.
“흥! 유도심문을 하려는 건가? 헛수고하지 말고 죽일 거면 빨리 죽여라.”
“다시 말하지만 너는 여기서 죽는다. 서두를 건 없지.”
무한이 재차 죽음의 공포를 각인시켰다.
고노의 머릿속에 다시 죽음이라는 단어가 스쳐갔다.
“그자는 무척이나 신중해서 적을 칠 때는 세 배의 인력을 보낸다고 들었다.”
고노의 표정에 그렇다는 빛이 스쳐간다.
“그런데 잔노도 환노도 실패하고 죽었지.”
고노의 미간이 살짝 좁아진다.
‘그건 네놈이 예상외로 강했으니까 그렇지.’
독노를 죽이던 모습이 스쳐갔다.
“그가 나의 무공이나 내 주위 사람들에 대해 몰랐을까?”
고노의 두 눈이 잠시 멍해진다.
‘무슨 소리지?’
무한이 말하는 바가 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환노가 죽고 난 뒤 의아했지. 신중하다는 그자가 왜 딱, 동귀어진 할 만큼의 전력을 보낸 걸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환노는 혈사대가 개입하는 바람에 당한 게 아니냐?”
“그랬지. 만일 혈사대가 없었다면… 아마, 나와 환노는 동귀어진 했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고노가 무한이 말하는 바를 깨달았다.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스쳤다.
“지금 내가 토사구팽 당했다는 거냐?”
“환노가 그러더군. 오경연을 조심하라고.”
무한이 천목혈의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고노의 숨소리, 수염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느껴진다.
“오경연? 그게 누구란 말이냐?”
고노는 정말 모르는 듯했다.
무한의 머릿속이 바삐 돌아갔다.
‘환노는 손우자의 본명을 오경연이라고 했다. 근데 이놈은 그걸 모른다.’
고노가 손우자의 본명을 아예 모르는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알고 있는 건지.
지금까지 무한이 대화를 끌어온 이유가 이를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무한은 환노가 죽어가는 와중에 굳이 손우자의 본명을 알려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추노를 봤을 때 읽은 손우자에 대한 감정은 충성심이 아니었다.
상대의 권위에 눌려 따르거나 존경하는 게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는 듯했다. 마치 부모라도 된 듯, 추노는 애써 손우자의 존재를 감췄다.
그런 추노를 손우자는 미련 없이 버렸다.
추노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뱀처럼 차가운 피를 지닌 자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노가 남긴 몇 마디 말에서 손우자와 오노 사이에 복잡한 사연이 있음을 깨달았다.
환노는 손우자를 막으라고 했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에는 배신감, 미련 등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 자가 손우자의 본명을 모를 수는 없어. 그렇다면…….’
무한이 본론을 꺼냈다.
“만독곡이 무너질 때 당신들이 어린 그를 구해 키웠겠지. 당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천하방에 넣은 것은 정말 놀라운 생각이었어.”
“…….”
“그가 천하방을 좌지우지할 위치에 오르자 드디어 복수할 때가 왔다고 여겼겠지.”
고노는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하게 듣기만 하였다.
무한의 말이 사실에 가깝기에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실제로 고노의 머릿속에 지난날이 스쳐갔다.
‘추노 그놈이 다 망쳤어.’
고노는 엉뚱하게도 추노를 원망했다. 추노가 잡히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흐르고 말았다.
‘비밀공간을 코앞에 두고…….’
고노가 지난 이십 년을 추노 등과 함께 한 이유는 비밀공간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온갖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가는 고노의 귀에 무한의 말이 들려왔다.
“손우자가 오경연이라는 건 몰랐나 보군.”
“……!”
고노가 흠칫, 놀라 무한을 쳐다보았다.
“환노는 알고 있었지.”
“그게 무슨 소리냐?”
고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독곡이 무너진 뒤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은 모두 다섯.
각자도생을 하자고 흩어지려 할 때 환노가 곡주의 유언을 들려주었다.
곡주에게 후손이 있으며, 그를 찾으면 비밀공간으로 가는 지도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만독곡의 복수를 이룬 자에게 비밀공간의 모든 것과 곡주의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다섯 사람은 숙의 끝에 곡주의 유언을 따르기로 했다.
환노가 후손이 산다는 마을로 가서 소년 둘을 데려왔다.
그중 하나가 곡주 표일문의 아들 표무였고, 다른 하나가 며칠 전 곡 앞에서 죽은 인솔자, 구자형이다.
‘그 아이가… 표무가 아니라 오경연이었다는 말인가? 어찌된 일이지? 환노가 우리를 속였다는 말인가?’
고노의 눈에 당혹스런 빛이 스쳤다.
당시 환노는 표무가 살았던 마을이 마천과 천하방의 싸움에 휘말려 몰살당했는데, 간신히 살아남은 후손을 찾아 천만다행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환노가 정말 무한에게 그리 말했다면…… 손우자가 표무가 아닌 오경연이란 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내가 지닌 비밀공간 지도는… 가짜?’
표무가 아니고 오경연이라면 비밀공간 지도를 지니고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손우자는 분명 자신에게 비밀공간 지도를 건넸다.
고노는 비밀공간 지도를 얻자 아무도 모르게 왼팔 겨드랑이 부근에 새겨 놓았다. 고노는 지금이라도 팔을 들어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보고 무한은 고노가 감춘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손우자가 오경연이라는 사실보다 오랜 자신의 염원이 무위로 돌아간 것에 허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모른 척하고 말을 이었다.
“환노가 오경연을 막으라고 한 건… 오경연 그자가 당신들이 바라는 바와 달리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고노는 이제는 멍하니 듣기만 하였다. 그의 머리로는 대체 무슨 일인지 바로 따라잡기 어려웠다.
“오경연은 당신들이 모두 죽기를 바랐고, 결국 그렇게 됐지.”
“그가 우리를 죽이려 했다고?”
“자신의 신분을 아는 자들이니까.”
살인멸구라는 단어가 고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설마…….’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표무가 아니라면 만독곡의 복수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지금은 천하방 총군사라는 지고한 자리에 있으니…….
‘왜 그걸 생각 못 했을까?’
고노는 이제야 자신이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음을 깨달았다.
“오경연은 내 무위를 알고 있다. 독왕과 내가 함께 싸웠다면 제아무리 폭약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당신들은 모두 죽었어. 물론 그 와중에 독왕이나 나도 죽었을 가능성도 컸지. 그가 노린 결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한의 말이 쐐기를 박듯 고노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럴 리가 없다!”
고노가 강하게 부정했으나 이미 심정적으로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노가 눈을 치켜뜨고 무한에게 물었다.
“곧 죽을 내게 이런 말을 들려준 이유가 뭐냐? 이제 와서 속았음을 알았다 해서 내가 사실을 털어놓을 것 같으냐?”
무한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네게 들을 말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미 너는 많은 말을 했다.”
고노는 무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무한이 자신의 추론을 들려주고 자신의 표정이나 감정을 살펴 사실 여부를 판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무한이 천천히 일어났다.
고노가 긴장하였다. 죽음의 순간이 온 것이다. 순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비밀공간이라는 유혹에 넘어가 수십 년을 숨어 살았다. 그런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죽다니. 이대로 죽는 건 너무 분하다.
“잠깐, 네게 할 말이 있다. 살려만 준다면 뭐든 말하겠다.”
무한이 물끄러미 고노를 내려다보았다.
네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눈빛에 고노가 당황하여 마구 지껄였다.
“내가 천일고를 건네기는 했지만 독수는 손우자가 직접 썼다. 그리고 천기자, 천기자도 그에게 당한 거야. 내가 고를 줬어. 그놈이 천기자에게 우미충(愚迷蟲)을 심었다고.”
무한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내심 격동하였다.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그대로 돌아섰다.
고노의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중원에서는 고술(蠱術)을 보기 극히 드무니, 천하를 꿰뚫는다는 천기자도 당했을 수 있다.
‘할아버지에 이어 천기자까지? 자기 사부에게까지 독수를 쓰다니… 오경연, 대체 넌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