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40화 (140/250)

140화

점차 눈앞이 선명해지며 창밖으로 하늘이 보였다.

자신은 침상에 누워 있다.

‘여기가 어디지?’

기억을 더듬었다.

인솔자와 그 뒤에 숨어 있던 자객을 상대했던 기억이 마지막이다.

“아이고, 이제 정신 드시나 보네.”

옆에서 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목을 비롯하여 전신이 온통 붕대로 감겨 있다. 곳곳에서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독왕을 모셔 오겠습니다.”

귀영이 황급히 방을 나갔다.

무한이 억지로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푸른 호수가 보인다.

‘만독곡이구나.’

자신이 혼절한 뒤 이리로 데려온 모양이다.

잠시 후, 독왕이 왔다.

“그렇게 많은 상처를 입고도 죽지 않은 걸 보면, 적잖은 기연이 있었나 보군.”

보통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경천심결로 다져진 내력이 전신에 퍼져 있었기에 무한은 버틸 수 있었다.

“당가가 자네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네.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러더니 품에서 옥합을 꺼냈다.

“운기할 수 있을 때 이걸 복용하게.”

독왕이 만든 약인가보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받아야 내 마음이 편하네.”

독왕이 침상 머리맡에 옥합을 두었다.

“이 늙은이가 지난 십수 년 이 곡에서 할 일이 뭐가 있었겠나. 이곳은 기화이초와 영약이 풍부한 곳이지. 덕분에 몇 가지 독과 약을 만들었는데 자네에게 줄 수 있어 천만다행일세.”

무한이 생각하니 한시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기는 했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나흘 쉬었다가 복용하는 게 좋겠군. 지금은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독왕이 나간 뒤 심장 부위를 칭칭 동여맨 당전수가 찾아왔다.

“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 역시 독왕 덕분에 살았으니 주고받은 셈이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감사해 하는데 남궁우와 귀영, 남궁호가 들어왔다.

무한이 일어나려 하자 남궁호가 손을 들어 막았다.

“무리할 것 없네.”

“남궁세가에 큰 신세를 졌군요.”

남궁호와 무인들이 아니었으면 더욱 힘든 싸움이었으리라. 어쩌면 죽을 수도 있었다.

남궁호가 고개를 저었다.

“지난날 천하제일인에게 받은 걸 돌려준 것뿐이네. 마음에 둘 것 없어.”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가 마천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을 뻔 했을 때 심양조가 구한 바 있다.

전대 가주는 그때 부상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긴 했다. 하지만 세가에서 친지와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뒷정리까지 할 수 있었다.

남궁세가 전대 가주가 남긴 유언은, 검천부에 받은 만큼 되돌려 주라는 것이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네. 천하제일인께서 세상을 뜨고 자네 홀로 검천부에 남았을 때부터 지켜봤다고.”

무한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남궁가주가 자신을 왜 그리 반가이 맞아주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셋째 아들 남궁명을 천하방 천무관에 보낸 것도 무한을 지켜보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리고 나 남궁지낭을 보내신 거라고.”

남궁우가 으스대자 귀영이 핀잔을 주었다.

“골칫덩어리를 떠맡기신 게 아니고?”

“쓰읍!”

남궁호가 잇소리를 내며 노려보자 귀영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무한의 시선이 남궁우의 복부로 향했다. 붕대를 감아 배가 불룩 나왔다.

“옆구리가 뚫렸어. 다행히 거죽만 상했지.”

남궁우가 별 게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무한은 스스로를 반성했다. 하마터면 이번에 남궁우나 귀영이 죽을 뻔 하지 않았나.

남궁호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천하제일인께서 돌아가셨을 때 자연사가 아니라고 보셨네.”

천하제일인의 죽음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팔순 가까운 나이지만 절대고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이른 죽음이었으니까.

그때 어디선가 흘러나온 우화등선설이 퍼지며 의혹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남궁 가주는 급작스레 퍼진 소문의 배후에 누군가 있다고 봤다.

“오랫동안 주시하다 내린 결론이, 기천부와 천하방 군사부를 의심하셨네. 그래서 남궁우를 보내 자네에게 경고를 하라 하셨지.”

남궁호가 남궁우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깃 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좀 제멋대로라…… 특임감찰 호위 노릇을 할 줄은 몰랐지.”

무한이 일어나 남궁호와 남궁우에게 포권을 하였다.

“그랬군요. 남궁세가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남궁세가의 일은 제 일이나 마찬가지로 여기겠습니다.”

그러자 당전수도 예를 취했다.

“당가 역시 남궁세가의 도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직 정식 가주는 아니지만 곧 차기 가주가 될 당전수의 말이기에 무게가 실렸다.

“그럼, 그럼. 우리는 함께 사선을 넘은 전우잖아.”

남궁우가 한쪽 눈을 찡긋, 해보였다. 그러고는 정말 책사처럼 말했다.

“지금 형세는 우리에게 너무 불리해. 심 부주는 흑천으로 전향한 후 당가주를 죽인 무림공적이 됐어. 전략을 세워야 할 때야.”

무한은 검천부에 남은 식솔들이 걱정됐다.

오도(五道)가 있고 무흔을 보내 조치를 취하라 했지만 안심할 수 없다.

남궁호가 말했다.

“우선 본가로 가는 게 어떻겠나?”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남궁세가까지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본가에 창궁대를 요청했네. 다시 말하지만, 검천부의 적은 본가의 적이기도 해. 이게 가주의 뜻일세.”

남궁호는 벌써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남궁우가 말했다.

“암중의 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대놓고 만독곡을 노렸다면 이제 세상에 나오겠다는 뜻이야.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할 거야.”

귀영이 손을 저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 막 깨어났는데… 험악한 이야기는 나중에, 회복된 다음에 하자고.”

***

유아는 들려오는 풍문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부주가 흑천에 전향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기엔 천하방 모두의 시선이 너무 싸늘하다.

흑천과의 싸움에 친지나 동문을 잃은 이들은 문 앞에 침을 뱉고 가곤 했다. 심지어 야밤에 돌이 날아오기도 했다.

‘어찌해야 하나.’

밤늦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무흔 대협?”

무한을 따라 무흔을 대협이라 부르는 유아다.

“쉿!”

무흔이 검지를 세워 입에 대었다.

들어오기 전 주위를 살펴 이목이 없음을 확인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 필담으로 답하게. 두 호법은 현재 어디 있지?

유아가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글을 썼다.

- 몰라요. 부주께서 흑천으로 전향했다는 소문이 나던 무렵부터 소식이 끊겼어요.

- 오도(五道)께서는 여전히 두문불출하고 계신가?

- 네.

- 부주께서 그분들이 계시는 한 염려할 거 없다고 하셨네. 경거망동하지 말고 평소처럼 지내면 될 걸세.

- 부주는 언제 돌아오시나요?

- 곧 오실 것이네.

- 설마 정말 흑천에…….

- 소문은 거짓이네. 검천부 다른 식솔들에게도 전하게. 부주께서 진실을 밝힐 걸세.

그 말을 끝으로 무흔이 사라졌다.

무흔은 성밖마을 백가상단에 의탁하며 담철조와 공곤의 행방을 탐문하고, 하기주와 신검무적대가 돌아오는 행로를 감시하였다.

무흔이 다녀간 뒤 유아는 맛있는 음식과 술, 고기 등을 챙겨 산도를 비롯한 도인들의 숙소를 자주 찾았다.

검천부의 안위가 이 다섯 늙은이에게 달렸음을 알았으니 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풍운벽력수와 요산자, 화정노는 기뻐했으나 목령산인은 까다로웠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채소류로 다시 요리해 와라. 맵지도 짜지도 않게 담백해야 한다.”

유아는 까탈스런 목령산인의 주문도 쾌히 받아주었다.

산도는 별말 없이 유아가 오면 희미한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기어이 사고가 터졌다.

누군가 담벼락 너머 똥물을 투척하는 바람에 목령산인의 약초밭에 똥냄새가 진동했다.

화정노가 거름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자 목령산인이 화를 벌컥, 냈다.

“내 약초는 똥물 따위는 쓰지 않는다. 고결하고 깨끗한 물만 먹어야 한다.”

“깨끗한 물은 알겠는데 고결한 물은 또 뭔가?”

화정노가 물었으나 목령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곤 그날 검천부 주위를 돌아다니며 나뭇가지를 꽂고 바위를 옮겼다.

그러자 검천부 전체가 희뿌연 운무에 휩싸였다.

그 뒤로 바깥에서 욕하는 고함소리가 끊겼다. 돌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유아가 안심하였다.

***

사흘이 지나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자 무한은 독왕이 준 옥합을 열었다.

시꺼먼 환약이 담겨 있었다.

- 천독단(千毒丹)이라네. 자네는 이미 환골탈태를 한 번 거쳤더군. 그러면 같은 방식으로는 효험을 볼 수 없지. 이 단약은 일천 가지 독초를 섞은 것일세.

세상에 독초가 일천 가지나 된다는 것도 놀랍고, 그걸 모아 단약을 만든 독왕의 끈기도 놀라웠다.

- 천독이 조화를 이루며 천하에 없는 음(陰)을 이뤘네. 자네의 내공은 양강을 위주로 하더군. 천독단을 먹으면 음양의 조화를 이뤄 다시 한 번 환골탈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일세.

무한의 나이에 두 차례나 환골탈태한다는 건 전대미문의 일이다.

천독단을 복용하면 얻는 부수적인 효과가 독에 대한 내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독왕은 단 세 알밖에 만들지 못한 천독단을 쾌히 무한에게 주었다.

무한이 천독단을 복용하였다.

차가운 기운이 뱃속에서 치밀어 전신을 헤집고 다니자, 전신에 배어 있는 내력이 저절로 일어나 이를 막으려 하였다.

두 기운은 서로 팽팽하게 대치하다 서서히 융화되어 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한의 전신모공으로 독기가 흘러나오며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갔다.

타들어간 피부는 바로 딱지를 이루더니, 우수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사흘 후.

무한이 거처에서 나왔다.

무한을 보자 귀영이 놀라 입을 벌렸다.

“아! 아니… 대체 머리카락은 어쩌고? 소림사에 들어가실 생각이세요?”

무한은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민머리가 됐다.

독왕은 천독단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자 무척 기뻐했다.

“자네가 천독단의 공능을 입증해줬어.”

무한에 앞서 당전수에게도 복용시켰는데, 지닌바 내력이 부족해서 반 정도가 잠력으로 남았다. 그랬기에 과연 천독단으로 환골탈태까지 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무한이 천독단의 효능을 모조리 흡수하여 환골탈태를 이루니 천독단의 가치는 한층 높아졌다.

“감사합니다.”

무한은 눈빛은 한층 깊어졌다.

천독단을 복용하며 심단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곧 화경의 경지에 입문했음을 의미한다.

화경을 완성하면 기운이 천지와 소통한다. 이를 조절하는 게 바로 심단이다.

진경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무한이 화경에 입문한 것은 천독단의 약효 덕분이지만 천심공이 기여한 바도 컸다.

독왕을 제외한 사람들은 무한이 기연을 얻었지만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뤘는지 알 수 없었다.

무한은 거처를 나온 뒤 바로 고노를 찾아갔다.

고노는 창고에 갇힌 채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한이 들어서자 고노가 원독에 찬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고문을 한다 해도 내 입에서 원하는 말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나무로 된 간이침상에 누워 있는 고노를 내려다보는 무한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네게 들을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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