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자객들의 움직임은 정말 빨라 육안으로 쫓기도 어려웠는데, 저 희뿌연 신형은 그보다 더 빨랐다.
마지막 남은 자객도 같은 살수라는 걸 눈치챘는지, 쇠뇌를 버리고 기다란 도를 뽑았다.
두 인영이 서로 스쳐가고, 자객의 목과 가슴, 복부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짧은 사이 희뿌연 신형, 운객은 자객을 세 번이나 찔러 숨을 끊고는 사라져버렸다.
“뭐야, 저 인간은?”
귀영이 어리둥절해하였다.
남궁우가 사라지는 운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자… 살수야. 근데 왜 우리를 도와준 거지?”
남궁호가 다가오며 참담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봤다.
살아남은 남궁세가 무인 두 명이 동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다녔다.
남궁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부주를 어서 안으로 데려가자.”
귀영이 무한을 업고 만독곡으로 향했다.
“독왕 어르신, 독진 좀 열어주십시오!”
귀영이 외치자 잠시 후 운무가 스르르 물러나며 길이 열렸다.
남궁우가 옷을 찢어 옆구리를 감싸고는 뒤를 따랐다.
“셋이 당하고 둘이 중상입니다.”
수하의 보고를 들은 남궁호가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시신을 수습하게. 일단 우리도 곡으로 들어가자.”
남궁호가 혼절한 고노의 뒷덜미를 잡아끌고 만독곡으로 향했다.
***
“후우…….”
독왕은 불과 한 시진 사이에 십년은 늙어 보였다.
심장에 박힌 고를 산 채로 빼내는 건 엄청난 공력을 필요로 했다.
독왕은 간신히 빼낸 고를 작은 종지에 담았다.
“이 작은 벌레가…….”
아들 당현모의 죽음이 아직 믿기지 않는 독왕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손자 당전수도 죽을 뻔했다.
“바깥 동정은 어떠한가?”
하인 주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 공자가 적을 해치웠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중상을 입은 듯합니다.”
독진을 지키고 있던 주복은 무한 일행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재빨리 와서 보고를 하였다.
“대체 적이 얼마나 왔기에 심 공자가 당했다는 건가?”
독왕은 무한의 무공 수위를 짐작하고 있다.
진경의 고수가 그리 흔치 않은데…….
‘만독곡이 작정을 하고 왔군.’
독왕이 목옥을 나섰다.
무한을 업고 오는 귀영과 뒤따라오는 남궁우가 보였다.
그 뒤로 남궁호가 누군가를 질질 끌고 있다.
“저 아이들은…….”
남궁호 등이 변복을 하고 있었기에 독왕은 남궁세가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무한의 상태가 엉망인 걸 보고 크게 놀랐다.
온몸에 날붙이가 박혀 유혈이 낭자하다.
“어서 이리 누이게.”
독왕은 신분을 물을 새도 없이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귀영이 무한을 누이고 울먹거렸다.
“아이고, 부주… 정신 차려요.”
독왕이 황급히 맥진을 하고는 서둘러 단약을 먹였다.
이어 몸에 박혀 있는 쇠붙이들을 빼고 상처부위를 꿰맨 다음 금창약을 발랐다.
“보통 사람이면 벌써 죽었을 중상이네. 그러나 심 부주는 내공이 워낙 탄탄한 데다 환골탈태한 몸이니 죽지는 않을 것이네.”
독왕의 말에 모두가 안심하였다.
남궁우가 풀썩, 주저앉았다.
“자네들은……?”
남궁호가 포권을 하였다.
“남궁세가 둘째 남궁호가 독왕을 뵙습니다.”
“남궁세가 사람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
남궁우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면서 말했다.
“제가 심 특임감찰의 호위거든요.”
“너는 누군데?”
“남궁지낭 남궁우입니다. 그런데… 금창약 좀 주시지요.”
남궁우가 옆구리를 옷으로 싸매긴 했으나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죽을 것 같이 아팠다.
독왕이 남궁우를 비롯해 어깨에 쇠뇌를 맞은 남궁호, 남궁세가 무인들까지 손을 봐줬다.
“오. 과연…….”
독왕의 금창약은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빠르게 피가 멎고 통증이 가시자 남궁우가 감탄했다.
“저자는 누군가?”
“이놈이 쳐들어온 놈들 수괴입니다.”
남궁호가 바깥에서 있었던 일을 일러주었다.
독왕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으음. 이놈이 천하제일인에게 고를 심었다고?”
그러면서 고노의 상세를 살폈다.
두 다리가 잘리고 척추가 끊어졌으니 산다 해도 평생 불구로 지내야 할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목을 치고 싶었으나, 무한이 살려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여 대충 상세를 돌봐주었다. 그러고는 주복에게 일렀다.
“금창약이 아깝군. 창고에 처박아 둬라.”
***
만독곡 입구의 싸움은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외진 곳이었고, 살아나간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손우자는 바로 보고를 받았다.
“으음…….”
뼈아픈 결과에 손우자는 침음성을 흘렸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본 이목이 날린 전서구에는 결과만 적혀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독노와 고노 그리고 오랜 지기이자 심복 구자형.
진경의 고수가 무려 셋이다. 게다가 일백 실혼인들과 구자형의 수하들까지. 거기에 더해 막대한 폭약까지 가지고 갔다.
중견문파는 휩쓸고도 남을 전력이자 화력이었는데…….
‘고작 무한 한 놈에게 당했다고?’
독왕이 나섰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제아무리 독왕이라도 쌍인고를 제거하려면 한두 시진은 걸릴 텐데…….
이목이 불철주야 달려오고 있으니 자세한 정황은 며칠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으음…….’
무한이 손톱 밑의 가시처럼 여겨진다.
언제고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벌써 몇 차례나 실패했다.
무한을 무림공적으로 몰아넣는 데는 성공했다.
당가주를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더불어 흑천에 전향했다는 첩보에 군사부에서 사실 확인에 나섰다.
흑수애를 다녀온 흔적이 노출되면서 소문은 사실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그때, 심복이 와서 보고했다.
“도천부주께서 오셨습니다.”
손우자가 일어서는데 그새 고강후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고강후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
“총군사! 지금 뭐 하는 겐가!”
버럭 고강후가 소리를 지르자 손우자가 심복에게 눈짓을 했다.
심복이 문을 닫고 나갔다.
손우자가 천천히 다탁으로 가서 앉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우선 진정하고 앉으시죠.”
고강후가 성큼성큼 다가와 의자를 빼고 앉으며 탁자를 탁, 쳤다.
“심무한 그놈이 흑천에 전향했다며? 그런데 총군사란 작자가 이렇게 한가하게 처박혀 있어도 되나?”
손우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물었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군사부는 천하방의 전략을 짜는 곳입니다. 배반자를 잡는 건 집법당에서 할 일이지요.”
“천하방이 언제부터 서로 일을 가리며 했나? 검천부주가 흑천과 결탁했다는 건 방 차원에서 나서야 할 일이라고!”
고우가 죽은 뒤 고강후는 흑천을 치지 못해 안달이 났다.
무슨 연유인지 도왕이 출병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하인이 실수했다고 때려 죽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손우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서늘한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만독곡에서 온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은데…….
‘이 멍청한 놈이… 죽을 구덩이를 파는구나.’
손우자는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누르며 말했다.
“군사부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천하방 군사부가 힘이 없다니!”
고강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너무 언성을 높였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총군사… 말해보게. 대체 뭐가 문제인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울질도 적당해야 하네.”
“…….”
손우자는 고강후가 아주 어리석은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고강후와 권왕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는데, 용케 파악한 모양이다.
“자네가 출병을 막고 있는 게 아닌가?”
고강후는 도왕의 출병 거부에는 손우자의 책략이 숨어 있다고 의심하는 중이다.
천하방 차원의 출병과 도천부 단독 출병은 큰 차이가 있다.
도천부가 막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흑천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기는 역부족이다.
아들 고우가 죽자 격분한 고강후는 단독으로라도 흑천을 치겠다고 나섰으나 형제들의 만류로 주춤하는 중이다.
도천부 독자적으로 흑천과 싸우다 무력대 손실을 보면 천하방 내에서의 입지가 약화되고, 이는 패천부의 위상이 올라감을 뜻한다.
천하방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고강후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나,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미적거리는 손우자가 마뜩지 않았다.
‘이놈… 내가 방주의 자리에 오르면 너부터 제거할 것이다.’
고강후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손우자를 노려보았다.
살의가 담긴 고강후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손우자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차를 우려 고강후에게 내주었다.
“제가 출병을 막고 있다니…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그건 방주의 뜻입니다.”
“아니라면, 방주께서 왜 출병을 미룬다는 말인가?”
“내부단속부터 확실히 하실 생각이신 게지요.”
“내부단속?”
“검천부가 아직 건재합니다. 담철조나 공곤은 방내에서 신망이 두텁지요. 신검무적대가 해체되었다지만 그 전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고강후가 잔뜩 인상을 썼다.
“그래 봐야 남은 떨거지들 아닌가. 방주께서 명만 내리시면 내가 쓸어버리겠네.”
“산도를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흥! 도 닦는 몇몇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과연 그럴까요? 그들은 이미 반선(半仙)의 경지에 있는 이들입니다. 무림 대파와 세가의 원로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이들이지요. 마천과의 접전을 앞에 두고 있는데 섣불리 손을 썼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방주께서도 함부로 할 수 없으니 기다리는 겁니다.”
“대체 뭘 기다린다는 말인가?”
“심무한이 흑천과 확실히 손을 잡았다는 물증이 나와야만 검천부를 칠 수 있습니다.”
“그놈이 흑수애를 들어갔다 무사히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게다가 당가주까지 죽였다고! 무림공적이란 말일세. 그런 놈을 가만 놔 둬? 참 답답하구만!”
고강후가 노기를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손우자가 말했다.
“당가에서 공식적으로 공소장을 가져올 겁니다. 집법당을 거쳐 장로회의에서 의결되면 그때는 산도가 개입할 명분이 사라집니다.”
“으음. 무림공적 한 놈 제거하는 절차가 이리 번거롭다니…….”
“천하제일인의 후손 아닙니까?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강호 동도들이 미심쩍게 생각할 겁니다.”
“끄응.”
고강후는 못마땅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장로회의에서 공식결의를 하면 방 차원의 출병이 이뤄진다는 말인가?”
“그렇지요.”
손우자가 말을 마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고강후는 한가로이 차를 마실 마음이 없었다.
“서두르게!”
한마디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흑천과의 전쟁이 시작되면 천하는 피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이다.
오랜 세월 품어왔던 대계가 드디어 목전에 이르렀다.
‘억울하게 죽은 초양현 오백여 목숨 값! 천하를 피로 씻어 받으리라.’
손우자가 지긋이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하였다.
차맛이 달다.
***
짙은 어둠이었다.
무한의 의식은 어둠 속을 유영하였다.
짙은 어둠은 죽음과도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한은 자신의 의식이 어둠과 동화되어 스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어떻게든 의식을 부여잡으려 했으나, 시간이 끊긴 무한한 공간에서는 속절없는 몸부림이었다.
무한은 의식이 멈췄다.
다만 어둠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 죽음의 문턱을 밟아야 화경에 이를 수 있다.
죽음… 지금이 죽음인가?
의식하는 순간 어둠 저 깊은 곳에서 빛이 터졌다.
강렬한 빛이 순식간에 의식을 덮었다.
무한의 의식이 끊겼다.
순간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