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잠시 멍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본 당현모는 자신을 부둥켜안고 있는 아들을 보았다.
그는 이내 아들을 물리고 정좌를 하고 앉았다.
“전수야… 정신을 차리거라. 이제 당가는 네가 이끌어야 한다.”
심장 요혈을 점하여 피가 흐르는 걸 막고 있으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
“할아버지께 가면 살 수 있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당전수의 말에 당현모가 고개를 저었다.
“내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다. 현고가 독자적으로 이런 짓을 벌였을 리 없다. 쌍인고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충이 아니야.”
당현모는 죽음을 앞두고도 냉철하게 판단하였다.
‘역시 오대세가 가주로구나!’
무한은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쿨럭!
당현모가 한 모금 피를 토하고는 말했다.
“본가는 고를 금기로 하고 있다. 외부에서 현고를 도와주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현고가 당가를 장악하면… 그걸로 오백년 당가는 끝장이 날 것이다.”
“제가 지켜내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당전수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때 무한이 말했다.
“쌍인고가 얻기 어렵다지만 암수를 얻었다면 알을 얻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당가를 노렸다면 소가주에게도 심지 않았을까요?”
그러자 당현모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크으… 심 부주, 전수의 심장을 살펴줄 수 있겠나?”
쌍인고는 몸에 들어오는 순간 숙주와 동화되기에 본인은 감지하기 어렵다.
천독수라 불리는 당가주 당현모조차 자신의 심장에 있는 쌍인고를 알아채지 못했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전수에게 정좌를 하라고 했다.
가부좌를 튼 당전수의 뒤에 앉은 무한이 손을 뻗어 심장 부위에 대었다.
역시… 미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악독한 놈!”
아들까지 쌍인고에 당한 걸 알자 당현모가 분노하였다. 그러더니 품에서 혁낭을 꺼내 펼쳤다.
혁낭에는 가늘고 굵고, 길고 짧은 온갖 침들이 꽂혀 있었다.
당현모가 그중 실같이 짧은 침 하나를 집더니 당전수의 심장 부위에 꽂았다.
“크읍…….”
그 와중에도 당현모는 연신 피를 토했다. 독기가 퍼지는 중이다.
“마비침으로 고를 찔러 놓았다. 열흘간 꼼짝하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내공을 쓰면 안 된다.”
심장에 바늘이 꽂힌 당전수의 안색이 파리하게 굳었다.
“만독곡으로 가거라. 독왕께서 쌍인고를 해결해주실 것이다.”
당현모가 아들에게 이르고 무한에게 말했다.
“전수를 지켜주겠나? 구천에서라도 보은하겠네.”
무한이 간절한 당현모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전수는 제 의제입니다. 그는 반드시 당가주에 오를 것입니다.”
당현모의 입꼬리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내 아들이 인복은 있나 보군.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가주로서 전해야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무한이 동굴을 나왔다.
산 아래를 지켜보던 무흔이 나직하게 말했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무한이 산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진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횃불과 달리 홀로 달려온다.
‘쌍인고의 주인이 아닐까?’
당전수를 마저 죽이기 위해 오는 것이리라.
무한은 치밀어 오르는 살의를 느꼈다.
고술(蠱術)은 극히 까다로워 중원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어쩌면 할아버지에게 천일고를 심은 놈일 수도 있어.’
무한이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산 아래에서 다가오는 기운을 지켜보았다.
무한의 흔적을 쫓아오는 기운이 방향을 알아차린 듯 곧장 산으로 올라왔다.
“소가주를 지키세요.”
무흔이 나서려는데 무한이 제지하고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
유혈이 낭자한 별원 거실에 구름이 일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한을 추적 중인 운객이었다.
시해 현장을 지키는 무사들이 바깥에 있었으나 그 누구도 운객의 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야. 당가주가 이리 허무하게 당하다니…….”
중경에서 무한을 놓친 운객은 뒤를 쫓는 대신 당가에 와서 은신하고 있었다.
당전수의 움직임을 살피면 무한이 어디에 묵을 건지 알 수 있었다.
별원에 은신처를 만들어 두고 숨었기에 무흔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 때문에 운객은 방 안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무한이 뚫고 나간 지붕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중원 정도가 나서서 너를 쫓을 거야. 강호 공적이 된 거지. 어떡할 셈이냐?”
무료했던 그의 생에 이렇게 자극적인 일은 없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운객이 탁자 위에 있는 군사부 밀서를 집어 읽었다.
“천하방 군사부가 적이라니… 일이 커지는군.”
운객은 여유로웠다. 자신만의 추종향을 묻혀 놓았기에 무한을 놓칠 가능성은 없었다.
운객이 방안을 한 번 더 살피고는 사라졌다.
***
당가타가 보이는 고갯마루를 넘다 말고 귀영이 멈춰 섰다.
귀영과 남궁우는 서둘러 왔기에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일단 객잔을 찾아 쉴 생각이었는데 멀리 보이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분위기가 흉흉한데?”
횃불을 든 이들이 사방을 수색하고 다니는 걸 본 귀영이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흉흉한 정도가 아닌걸? 저 정도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거라고.”
남궁우가 횃불의 움직임을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 위장을 한 다음 다시 오자.”
“뭐?”
귀영이 거부했다.
“여기는 당가타야. 흑천이 아니라고. 여기서 천하방 특임감찰만큼 확실한 신분이 어딨다고 위장하자는 거야?”
“부주가 흑천으로 전향했다는 소문이 있었잖아? 당가에서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지.”
귀영이 생각해보니 그랬다.
“으음. 그럴 수도 있겠네.”
“이 밤에 당가타로 들어가는 건 위험해. 우선 근처 민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가자.”
두 사람은 오는 길에 봤던 산촌으로 돌아갔다.
***
허공에서 무한이 뚝, 떨어지자 달려오던 자가 우뚝, 멈춰 섰다.
무척 놀란 표정을 지은 사내는 녹의를 입고 있었다.
마흔 가량의 사내였는데 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사내가 잠시 무한을 훑어보다 물었다.
“네가 심무한이냐?”
무한은 대답을 하지 않고 사내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한인이 아니군.’
한족 복장을 하고 한어를 쓰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묘족의 느낌이 났다. 흑수애에서 여러 소수민족을 보고 그 특징을 눈여겨 봐뒀다.
“어떻게 쫓아왔지?”
오는 길에 여러 차례 방향을 바꾸고 위장을 하였기에 당가의 추적자들이 엉뚱한 산속을 헤매는 중이다. 그런데 이 사내만은 곧장 추적해왔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쌍인고를 썼더군.”
“……!”
사내는 쌍인고가 들통 났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듯 약간 당황했다.
중원에 고술을 아는 이가 드물었는데 대번 쌍인고를 거론하다니.
“쌍인고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왔겠지? 그래야 내가 당가주를 죽인 거로 만들 수 있으니까.”
무한이 사내의 옆구리에 달린 혁낭을 보았다.
사내가 자기도 모르게 혁낭을 뒤로 돌렸다.
“당황하고 있군.”
연달아 무한이 정곡을 찌르자 사내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사내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어차피 너도 죽일 생각이었다. 당가주를 시해하고, 자책감에 못 이겨 자결한 거로 알려질 것이다.”
이미 현고 장로가 그리 정황을 꾸며 놓았다.
당가 비상장로회의에서 현고 장로는 당가주가 흑천으로 전향한 사실을 추궁하자 무한이 비수를 휘둘렀다고 증언한 것이다.
당가주와 무한이 있던 방에 남아 있던 군사부 밀서는 유력한 증거였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 계책에는 허점이 있어.”
사내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가주가 모든 걸 알고 있거든.”
사내는 묵묵히 산 쪽을 쳐다봤다. 고를 다루는 사람답게 그는 당전수에게 심은 쌍인고 암놈을 느낄 수 있다.
쌍인고를 쓰려면 당전수 일 장 거리까지 접근해야 한다.
얼핏 본 거리는 백여 장.
눈앞의 애송이가 생각했던 이상의 고수이기는 하지만 백여 장 정도라면…….
무한은 사내의 생각을 읽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혁낭 쪽에 있던 손을 휙, 저었다. 그새 혁낭에 손을 넣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얀 가루가 날아와 퍼졌다.
무한이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사내가 몸을 날렸다.
무한이 비수를 날렸다.
쉬이익!
손바닥만한 비수가 화살보다 빠르게 날았다.
“크윽!”
사내는 십여 장도 벗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 강기를 실은 비수가 오른쪽 무릎을 관통하며 아랫부분을 잘라버린 것이다.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무한 쪽을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애송이인데… 비수에 강기를 담아 날리다니.
그의 눈에 의문의 빛이 흘렀다.
무한은 사내가 쌍인고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심부름꾼이로군. 쌍인고의 주인이 누구지?”
사내는 자신이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내는 혁낭에 손을 넣어 투명한 약병을 꺼내들어 터뜨렸다.
‘쌍인고 수놈?’
무한이 황급히 몸을 날렸으나 이미 늦었다. 약병에 있던 작은 벌레가 으스러져 죽었다.
“크흐흐… 늦었다. 당전수는 한 달 후 죽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미련 없이 독단을 삼켰다. 추궁당하다 머릿속에 심은 고가 터져 죽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죽을 수 있었다.
무한은 그런 사내를 지켜봤다.
사내를 본 순간 자백을 받기 어렵다는 걸 바로 알았다.
강직하고 윗선에 충성을 다하는 자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온 이의 표정이 읽혔기 때문이다.
‘쌍인고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인물이라면… 하수인에게 고를 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렇더라도 사내가 쌍인고 수놈을 죽일 줄은 몰랐다.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일 장 거리 이내에서 죽여야 하니까. 이렇게 멀리서 죽이면 감응이 이뤄지지 않아 암놈이 죽지 않는다.
무한은 천천히 다가가 사내의 혁낭을 뒤졌다.
여러 가지 독과 독충들이 담긴 병이 나왔다. 그중 몇 가지는 무한도 알아볼 수 있는 독충들이었다. 그 외 독을 바른 비수와 전낭 정도가 소지품의 전부였다.
무한이 사내의 소지품을 챙겨 동굴로 올라왔다.
우왕좌왕하던 횃불들이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무한이 동굴로 들어갔다.
정좌한 채 숨을 거둔 당현모 앞에서 당전수가 무릎을 꿇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제 가야 해.”
당전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이 검을 들어 동굴 한쪽을 파려 하는데 당전수가 말했다.
“아니, 지금은 묻어드릴 수 없어.”
“……?”
“아버님은 자신의 육신이 쌍인고에 당한 증거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시신이 썩지 않는 약을 드셨어.”
“이대로 두면 동물들이 훼손할 텐데?”
당전수가 당현모 주위에 하얀 가루약을 뿌렸다. 동물이나 벌레를 막는 약인 듯했다.
“동굴 입구를 막아줄 수 있어?”
무한과 무흔이 커다란 바위로 동굴을 막고 수풀로 위장하였다.
무한이 무흔을 향해 말했다.
“소가주와 만독곡으로 향할 겁니다. 무흔 대협은 천하방으로 가서 검천부 식솔들을 챙기세요.”
자신이 흑천에 전향하고 당가주를 시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검천부 식솔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산도를 비롯한 기인들이 있으니 함부로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문파예방을 떠난 담철조와 공곤이 소식을 듣고 돌아오다 손우자의 마수에 걸릴까 걱정이 됐다.
훈련을 떠난 하기주와 신검무적대원들이 귀환할 날짜도 머지않았다.
“검천부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명의 손실은 막아야 합니다.”
무한이 자신이 돌아오기까지 은신할 것을 지시하였다.
무흔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사라졌다.
***
남궁우는 당가타에 들자마자 남궁세가 독문표식을 볼 수 있었다.
“어, 저게 왜 여기에?”
남궁우가 자기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뭔데 그래?”
흉흉한 분위기에 질린 귀영이 바싹 붙어서 속삭였다. 부부로 위장하고 있으니 누가 보면 다정한 부부라고 할 것이다.
“본가 표식이 있어.”
“남궁세가 표식? 겁도 없이 당가타에 간세를 심었어?”
“아니야. 저건 최근에 그려진 표식이야.”
남궁우가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다 외진 골목길에 있는 민가를 찾았다.
똑! 또또도도 똑!
남궁우가 경쾌한 음정에 맞춰 문을 두드리자 대문이 열렸다.
“뉘시오?”
건장하게 생긴 상인 차림의 사내가 뜨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소심해 보이는 남자와 못생긴 여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아니다.
그러나 남궁우는 바로 알아보았다.
“호 오라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