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무한은 월야루가 떠올랐다.
제법 큰 흑도방파 강하보를 좌지우지 하는 걸 보면 월야루의 힘은 제법 컸다.
피전격이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천 공략은 잠시 멈춰줄 수 있다.”
“무슨 뜻이오?”
무한은 뜻밖의 제의에 피전격을 쳐다보았다.
천목혈이 찌릿하였으나 화경의 고수가 작정하고 내심을 숨기니 알 수가 없었다.
‘역시 아직은 부족하구나.’
잠시 전 피전격의 감정을 읽었던 것은 그가 흥분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네가 정녕 검천부주로 남겠다면… 네 체면을 봐서 당가와 협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무한은 피전격이 뭔가를 감추고 있음을 알았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무엇이오?”
그냥 이런 제의를 할 피전격이 아니다.
“네 말을 지켜라. 너는 검천부주로 살아야 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오.”
말 몇 마디로 사천의 혈겁을 막을 수 있다면, 나중에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좋아. 그럼 납득에게 말해두지.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확보한 영역은 내줘야 할 것이다.”
“납득과 상의하겠소.”
피전격이 무한을 아래위로 훑어보다 뜬금없이 말했다.
“천하제일인을 죽일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느냐?”
갑자기 화제를 바꾸니 일시에 대답하지 못했다.
“권왕을 조심해라.”
그러더니 피전격이 훌쩍, 사라졌다.
‘권왕?’
무한의 머릿속에 권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문파예방을 할 때 권왕은 수련을 이유로 만남을 피했다.
피전격은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흉수가 권왕이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믿을 수 없다. 피전격은 종잡을 수 없는 데다 생각보다 심계가 싶은 자였다.
그럼에도 사사천주 정도 되는 이가 아무 근거가 없는 말을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왕이 아니라 권왕이라고? 권왕과 손우자가 접점이 있던가?’
줄곧 손우자의 뒷배를 생각해왔는데 권왕은 뜻밖이다.
성정이 강직한 권왕과 음침한 손우자가 한자리에 있는 게 연상이 되지 않는다.
무한은 갑자기 몰아친 찬바람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피전격이 사라지며 뒤를 쫓던 몽사 등의 기운도 흩어졌다.
무한이 흑수애 쪽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날렸다.
이름 없는 봉우리 정상에 찬바람만 맴돌았다.
***
성도에서 백여 리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을 무림에서 당가타라 불렀다.
앞은 강이 두르고, 뒤는 험한 산이 겹겹이 선 당가타는 오대세가 당가의 본거지였다.
당가타로 들어가는 패방.
녹의를 입은 무사들이 오가는 이들을 날카롭게 훑어보고 있었다.
흑천의 사천 공략을 저지하기 위해 곳곳에서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 당가는 본거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무한이 나타나자 녹의무사 하나가 세웠다.
“멈춰라. 신분과 목적을 밝혀라.”
무한의 차림은 흑수애에서 입은 그대로였다.
짙은 흑의장포는 주로 흑도의 마두들이 즐기는 복장이다. 게다가 오면서 구입한 검을 등에 매고 있다.
어려 보이긴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녹의무사가 길을 막고 신분을 물었다.
무한이 품에서 패를 꺼내 건넸다.
“헉! 소가주의 패잖아?”
녹의무사가 놀라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귀빈께서는 잠시 기다리시지요.”
녹의무사가 패방 옆에 작은 건물로 안내하였다. 귀빈이 잠시 쉬어가는 빈청이었다.
잠시 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당전수가 호위를 이끌고 달려왔다.
“대체 어디 있다 오는 거야? 실종됐다는 소문에 이어 흑천에 전향했다는 말까지… 정말 황당한 소문이 나도는 것 알아?”
당전수가 보자마자 그간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그는 얼마 전 장로 당현전과 당가 무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왔다.
“당 장로는 잘 모셨고?”
“응. 나도 사흘 전에 왔어.”
그러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형이 잡은 흉수가 천하방 집법당 뇌옥에서 자살했어.”
“뭐?”
무한은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큰 도시를 피해 왔기에 무림의 소문을 듣지 못했다.
“집법당 추각주가 직접 와서 소식을 전하고, 본가에 사과를 했어.”
“추각주라면… 선우 각주?”
“흥! 천하방에서는 기세등등하더니 코가 쭉, 빠졌더라고.”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빈청 앞에 마차가 당도했다.
“본가로 가서 마저 이야기 해.”
무한은 당전수를 따라 당가타로 향했다.
당가타는 수많은 장원과 집들이 몰려 있어 어지간한 현의 규모였다.
남궁세가 일족이 휘주 곳곳에 흩어져 산다면, 당가는 일족이 한 곳에 모여 살았다.
잠시 후.
당가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언덕에 마차가 멈춰 섰다.
커다란 장원에는 가장 뒤편에 삼층 높이의 건물이 있고 주위로 크고 작은 집들이 있다.
“당가타에 온 걸 환영해.”
당전수가 마차에서 내린 무한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당가타는 이 마을 전체를 이르기도 하지만, 원래는 이 언덕을 당가타라고 했지.”
당전수가 안으로 들며 설명하였다.
“오늘은 쉬고, 내일 가주를 만날 거야.”
당전수가 당가타 장원 한쪽에 있는 별원으로 안내하였다.
무한이 귀영과 남궁우의 소식을 물었다.
“혹시 내 호위들이 오지 않았나?”
“아니? 그런 소식은 못 들었는데?”
무한이 별원에 들자 시비와 하인들이 나와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다실에 마주 앉았다.
당가로 돌아온 당전수의 표정은 천하방에 있을 때보다 나았지만 어두운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
천하방 방문 성과가 그리 크지 않고, 장로와 수많은 무사가 죽었으니 소가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흉수의 배후를 말해줘.”
당전수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무한이 잠시 생각하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약속을 하나 하면 말해줄게.”
“약속?”
“내가 사실을 밝힐 때까지 모르는 척 할 수 있겠어?”
“왜 그래야 하지?”
“연루된 인물이 알려지면 중원 정도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거야. 그러면 지금 흑천과 싸우는 당가는 더 곤란해지지.”
사안의 심각성을 눈치챈 당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만 알고 있을게.”
“내가 의심하는 이는 손우자, 천하방 총군사야.”
당전수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손 군사가? 왜?”
“당현전 장로를 죽이고 흑천의 소행으로 할 생각이었던 거지.”
“그래서 손우자가 얻는 게 뭔데?”
“당가와 흑천이 사생결단을 내기 바라는 거야.”
당전수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두 세력이 전면전을 펼치면 아마도 서로 큰 타격을 입게 되겠지.”
“그러면…….”
“천하방이 원군을 자처하며 사천을 장악하게 될 거야. 어쩌면 당가를 대리하여 흑천과 계속 싸울 수도 있고.”
당전수가 어두운 표정으로 뇌까렸다.
“……그러면 사천 무림은 원기가 크게 손상될 거야. 손우자, 정말 악독하구나.”
“문제는 손우자가 진정한 배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손우자가 배후가 아니라고… 그러면 기천부? 천기자가 뒤에 있다는 거야?”
천기자는 치매에 걸려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이들도 상당수다.
당대의 천재가 치매라고?
천기자의 신출귀몰한 행적을 아는 이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긴다.
당전수는 손우자가 기천부 출신이니 당연히 천기자를 배후로 꼽았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어. 손우자와 기천부 관계가 서먹해진 지 오래야.”
무한은 만현각주 강유의 얼굴을 떠올렸다. 스스로를 낮추는 그의 행보는 분명 손우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럼 누구야?”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지. 그래서 네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고.”
“으음…….”
당전수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때,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천하방 검천부주가 왔다고? 무슨 염치로 당가를 찾았단 말이냐?”
사나운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는 서른 가량의 청년이었다.
당전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청년을 향해 말했다.
“주호 형님, 말씀을 가려 하시지요. 검천부주는 소가주인 제 손님입니다.”
당주호라 불린 청년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소가주는 사람이 참 좋구려. 현전 숙부가 천하방에서 죽은 걸 잊었소?”
“그 때문에 특임감찰을 맡은 검천부주가 직접 온 것입니다. 예를 갖추세요.”
“흥! 나는 그럴 생각 없네. 현전 숙부가 소가주에게 얼마나 잘했던가. 그걸 잊고 천하방에 조사를 맡겨? 당가의 일은 당가 사람이 나서야지!”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이자 무한이 나섰다.
“천하방 특임감찰 심무한이오. 할 말이 있어 온 모양인데 말씀하시오.”
당주호가 무한을 노려보다 말했다.
“핏값은 피로 받을 것이다. 그게 당가의 원칙이지. 그걸 알려주려고 왔다.”
“당가의 원칙은 알고 있소. 그런데 핏값을 받겠다고 무고한 이까지 해치는 것은 당가의 원칙에 없는 일이겠지요?”
“무고하다고?”
당주호가 당장이라도 손을 쓸 듯 살기를 흘렸다.
“천하방 내에서 당가 장로가 돌아가셨다. 너희가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 우리가 어찌 알겠냐?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천하방은 당가에 혈채가 있다!”
다소 억지스럽지만 무림인이라면 수긍할 수도 있는 주장이었다.
“천하방도는 일만 명에 이르오. 그 모든 이에게 혈채를 받으려면 쉽지 않을 것이오.”
“흥! 흉수를 잡았는데 자살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천하방에서 은폐하려는 수작 아니냐?”
당주호가 눈알을 부라리자 당전수가 끼어들었다.
“현전 장로께서 돌아가신 일을 밝히는 건 가주께서 내게 일임하였습니다. 주호 형님은 이만 돌아가주세요! 이건 소가주로서 내리는 명입니다.”
당주호는 시뻘게진 얼굴로 당전수와 무한을 번갈아 보다 휙, 돌아나갔다.
당전수가 무한에게 말했다.
“천하방에 대한 당가 사람들의 시선이 냉랭할 거야.”
무한이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당전수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조했는데… 방금 들은 사실은 너무 엄청나. 아버님께는 고하고 싶어.”
무한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든 무한은 갑자기 천목혈이 찌릿하였다.
눈을 뜨자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머리맡 천정에 맺힌 물방울이 보였다.
막 떨어지기 전의 물방울이 심상치 않았다.
무한이 휙, 고개를 돌리자 물방울이 떨어져 베개를 뚫고 들어갔다.
동시에 무한이 벌떡 일어나 침상 옆에 있는 탁자 위 찻잔 뚜껑을 손바닥으로 쳤다.
파앙!
찻잔 뚜껑이 창문을 뚫고 사라지는 순간.
퍼억!
“크윽!”
창밖에서 누군가 답답한 신음성을 터뜨렸다.
무한이 창문을 넘어 정원에 내려섰을 때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흑의에 복면을 한 자였는데 오른쪽 다리를 부여잡고 끙끙, 대고 있었다.
무한이 던진 찻잔 뚜껑에 허벅지를 맞은 것이다.
“누구냐?”
근처에서 경계를 하던 당가의 무사들이 달려왔다.
무한이 쓰러진 자에게 다가가 복면을 벗겼다.
서른 가량의 사내가 고통에 겨워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헉!”
드러난 얼굴을 본 당가의 무사들이 경악성을 삼켰다.
“아는 사람이오?”
무한은 당주호임을 알면서도 담담한 얼굴로 당가의 무사에게 물었다.
당가의 무사들은 말을 못 하고 서로의 눈치만 봤다. 당가 사람이 별원에 든 무한을 해치려 한 정황이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무한이 당주호를 잡아 별원 마당으로 끌고 왔다.
스르릉!
그러고는 당주호의 검을 빼서 목에 댔다.
“목숨을 노리고 왔다 실패하면 목숨을 내놔야겠지?”
무한의 말에 당주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당가의 무사들도 당황하였다.
무한이 검을 치켜드는 순간.
“잠시 멈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