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상대가 무기를 뽑지 않으니 무한도 소검을 띄우고 싶지 않았다.
왼손바닥을 펼쳐 장력을 밀어내 사내의 권력을 막았다.
콰앙!
부딪히는 순간 무한은 바로 힘을 거둬들이며 뒤로 물러섰다.
이번 대응은 상대의 권에 실린 공력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사내는 확실히 진경의 고수였다.
“크흐흐… 감당하기 어렵지? 바로 꼬리를 마는군.”
“피전격에게는 오사(五邪)라는 다섯 명의 무인이 있고, 그중에 권을 잘 쓰는 자가 있다더군.”
무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름은 모르겠고, 별호가… 으음…….”
무한이 기억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내가 답답한지 먼저 외쳤다.
“몽사(?邪)!”
“그렇군. 당신이 몽사였어.”
무한이 몽사의 등 뒤에 맨 커다란 두 자루의 도끼를 보며 말했다.
몽사의 도끼는 과시용이고 실제 무공은 권법이다. 도끼에 눈이 팔렸다가 주먹에 맞아 죽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흑천에 합류하기 전 사사천의 피전격은 사뇌 납득과 의형제 같은 오사와 함께 칠사(七邪)로 불렸다.
“이놈이? 지금 나더러 몽사라 했냐? 죽어라!”
몽사는 튕기듯 앞으로 돌진하며 양 주먹을 연달아 휘둘렀다.
붕, 부웅, 파앙!
위압적인 파열음과 함께 권강이 밀려들었다.
‘자신의 별호를 싫어한다더니… 정말 그렇군.’
몽사가 괴팍하고 어리석을지는 몰라도 권법만큼은 일절이었다.
무엇보다 보법이 놀라웠다. 덩치가 무색하게 빠르고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가볍다가도 힘이 실리면 땅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묵직한 보법이었다.
보법이 받쳐주니 사방에서 권영이 날아들었다.
강기를 담은 권들이니 허초라고 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스치기만 해도 뼈가 바스러질 위력이었다.
무한은 고벽후로부터 박투술을 익혔지만 권의 고수와 대적하기에는 벅찬 감이 있었다.
몽사가 득의에 찬 광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언제까지 피할 수 있는지 보자!”
몽사는 팔다리를 풍차처럼 돌려 치다 갑자기 내지르기도 하였는데, 놀랍게도 무한이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계속 줄어들었다.
이렇게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다가 피할 수 없는 일권을 날리는 게 몽사의 파산권이다.
무한도 권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수세에 더 몰리기 전에 헤어나야 했다.
쾅!
정면으로 날아드는 권을 장으로 쳐내자, 순간 강기가 폭사되었다.
무한이 황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반탄력을 이용해 몽사의 권역(拳域)을 벗어났다.
“어림없다!”
몽사가 귀신같이 따라붙어 권을 내질렀다.
무한이 다시 뒤로 몸을 날려 훌쩍 일 장 거리를 벌렸다.
몽사에게 신묘한 보법이 있다면 무한에게는 무명신법이 있었다.
몽사가 인상을 우그러뜨렸다.
“제법이긴 하군. 파산권세를 빠져나가다니.”
무한이 손을 내려 더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눈앞의 몽사보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기운들이 더 신경 쓰였다.
빠르게 다가오는 기운들은 모두 네 줄기.
그중 하나가 유독 빠른 걸 보니 피전격일 듯싶었다.
몽사와 싸우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무한이 빠르게 주위 지형을 살폈다.
오른쪽으로 높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몽사가 득의만면하여 외쳤다.
“투항하는 거냐? 잘 생각했다.”
무한은 대답하지 않고 휙, 몸을 날렸다.
한껏 웃던 몽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주? 지금 내 앞에서 도주하겠다는 거냐?”
몽사가 버럭, 호통을 치고 쫓았으나 신법은 보법보다 떨어지는지 무한을 따를 수가 없었다.
“비겁한 놈! 육시랄 놈! 쥐새끼 같은 놈!”
몽사가 욕을 하며 쫓았다.
무한이 무명신법을 극성으로 펼치며 강 건너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기운 쪽을 봤다.
하늘을 날다시피 오는 이는 역시 피전격이었다. 순식간에 강에 이른 피전격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피전격은 무려 삼십여 장을 훌쩍 날아 강물을 찍고, 그대로 몸을 솟구쳐 강을 건너왔다.
무한이 길게 휘파람을 불고는 절벽을 타고 봉우리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허!”
몽사는 깎아지른 절벽 앞에 멈춰서 위만 쳐다봤다.
몽사가 멈칫하는 사이 피전격이 날아와 절벽을 치고 올라갔다.
“너희는 봉우리를 포위하고 있어라!”
피전격이 몽사와 다가오는 삼사에게 명을 내렸다.
봉우리 정상은 십여 장 크기였다.
정상의 바위에 우뚝 서자 살을 에는 바람이 몰아쳤다.
남쪽이긴 했지만 한겨울 산봉우리는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무한이 기운을 퍼뜨렸다.
절벽을 무섭게 차고 오르는 피전격이 느껴졌다.
무한은 조용히 기운을 운기하며 피전격을 기다렸다.
잠시 후.
피전격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정상에 내려섰다.
각기 절벽 끝에 선 두 사람의 거리는 십여 장.
하지만 피전격과 같은 고수에게 거리는 무의미하다.
“내가 말했지. 너는 내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피전격의 두 눈에 광망이 번뜩였다.
무한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유? 흥! 순순히 따라온다면 말해주지.”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라면 아예 흑수애에서 나오지 않았을 거요.”
“흐흐… 기어이 피를 보고 싶다는 거로군.”
피전격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
마치 산보라도 나온 듯 가볍게 걸어오는데 등 뒤에서 묵빛 기운이 솟구친다.
‘묵혼공…….’
흑도제일의 기공이라는 사사천주의 묵혼공.
무한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였다.
삼 장 거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피전격의 신형이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무한 앞에 나타난 피전격이 권을 내질렀다.
화르륵!
묵빛 기운이 피전격의 팔을 따라 회오리치며 무한을 향해 쏘아왔다.
정직하게 내뻗은 일권이었다.
무한이 전신에 호신강기를 퍼뜨리고는 오른손을 들었다.
마치 검을 쥔 손 모양에 기운이 어렸다.
‘강기의 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운이 모여 검을 이뤘다.
피전격처럼 완연한 묵빛을 띠지는 못했지만 완벽한 검형을 이뤄냈다.
쾅!
권에 실린 묵혼공의 기운과 무한의 강기검이 격돌하였다.
무한이 자연스레 한 발 물러서며 묵혼공의 남은 기운을 두 다리로 흘려냈다.
쩌저적!
무한이 딛고 있는 바위가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졌다.
피전격의 눈에 살짝, 놀람의 빛이 스쳤다.
얼마 전까지 가진경이었는데, 진경에 오르자마자 기운으로 검형을 이뤄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은 피를 본다고 했지만 죽일 생각은 아니었기에 오성의 공력을 쏟았긴 했지만 정면에서 맞받아칠 줄은 몰랐다.
동시에 맹렬하게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며 피전격이 음침하게 웃었다.
“재밌군. 정녕 죽고 싶은 게야.”
피전격이 다시 묵혼공을 돌리려는데 무한이 불쑥, 물었다.
“내 어머니와 사감이 있으셨소?”
어머니 진소향에 대해 묻자 피전격의 눈매가 흠칫, 떨렸다.
‘역시… 뭔가 있어.’
피전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들었다.
“사감?”
“내게 집착하는 이유가 내 어머니 때문 아니오?”
“크하하하!”
피전격이 미친 듯이 웃었다.
무한은 묵묵히 피전격을 살폈다.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
‘화경의 고수가… 감정을 떨치지 못했어.’
흑천노조는 죽음의 강을 건너봐야 화경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인간이 지닌 칠정을 떨치라는 뜻을 포함한다. 온전한 자신을 깨달을 때 희노애락애오욕을 벗어나 진정한 심단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의미로 피전격은 완전한 심단을 이룬 게 아니다.
웃음을 멈춘 피전격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네게 집착한다고? 이 피전격이? 사사천주인 내가 너 같은 애송이를!”
피전격이 버럭, 고함을 질렀으나 무한은 담담히 받았다.
“나를 잡는다고 해서 어머니를 위협할 수는 없을 것이오.”
무한의 말에 피전격의 인상이 한층 험악해졌다.
“협박? 내가 네 어미를 협박하기 위해 너를 납치한다는 말이냐?”
“그러지 않고서야 왜 이러는 것이오!”
“흥! 정 알고 싶다면 일러주지. 네 어미는 내게 빚이 있다. 너는 어미를 대신해서 갚아야 할 것이다.”
피전격이 순식간에 평정심을 찾았다. 역시 심단을 수련하는 고수이기는 했다.
“지난날 사사천이 흑월과 합쳐 흑천을 세울 때 네 어미는 나와 혼인하기로 약조했다.”
“……?”
뜻밖의 말에 무한이 놀라 쳐다봤다.
피전격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런 무한을 노려보았다.
“몰랐나? 그랬겠지. 부끄러운 과거를 자식에게 일러주지 않았겠지… 네 어미는 나를 배신하고 사라졌다.”
무한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사천주와 흑월주로서 세력싸움을 하다 반감이 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혼한 사이였다니… 믿기 어려웠다.
“나는 혹시나 마천이나 천하방에게 피습당한 줄 알고 백방으로 찾았다. 그런데…….”
피전격은 흑천의 모든 세력을 동원해 천하를 뒤졌으나 진소향을 찾을 수 없었다.
피전격은 천하방의 암수에 걸린 것이라 여기고 불철주야 이를 갈며 세력을 키웠다.
그런 진소향이 십 년여 세월이 흘렀을 때 갑자기 난주에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졌다.
이후 신분을 위장하고 흑월의 난주지부를 세웠을 때까지만 해도 지부장이 진소향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다 마천이 감숙 북부지역까지 진출했을 때, 난주지부를 챙기다 지부장의 정체를 알아챘다.
피전격의 분노는 컸다.
“노조는 이미 딸의 배신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나는 진씨 일가에게 배신당한 거야.”
피전격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래도 참았다. 왜? 흑도는 힘이 우선이니까. 그런데… 네놈이 나타났다.”
무한은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흑천노조가 피전격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피전격은 진소향의 배신을 대가로 흑천주의 자리를 달라고 하는 중이다.
무한이 말했다.
“나는 흑천과 무관하오.”
자신이 흑천노조의 뒤를 이을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으나 피전격은 믿지 않았다.
“그 말을 믿으란 말이냐? 한 번 배신을 당했는데 또 당하란 말이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믿을 필요 없소.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시오?”
“뭐라?”
“당가로 갈 것이오. 흑천이 사천 공략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가와 함께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오.”
“허! 나와 맞서겠다고?”
피전격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으나 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내가 흑천주에 관심이 있을 것 같소?”
“네 어미가 흑천 사람이다. 어미와 맞서겠다는 것이냐?”
“나는 천하방 검천부주요.”
피전격의 말에 무한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놈이? 정말 천하방에 남겠다고?’
피전격은 천하방에서 검천부의 위상이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 무한의 결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놈이 왜 노조를 찾아온 거지?’
자신이 불렀다는 건 생각지도 않고, 무한과 흑천노조의 조우를 신경 썼다.
그는 흑천노조가 동흥전을 내주자 무한이 누구의 자식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밑에 두고 수하로 부림으로써 진소향과 심군하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흑천노조에 대한 시위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한이 천하방 검천부주로서 흑천과 대치하겠다니…….
이대로 두면 골육상잔이 벌어질 것이다.
그 또한 통쾌한 복수가 아닐까.
피전격이 생각을 정리하곤 말했다.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사천이 아니라 감숙이다.”
“……?”
“소마가 감숙 북부를 차지하자 흑월 난주지부가 세를 넓히고 있지. 아마도 천하방은 감숙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다.”
“흑월 난주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