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사사천 피전격은 자신을 무릎 꿇리려 하고, 흑선의 단조는 흑월주에 오르기를 은근히 강요하고 있다.
“…….”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무한이 돌연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흑월령을 받았다.
“이 패는 잠시 보관하겠소.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답해줄 수 없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단조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답했다.
흑월령을 챙겼으니 결국은 무한이 흑월의 주인이 될 것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내 신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천하방 검천부주께서 전향했다는 것만 알 뿐이지요.”
무한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단조가 거짓 소문과 요란한 행렬로 무한의 흑천 전향을 사실화하는 꼼수를 부리는 바람에 난감한 처지가 됐다.
“모두 물러가시오.”
무한의 말에 엎드렸던 흑월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사라졌다.
무한이 단조에게 물었다.
“흑수애를 나가는 육로가 있소?”
“여덟 갈래 잔도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빠르지만 가장 험한 길이 상류 쪽을 건너는 천애잔도(天涯棧道)이지요.”
단조의 시선이 흑수애 상류 쪽을 향했다.
“하지만 피 천주가 모든 잔도에 고수를 배치하여…….”
순간, 무한의 신형이 휙, 하고 사라졌다.
무한이 말도 없이 사라지자 단조가 잠시 당황해하더니 흑월정 안을 향해 소리쳤다.
“흑월의 주인을 호위하라.”
순간, 검은 인영들이 흑월정에서 솟구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
무한이 상류 쪽 절벽으로 질주하였다.
거리가 끊어지고 흑수애를 지키는 경계 병력의 초소들이 나왔다. 초소를 지키는 흑천 경계병들은 무한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한이 절벽으로 향한 오르막길로 향하는데 커다란 돌비석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우사?’
우사는 끊어진 팔에 나무를 깎은 의수를 착용하고 장갑을 끼고 있었다.
돌비석 앞에 돌로 된 제단에는 장검과 도, 단창, 비도 등 갖가지 병장기가 놓여 있었다.
무한은 우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냥 뚫고 지나칠 요량으로 무명신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우사가 허둥지둥 손을 휘저었다.
“잠시 멈춰, 멈추라고.”
그러나 무한은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당황한 우사가 탁자에 놓인 검 두 자루를 연달아 집어, 던졌다.
우사의 비검술은 환노와 싸울 때 본 바가 있다.
강기를 담은 두 자루의 검이 적 앞에서 부딪히면 무수한 파편이 날아들 것이다.
쉬익!
무한은 손바닥에 소검을 띄운 다음 날아오는 두 검이 충돌하기 직전 날렸다.
콰앙!
두 자루의 진검과 한 자루의 강기 검이 폭사하며 파편이 비산하였으나 무한 쪽으로 날아오는 건 없었다.
“정말, 내 체면을 봐주지 않을 겐가?”
우사가 고함을 지르며 오른손으로 제단 위를 쓸었다.
그러자 검과 도, 단창과 비도 등 갖가지 무기가 무한을 향해 날아갔다.
우사가 전력을 다했는지 무기들의 날아오는 영역은 넓었고, 실린 힘은 강맹하였다.
뚫고 나가려면 못할 것도 없었으나 우사가 의수를 드는 걸 보자 경각심이 일었다.
무한이 곧바로 멈췄다가 옆으로 삼 장이나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파파파팟!
우사의 의수에서 비침이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무한은 완연한 진경에 들어 강기를 자유자재로 발출할 수 있었으나, 운용 수법은 아직 부족했다.
소마처럼 검벽을 세우려면, 강기를 세심하게 운용하는 수법을 익혀야 한다.
강기를 쏟아내는 것만으로 우사의 비침을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니 일단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한이 미끄러지듯 순식간에 십여 장 뒤로 물러났다.
극에 달한 무명신법은 마치 귀신의 움직임을 보는 듯했다.
파파팟!
무한이 있던 자리에 비침이 무수하게 꽂혔다.
“으으으… 팔을 잃은 보람이 있군. 대단하신 검천부주를 멈춰 세웠으니 말이야.”
우사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무한을 향해 말했다.
“나를 막은 건 피 천주의 명이오?”
우사가 멀쩡한 오른손을 들어 손을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걱정이 되어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지. 그래서 왔네.”
“우리가 그리 걱정해줄 사이는 아닌 것 같소만.”
“나는 피 천주를 걱정하는 것이야. 물론 자네도 걱정이 되긴 하지.”
평소 모든 게 걱정거리라 별호마저 우사(憂邪)라 붙은 인물다웠다.
“젊은 나이에 너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목숨을 잃기 쉽다네.”
“나는 그렇다 치고 피 천주는 뭐가 걱정된다는 말이오? 기세등등한 사사천주 아니오?”
우사가 두려운 얼굴로 흑천전 쪽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노조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신다네. 하늘이 세상 만물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말이야. 피 천주는 항룡(亢龍)의 길을 가고 있지.”
“당신 같은 지혜로운 측근이 조언을 하면 되겠구려.”
“그랬지. 지금까지는 그랬다고. 납득이나 내가 말리면 듣는 시늉이라도 했단 말이지.”
우사는 말하면서 불안증이 도지는지 오락가락하며 횡설수설하였다.
“그런데 자네가 나타나며 피 천주가 폭주하고 있어.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자네는 아나?”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더 걱정이란 거야. 이유를 알아야 대처할 게 아닌가.”
“나도 그 이유를 모르오. 대답이 됐소? 이제 길을 비켜주시오.”
“아, 안 돼. 지금 잔도에는 사사천의 고수들이 쫘악 깔려 있다고. 지금 가면 싸워야 할 거야. 그러면 누군가는 죽겠지.”
무한이 오르막길 위쪽 절벽을 보았다.
절벽을 타고 뱀처럼 올라가는 잔도가 보였다.
“나는 내 지기들이 죽는 것도, 자네가 죽는 것도 걱정이야. 자네가 죽으면 노조께서 분노하실 거고, 그 분노는 피 천주에게 벼락처럼 떨어질 걸세.”
무한은 우사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사와 같이 소심한 자가 피전격의 뜻에 반해 무한을 설득하러 왔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노조는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하셨소.”
우사는 믿지 않았다.
“만에 하나……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다 죽는 거야. 그런 일은 없어야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걸세. 이대로 돌아가게.”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길을 멈출 수는 없소. 하지만 우사를 봐서 되도록 피를 보는 일은 없도록 하겠소.”
“아, 안 돼. 사사천의 고수들은 죽음으로 자네를 막을 거라고. 어쩌지……? 자네는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고… 낭패야, 낭패라고.”
우사는 얼굴 한가득 걱정을 품고 초조하게 오락가락하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서서 뒤에 선 커다란 돌비석을 올려다보았다.
“잔도를 이용할 때는 길 입구 비석에 예의를 표하는 걸 잊지 말라고. 그 길을 만들다 죽은 이들을 위한 진혼비(鎭魂碑)이니까…….”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무한의 시선이 돌비석을 향했다.
돌비석은 커다란 석대 위에 놓여 있었다.
우사가 갑자기 바닥에 뿌려진 검의 파편과 비침을 줍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모습이 반쯤 정신 나간 사람 같아 보였다.
“내 아버지도 잔도를 만드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 어린 나는 홀로 밤을 지새우곤 했어. 그래서 내가 이리 심약하게 된 거야. 내가 유달리 걱정이 많다는 건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걱정해서 나쁠 건 없어.”
중얼중얼거리던 우사를 보며 무한이 걸음을 옮기려 할 때 귀에 꽂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흑수애에 큰일이 날 때는 진혼비 밑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 비밀통로라도 있는 걸까? 아버지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우사가 흘리듯 말하고는 파편과 남은 병장기를 자루에 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사천과 자신의 충돌이 걱정된 우사가 비밀통로를 알려주고 간 것이다.
무한이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멀리 우사가 사라진 쪽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당신 뜻은 알겠소.’
***
“정말일까? 부주가 흑천에 전향하여 흑월주가 되었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귀영이 방안을 오락가락하며 중얼중얼거렸다.
허름한 객잔 객방.
남궁우는 벽에 붙은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벌컥 술을 들이켠 남궁우가 중얼거렸다.
“크윽…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게 무림이야. 천하방에서 괄시 받는 것보다 흑월주로 숭앙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세상 모든 이가 천하방을 배신해도 부주는 그럴 수 없어. 할아버지가 세운 천하방을 배신해? 헛소문일 거야.”
헛소문이라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흑수애에 들어간 무한이 흑천노조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흑월주에 취임했다는… 심지어 취임식 날짜도 알려졌다.
그러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으음. 그럼 나도 흑천도가 되는 걸까?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정파 놈들은 신분을 너무 따져. 흑천은 힘이 최고니까 나도 한 자리 할 수 있지 않을까?”
귀영이 이해득실을 따지다 남궁우를 향해 말했다.
“너는 아무래도 안 되겠지? 남궁세가 사람이 흑천도가 되면 그야말로 세가가 뒤집힐 거야.”
“당연히 그럴 일은 없지. 만일 부주가 흑천에 몸을 담는다면…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술에 취한 남궁우가 벌건 눈으로 허공에 주먹질을 하다가 한탄을 했다.
“아, 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부주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외로웠던 거야. 그래서 전향한 거라고.”
“너, 말이 좀 이상하다. 네가 뭔데…….”
“내가 누구야. 남궁지낭! 내가 옆에서 보듬어줬다면 삐뚤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이힉! 징그러운 소리 그만하고 술 좀 작작 처먹어!”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샅샅이 뒤져. 사사천주의 엄명이니 수상한 놈은 모두 잡아 족쳐!”
이어서 우당탕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누군가 객방을 쾅쾅, 쳤다.
“방에 있는 자는 나와라. 검문이다!”
검문이라는 말에 귀영과 남궁우가 퍼뜩, 놀라 서로를 봤다.
남궁우가 손짓을 하자 귀영이 재빨리 어깨를 구부정하게 좁혔다.
“빨리 안 열어?”
귀영이 객방 문을 열었다.
“뭐 하느라 이제 여는 거지?”
우락부락하게 생긴 흑천도가 귀영을 밀치고 방으로 들어왔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우는 탁자 벽에 기대서 눈을 감고, 술 취해서 자는 척하고 있었다.
“얼씨구? 대낮부터 술판이냐?”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돌아나가려던 흑천도의 눈에 구석에 세워진 도가 보였다.
‘아차!’
귀영이 혹시 몰라 유사시에 바로 집을 수 있도록 세워둔 도였다.
“저건 누구 거냐?”
“모르겠는데요. 원래 저 자리에 있었습니다요. 주인이 찾으러 올까봐 건드리지 않고 있었는데…….”
“으음. 좀 수상한데?”
흑천도의 시선이 두 사람이 쌓아둔 짐 보따리 쪽으로 향했는데, 보자기에 싼 길쭉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뭐냐? 컥!”
흑천도가 뒤를 돌아 귀영에게 향하는 순간 목덜미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귀영이 목을 후려친 것이다.
마침 방 앞 복도를 오가던 흑천도가 이 모습을 봤다.
“적이다!”
그러면서 호각을 불었다.
삐익!
귀영이 세워둔 도를 집으며 남궁우에게 외쳤다.
“튀어!”
남궁우도 자신의 장검을 집으려는데 술에 취해 발이 꼬여 넘어졌다.
“이그… 내 이럴 줄 알았다.”
귀영이 남궁우의 옆구리를 휘어잡고는 문 쪽을 봤다.
호각을 분 놈이 칼을 뽑아 문을 지키고 있었고, 아래서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쿵쾅쿵쾅, 들렸다.
귀영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와장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