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존무한-126화 (126/250)

126화

피전격이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말했다.

“나는 자네가 퍼뜨린 줄 알고 무척 기특했는데 말야. 뭐, 상관없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소문을 사실로 확인시켜주면 되지…….”

계속되는 억지는 무한을 자극시키기 위한 의도로 보였다.

무한은 담담하게 받았다.

“어디서 무슨 소문이 나도는지 모르지만, 내가 흑천에 투신하는 일은 없을 거요.”

“단정 짓지 않는 게 좋을 것이네.”

피전격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흑수애에 들어와 흑천노조에게 귀빈 대접을 받고, 서패전주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사실이 천하방의 귀에 들어가면 자네는 돌아갈 곳이 없지 않은가.”

피전격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쿡, 찍으며 말했다.

“강호의 풍파를 헤쳐가려면 기댈 곳이 필요해. 흑천은 폭풍이 몰아쳐도 안전한 곳이지.”

무한은 더 듣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약속대로 원단이 지나 천주를 찾아왔소. 혈사대까지 희생해가며 나를 초대한 이유가 무엇이오?”

피전격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까지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나? 내 밑으로 들어오란 말이다.”

“그런 거라면 혈사대주를 통해서 전하지 그랬소.”

무한이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말했다.

“거절하오.”

피전격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흘러나왔다.

“아니, 넌…… 내게 무릎을 꿇어야 해.”

방금 전까지 웃고 있었던 사람이 살기를 흘려냈다. 수시로 급변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피전격이 차가운 시선으로 무한을 향해 말했다.

“너는, 그래야만 하는 운명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단호한 어조에 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피전격은… 사감(私感)이 있다.

‘내가 그와 얽힌 일이 없는데, 사감이 있다면…….’

흑월주였던 어머니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무한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의 운명은 내가 결정하오.”

돌연, 피전격이 손을 뻗었다.

벽에 걸려 있던 단도 두 자루가 동시에 날아와 다탁에 꽂혔다.

단도가 꽂힌 자리가 무한과 피전격의 오른손 바로 앞이다.

그러더니 피전격이 다탁 위로 왼손을 뻗었다. 마치 팔씨름이라도 하자는 모습이었다.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면 손을 잡고 단도를 뽑아라!”

피전격의 두 눈에 광망이 번뜩였다.

“죽이지는 않겠다. 고작 팔 하나를 거는 것뿐이다. 내공을 쓰지 않고 겨루는 것이니 내가 질 수도 있겠지. 그러면 두말없이 놔주겠다!”

무한이 단도와 피전격이 내민 손을 번갈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을 뿐이다.

피전격의 격장지계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무한이 응하지 않자 피전격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역시! 애송이에 불과하군. 너희 정파의 놈들은 너무 심약해. 심약하다 못해 비겁하지.”

피전격이 비웃듯 말을 이었다.

“왜 그런지 알아? 어미 새가 주는 먹이를 받아먹듯 무공을 익혀서 그래.”

무한은 담담히 듣기만 하였다.

“문파의 위세를 업고 자기가 잘난 척 거들먹거리는 놈들이 막상 맞대결을 하자면 지금처럼 꼬리를 말지.”

피전격은 자신의 앞에 있는 단도를 들고 칼날로 소매를 걷었다.

왼손에 수없이 많은 흉터자국이 보였다.

피전격은 화경의 고수.

마음만 먹으면 이런 상처쯤은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건 일부러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보이나? 이게 나와 맞대결을 펼치다 죽은 놈들 숫자다. 그놈들의 피를 밟고 여기까지 왔지. 내가 얻은 건 그 어느 하나 누가 준 게 아니다.”

며칠 전 들은 것과 비슷한 맥락의 말이 다시 나왔다.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네게 사내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지. 진정한 강자가 되는 길을 말이다. 그리고… 사사천을 물려주마.”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검천부주로 충분히 만족하오.”

“흥! 역시 주어진 것에 안주하는 놈이로군.”

피전격이 코웃음을 치고는 손짓을 하였다.

어디선가 무인 하나가 쟁반을 들고 왔는데, 모래시계가 놓여 있었다.

피전격이 모래시계를 탁자에 놓으며 말했다.

“반시진을 주겠다.”

엎어 놓는 순간부터 모래가 떨어졌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제자로 삼고 모든 걸 전해주마.”

“이미 거절했소.”

“흥! 그러면 죽겠지. 마지막 기회니 잘 생각해봐라.”

피전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쳐봐야 흑수애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은 놔주지 않겠다는 소리다.

“네가 동흥전으로 돌아가 처박힌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는 있겠지. 그것 또한 바라는 바다.”

피전격이 마지막으로 비웃듯 한마디 던지고 나갔다.

홀로 남은 무한은 천천히 남은 차를 마셨다.

모래가 쉼 없이 떨어져 쌓이더니 일각이 되자 모두 떨어졌다.

그러자 방문을 지키던 무사가 와서 모래시계를 뒤집으려 했다.

무사가 모래시계를 내려놓는 순간.

파악!

모래시계가 터져버리고 탁자에 파편과 모래가 흩어졌다.

무한이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반시진의 여유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전해라.”

명색이 사사천주라는 피전격이 뒷골목 흑도처럼 구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가 만든 틀 안에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방을 나오는데 당전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가의 일은 꺼내지도 못했군.’

무한은 새삼 피전격이 효웅이라는 걸 깨달았다.

피전격은 무한이 사천 공략에 대해 협상하려 왔음을 알고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린 것이다.

무한이 서패전을 나서자 광장에 도열하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노려봤다.

아까와는 달리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흉흉한 눈빛이다.

무한이 도열한 무인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대문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고함을 쳤다.

“네가 감히 천주의 뜻을 거역할 생각이냐?”

“살아서 문턱을 넘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대문 앞에 선 무한이 슬쩍, 돌아봤다.

광장의 무인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듯 고함을 질렀지만 실제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기강이 잡혀 있구나.’

사사천주가 반시진의 여유를 주었으니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문득, 괴인들과 싸우던 혈사대가 떠올랐다. 강적을 만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았다.

‘용인술까지 뛰어난 건가?’

피전격에 대해 알면 알수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이 대문을 훌쩍, 넘어 서패전을 떠났다.

잠시 후.

무한은 흑수애 중문(中門) 부두에 당도하였다.

흑수애 세 곳 부두 중에 가장 큰 곳이었으나 웬일인지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배들은 선착장에 매여 있었고, 강 위에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하문(下門) 부두 쪽을 봤는데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무한은 흑수애를 벗어나기 어려울 거라는 피전격의 말이 떠올랐다.

무한이 부둣가 뒤쪽 거리를 봤다.

부두를 따라 길게 늘어선 술집 거리는 한산했다. 원단을 맞아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갔다가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남은 이들이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모습이 열린 창 너머로 보였다.

가끔 이쪽을 힐끔거리는 배꾼들의 눈에 원망의 빛이 비쳤다. 그들도 누구 때문에 뱃길이 막혔는지 아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거리 저편에서 쿵! 쿵! 하는 북소리와 함께 나발과 피리, 소(簫) 등 온갖 부는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흑선수사 단조가 북과 피리 등을 부는 이들 한 무리를 끌고 나타났다.

무리의 앞에 깃발 든 이들이 있었는데, 흑월이라 쓰인 깃발이 가장 눈에 띄었다.

요란한 풍악 소리와 함께 다가온 단조가 무한 앞에 이르러 손을 들었다.

그러자 악기 소리가 멈췄다.

단조가 무한 앞에 서더니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단조의 표정은 진지했다.

무한이 어이없어 하며 물었다.

“이건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 모시러 온 것입니다.”

단조는 공손하게 말하곤 뒤를 향해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네 명의 사내가 사인교(四人轎)를 들고 나왔다.

예상치 못한 단조의 행동에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멀리 흑천전 쪽을 바라보았다.

흑천노조가 흑천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상 모든 게 노조의 손아귀 안에서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흑천노조는 단조의 성품으로 보아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동흥전을 내준 것이리라.

무한도 어느 정도 귀찮은 일이 있을 것이라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길을 떠나려 했는데, 단조가 이렇게 요란한 방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명절을 맞아 한가한 흑수애지만 풍악을 동반한 행렬에 구경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무한이 잠시 생각을 하다 사인교에 올랐다.

“모셔라!”

단조가 외치자 사내들이 일제히 북과 피리, 나발 등을 불었다.

행렬은 흑수애 거리를 돌아다니다 커다란 전각 앞에 멈췄다.

특이하게도 전각에는 아무런 현판이 붙어 있지 않았다.

단조가 사인교 앞으로 와서 읍을 하며 말했다.

“내리셔서 현판 휘장을 걷어 주시지요.”

무한이 보니 검은 천으로 가린 커다란 현판이 있었다.

무한이 사인교에서 내려 검은 천을 걷었다.

흑월정(黑月停).

현판이 모습을 드러내자 단조가 외쳤다.

“흑월의 주인이 오셨다. 모두 경배하라!”

그러자 악기를 든 사내는 물론 주위의 모든 이들이 그 자리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드시지요.”

단조가 흑월정에 들기를 청했다.

“여기까지!”

이제까지 순순히 단조가 하는 대로 따랐던 무한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흑월정 문턱을 넘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고, 그걸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무한의 낯빛은 부드러웠으나 단호함이 서려 있어 모두 움찔하였다.

무한이 단조를 보며 말했다.

“내가 흑천에 전향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게 당신이로군.”

“전향이라니요. 빈자리에 합당한 주인이 앉는 것뿐입니다.”

단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러고도 당신의 목이 붙어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흑월의 주인이 계신데, 새로운 주인을 세운다? 이건 하극상 아닌가?”

무한의 물음에 단조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입니다. 그분은 이미 오래전에 흑월주의 지위를 내려놓으셨지요. 그러니 마땅한 주인이 자리를 찾는 걸 마다하지 않으실 겁니다.”

무한은 흑도의 세계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명분과 체계를 중시하는 정파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제까지 흑월은 단조가 이끌었나보군.’

무흔으로부터 흑천이 흑월과 사사천으로 나뉘어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이제는 나를 내세워 피전격을 견제할 생각이고…….’

흑천노조의 외손자이자 흑월주의 아들이니 단조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조가 말했다.

“흑월이 자리를 잡아야 강호의 겁난이 종식될 겁니다.”

“무슨 뜻이오?”

“흑월은 만산을 품을 뿐,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더니 품에서 옥합을 꺼내 열어 보였다.

“흑월령입니다.”

단조가 흑월령을 들어 앞뒤를 번갈아 보여주었다.

앞에 만산 위에 검은 달이 뜬 그림과 함께 흑월포만산(黑月抱萬山)이라 쓰여 있고, 뒤에 영(令)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사천의 행보는 분명 정파와 극한 대치로 이어질 것입니다. 본래 흑도는 영역이 없습니다. 다만, 천하의 밤이 흑도의 세상이지요.”

‘본래 흑도는 영역이 없다…….’

단조가 무척 함축하여 말했으나 무한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무례는 용서하시고 어서 권좌에 오르시지요.”

단조가 흑월령을 양손으로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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