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으음. 그런 거였군.’
무한은 흑천 심처의 특이한 전각 배치를 떠올렸다.
‘중앙에 흑천전을 두고 동서 양쪽에 흑월과 사사천의 세력을 배치한 거였어.’
무한은 지금 사사천주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사사천주는 원단 이후에 보기로 했는데?”
무한이 무심한 얼굴로 약속을 상기시키자 납득이 고개를 숙였다.
“심경의 변화가 있으셔서 일찍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니! 약속은 유효하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사사천주를 만나기 전에 흑천노조와 한 번 더 대면하고 확인해야 할 게 있다.
“원단이 지나고 바로 찾아가겠다고 전해주시오.”
납득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더는 말을 못하고 물러갔다.
무한은 빈청을 나와 후원으로 갔다.
작은 연못과 작은 나무들로 꾸며진 정원에 돌로 만든 정자가 놓여 있었다.
무한이 정자 돌의자에 앉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수가 차와 과일을 가져왔다.
무한은 차를 마시며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잘 가꿔진 정원은 한겨울임에도 왠지 모르게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
정원에서 서안에서 살던 집의 느낌이 났다.
잠시 후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더니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원을 월지(月地)라고 부른답니다.”
돌아보니 진복이 정자 아래 서 있었다. 진복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노조께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습니다.”
“알겠소.”
진복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정원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분은 안녕하십니까?”
누구의 안부를 묻는지 알았지만 무한은 대답할 수 없었다.
“괜한 걸 여쭤봤군요.”
무한이 말이 없자 진복이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무한의 시선이 진복의 뒷모습을 한참 쫓았다.
흑천노조의 심복이 어머니의 행방을 모르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흑천노조가 연을 끊었다더니 정말 찾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나를 동흥전에 머물게 하다니…….’
흑천노조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무한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정원 연못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뜬금없이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놀랄 일은 더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이어서 정원의 앙상한 배롱나무 아래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흑의로 된 문사복을 단정하게 입은 서른 가량의 사내가 무한을 흘깃 보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천하방 검천부주가 흑천의 심처에 머물고 있다면 누가 믿을까.”
사내는 낯빛이 희고 준수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인상이었다.
여기가 흑천이 아니었다면 정파의 중진이라 여겼을 것이다.
‘흑선수사 단조!’
무한은 그가 흑선의 수장 단조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단조는 천천히 정자에 올라와 무한 맞은편에 앉았다.
“심지어 본인을 눈앞에 둔 나조차 믿기 힘든데 말이지.”
무한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동흥전에 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흑천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다.
사사천주가 사람을 보내는가 하면, 흑선의 수장이 직접 찾아오다니.
‘흑천노조의 권위가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그가 머무는 곳이 동흥전이 아니었다면 아마 사사천주나 눈앞의 흑선수사가 무력대를 풀어 끌고 갔을지도 모른다.
무한이 차를 따라 잔을 건넸다.
“나 역시 흑선의 수장을 만나리라 생각지 못했소.”
“하하. 흑선은 천하방 군사부처럼 위세가 크지 않다네. 그저 여기저기 흘러 다니는 소문을 주워오는 곳이지.”
단조가 너스레를 떨면서 은근히 하대하였으나 무한은 개의치 않았다.
단조의 시선이 흑천전 쪽을 향했다.
“지금 부주가 동흥전에 머물고 있다는 것도 새벽에야 알았다네.”
그러면서 싱긋, 웃었다.
“정식으로 방문첩을 보냈으면 극진히 모셨을 텐데…….”
“무슨 이유로 찾아온 것이오?”
무한이 시선을 내려 연못을 보며 말했다.
천목투심술로 단조의 생각을 읽으려 했으나 알아낼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느낌을 받았다.
‘괜히 흑선의 수장이 된 게 아닌가보군.’
무공 수위는 절정으로 보였는데 그마저 믿을 수 없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다.
“이유라니……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아닌가? 검천부주께서 무슨 일로 흑천을 찾으셨을까?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어째서 잠입을 한 건가?”
단조는 빙글빙글 웃으며 별일 아닌 것처럼 물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웃지 않았다.
“사사천주와 만나기로 했소.”
“사사천주?”
의외의 답에 단조의 미간이 살짝 좁아들었다.
‘몰랐었나?’
흑선이 흑천의 군사부라면 응당 알고 있어야 할 일 아닌가?
무한은 흑천도 내부사정이 간단치 않다는 걸 느꼈다.
단조가 한 방 먹은 듯 잠시 침묵을 했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들어왔어도 될 일인데, 이리 은밀하게 들어온 건 어찌 설명할 건가?”
“적진으로 들어오면서 미리 살펴보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소.”
단조가 고개를 저었다.
“흐음…… 약해. 그러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 아닌가. 실제로 바로 들통이 났고 말이지.”
“노조의 귀가 그리 밝을 줄은 몰랐소.”
무한이 별일 아니란 듯 대답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상하단 말야. 노조께서 자네를 동흥전에 들인 이유가 뭔가?”
무한이 피식, 웃었다.
“그건 노조께 가서 물어야 할 일 같소만?”
단조가 한숨을 푹, 쉬고 다시 한 번 흑천전 쪽을 바라보더니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게 말이지. 노조를 뵙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란 말일세. 그러니 어쩌겠나? 구차스럽더라도 자네에게 와서 이유를 알려 달라 애걸하는 수밖에.”
무한은 너스레를 떠는 단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단조가 무안한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노조께서는…….”
단조의 눈에 존경의 빛이 스쳤다.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으시는 분이거든. 자잘한 세상사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네.”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용케 흑천이 굴러가는구려?”
단조가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말게. 아주 잘 돌아가니까. 우리 흑천은 천하방처럼 꽉 막힌 곳이 아니야. 모두 알아서 잘 한다네.”
“제멋대로라는 말로 들리오만.”
무한은 혈사대가 자신을 찾아온 일이 사사천주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는 걸 상기하며 말했다.
서른 명이나 되는 혈사대가 왔다가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도 흑천노조는 물론이고 수뇌부라는 흑선조차 모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확실히 정파와 다르구나.’
단조가 손가락을 세워 저었다.
“제멋대로라고?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하지만 이게 바로 흑도의 호방함이라네.”
무한은 굳이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네에게…….”
단조가 말을 이어가려 하였다.
아마도 말을 많이 할수록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금 무한은 흑천노조와의 저녁식사를 앞두고 생각해야 할 게 많았다.
무한이 자세를 고쳐 잡고 단조의 말을 끊었다.
“어찌됐든 노조께서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떠들 수는 없을 듯하오.”
“정말 너무하는군. 내가 자네를 천하방 밀정으로 몰아 구금하기를 바라나?”
“그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소.”
“아니! 노조는 뵙지 못하더라도 흑선의 수장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다네.”
“여기가 어딘지 알면서 그런 협박이 통할 것이라 생각하오?”
무한의 말에 단조가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동흥전은 흑천노조의 영역.
여기서 누군가를 잡아갈 수는 없다.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러더니 양손을 들어 보였다.
“좋아. 내가 졌네. 도저히 말로는 이기지 못하겠군.”
단조가 너스레를 떨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참. 잊을 뻔 했군. 자네가 우리 사람을 데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네만…….”
무한이 속으로 웃었다.
‘이제야 묻는군.’
단조의 얼굴에서 희미하게나마 초조한 기색을 읽어낸 것이다.
무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짧게 되묻는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고, 단조는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단조는 천하방 성밖마을에서 있었던 싸움을 뒤늦게 보고 받았다.
연이설이 부상을 입고 누군가 구해갔다는 것도 들었다. 단조는 그자가 무흔이라 여겼다.
무흔은 무한의 호위.
그런데 무한이 오히려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냐고 묻는 건, 무흔을 봐서 풀어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더욱 염려가 되었다.
‘천하방을 빠져 나왔는데 아직 복귀하지 않았다면…… 부상이 심한 건가?’
무한이 무흔과 연이설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놓아 주었다는 것도 의외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부상을 입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소.”
단조가 속을 들킨 것 같아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흑천의 밀정인 걸 알고도 놓아주었다니…… 의외로군.”
“…….”
“그 사실을 도왕이나 손우자가 알면 곤란해질 텐데 말이야.”
“상관없소.”
무한의 시선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연못을 향했다. 천천히 차를 음미하는 모습이 여유롭기까지 하다.
‘으음. 이 자의 속은 정말 모르겠구나.’
단조는 새삼 천하방 검천부의 명성이 강호를 울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역시 오랫동안 타인의 의중을 알아채는 수련을 해왔다. 진경 후기 이상이 아니라면 대략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무한은 마치 벽을 대하는 듯했다.
어찌됐든 연이설의 안위가 확인되니 마음이 놓였다.
“아무튼 고맙군. 빚을 진 걸로 하지.”
“…….”
무한은 대답 없이 연못을 주시하였다. 마치 얘기 끝났으니 가라는 태도였다.
단조는 은근히 불쾌해졌다.
명색이 흑선의 수장을 앞에 두고 한눈을 팔다니.
단조가 찻잔을 들어 마시며 무한과의 대화를 복기하였다.
몇 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그 안에도 미루어 짐작할 정보가 꽤 있다.
‘일단…… 이놈은 도왕이나 손우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구나. 게다가 연이설을 놓아주는 대담함도 있고…… 응?’
단조는 자신이 연이설에 대해 물었을 때 무한이 묘한 웃음을 지었던 게 기억났다.
‘뭐지? 그 웃음의 의미는?’
그러다 문득, 스친 생각에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단조가 부랴부랴 일어섰다.
“하하…… 이런,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박했군. 다시 보세.”
얼마나 놀랐는지 말이 헛나와 지금까지와 달리 무한에게 평대를 하였다.
단조가 애써 침착한 걸음걸이로 정자를 내려가더니 사라졌다.
멀어져 가는 단조의 뒷모습을 보며 무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외면했는데 단조가 자신의 천목투심술을 알아챈 게 분명했다.
동시에 흑천노조가 천심공이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단조가 연이설을 연모하고 있어.’
그저 연모하는 게 아니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자가 연이설에 대해 물을 때는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단조는 연이설 대신 목숨을 내놓을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굳이 와서 물어봤으리라.
‘흑선의 수장이 연모하는 여인이라니…….’
연이설이 아직 흑천에 복귀하지 않았으니 무흔을 찾아 다시 데려오라 하면…… 흑선의 수장을 압박할 인질을 확보하는 셈이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흑도와 다를 바 없다.
무한은 잠시 더 연못을 바라보며 생각을 가다듬는데 어디선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방진 놈! 본좌가 부르는데 정원 구경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
순간, 정자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귀신같은 신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