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네가 남장을 하고 다니는 건 상관없어.”
무한의 말에 남궁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알고 있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어쩐지 음흉하게 가슴만 쳐다보더라니.”
남궁우는 남장을 들키고도 뻔뻔했다.
무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게 접근한 이유를 밝히지 않을 거면 이대로 돌아가. 특임감찰의 직권으로 넌 해임이야.”
“말도 안 돼! 나는 감찰단주가 직접 임명한 호위라고.”
“내게는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남궁우가 갑자기 하소연하듯 말했다.
“이러지 마. 여기서 짤리면 나는 갈 데도 없다고.”
“이만 가봐. 더 할 이야기 없어.”
무한이 축객령을 내렸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를 쫓아낼 수는 없어.”
남궁우가 거세게 항의하는데 귀영이 들어왔다.
의외로 귀영이 남궁우 편을 들었다.
“얘가 함부로 말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호위입니다.”
“둘 다 나가세요.”
무한이 둘 다 내쫓았다.
당가에 가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남궁우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당가와 남궁세가가 척을 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자신으로 인해 그런 일을 초래할 수는 없었다.
무한이 당전수의 객방으로 갔다.
“내일 바로 출발하자.”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 했는데…….”
당전수는 표행으로 오고 있는 당현전의 시신과 강변에 임시 매장한 당가의 무인들까지 운구하겠다고 했다.
“당가는 가문을 위해 죽은 이들을 버리지 않아.”
당전수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가문 사람들을 챙겨서 돌아가. 나는 따로 들를 데가 있어.”
“알았어. 집에서 기다릴게.”
무한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서려다 말고 당전수에게 물었다.
“내가 흑천과 손을 잡았다는 주장이 나오면 어쩔 거야?”
“그게 말이 돼?”
당전수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그런 소문이 나돌지도 몰라. 당가에 나를 경계하라는 첩보가 들어갔을 수도 있지.”
“그…… 천하방에 숨은 누군가가 그럴 거란 말이지?”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아버지는 현명한 분이야. 거짓소문에 휘둘리지 않아.”
“사실이 중요하지는 않아. 당가에 뭐가 더 이익이 되는가가 중요하겠지.”
“그럴 리가 없어.”
당전수가 부인하였다.
무한도 당가주를 직접 만나본 일이 없으니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무한은 당전수의 객방을 나와 자신의 짐을 챙겼다.
그날 밤.
무한은 아무도 모르게 객잔을 빠져 나왔다.
***
“환노…….”
손우자가 집무실에 홀로 앉아 중얼거렸다.
“당신이라면 해치울 수 있었을 텐데…… 방심한 건가?”
무한에게 오노(五老) 중 셋이나 당했다.
환노와 환영육괴가 전멸한 건 예상치 못했다. 적어도 동귀어진은 할 거라 예상을 했다.
시신을 수습한 고노(苦老)의 보고에 의하면, 환노는 두 사람과 격전을 벌였으며 그중 한 명은 중상을 입었을 거라고 했다.
환노의 시신으로 보아 중상을 입은 이는 암중호위로 추정됐다.
계획대로라면 무한은 물론 당전수까지 해치웠어야 했는데 고우만 죽었다.
‘변수는 늘 있게 마련이지.’
손우자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행스럽게도 고강후의 분노가 예상보다 컸다. 도천대와 도룡대까지 몰려갔으니 흑천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조금만 더 몰아친다면 흑천과 천하방 간의 전면전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손우자의 시선이 좌측 벽면에 걸린 지도를 향했다.
남서쪽 흑천의 영역, 중원이 천하방, 그리고 북서쪽이 마천이다.
하지만 중원이 천하방의 수중에 있는 건 아니다. 대파와 세가들이 곳곳에 할거하며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이래서야 진정한 의미의 천하방이랄 수 없지.’
손우자가 지도 위의 형세를 살피는데 바깥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천부주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게.”
손우자가 집무실 문으로 나가 맞이하려는데 고강후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삼엄한 기운이 전신에 휘몰아친다.
손우자가 예를 갖췄다.
“부르시면 제가 갔을 텐데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고강후의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급파한 신악강으로부터 전서구가 날아왔다.
고우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아냈으며 곧 수습하여 보낼 것이라고 했다. 장자의 죽음이 확인된 바나 마찬가지다.
“도왕께 흑천 정벌을 주청하고 오는 길이네. 흑천을 칠 계획을 수립하게.”
“도왕께서 승인하셨습니까?”
손우자가 짐짓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고강후는 분노하는 와중에도 그런 손우자의 모습에서 가식을 느끼고 속으로 욕을 했다.
손우자가 보여주고 싶은 표정만 내보인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는 고강후다.
지금은 어찌됐든 손우자의 지원이 필요하다. 성질을 꾹, 누르고 말했다.
“군사부 계책을 받고 결정하시겠다고 했네.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게 됐어.”
“그렇군요.”
손우자가 가운데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피곤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는 고강후의 눈에 불길이 솟았다.
당가에 손을 내밀라는 건 손우자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보냈는데 시신으로 돌아온단다.
그럼에도 손우자는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 듯 건조하게 대답한다.
손우자가 고우를 보내라고 한 건 아니니 따지기도 애매하다.
고강후가 분을 삭이며 말했다.
“원단이 지나면 출정할 걸게.”
“너무 빠릅니다.”
“도천부라도 먼저 가겠네. 흑수애를 쓸어버릴 것이야.”
고강후가 으르렁거리듯 내뱉고는 돌아섰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문을 나서는 고강후의 뒷모습을 보는 손우자의 눈빛이 무심했다.
***
중경을 나선 무한은 사천으로 향하다 중도에 길을 꺾어 광서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따라붙는 이목을 떨치기 위해 몇날며칠 무명신법을 극한으로 펼쳤다.
흑천의 세력은 귀주와 광동을 확보하고 사천과 강서, 복건으로 넓혀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흑수애를 본산으로 삼고 있다.
흑수애는 검은 절벽을 뒤로 하고 앞은 강인 지형이라 배를 타지 않는 한 들어갈 수 없다.
무한은 흑수애로 들어가는 관문 마을인 흑천관(黑天關) 부두에 서서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친 무명옷에 낡은 봇짐을 등에 멘 무한은 일자리를 구하러 고향을 떠난 젊은이, 딱 그 차림이었다.
무한의 시선이 막 들어오는 배 쪽으로 향했다.
흑수애를 오가는 배는 흑천의 경비대가 철저하게 검문하고 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구나.’
흑수애로 들어가는 포구는 모두 세 곳.
두 곳 모두 경계가 삼엄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다만, 가장 큰 포구여서 틈이 있을 법도 했다.
무한이 흑수애로 들어갈 방법을 궁리하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흑수애로 가려고?”
마치 속을 들킨 듯해 내심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무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한겨울임에도 배자만 걸치고 있었다. 배자 사이로 드러난 웃통은 단단한 근육질이었다.
농사가 끝난 한겨울. 할 일이 없는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흑천관으로 몰려든다.
흑천의 본산 흑수애에는 수많은 무인들이 거주하고, 그 덕에 일거리가 꾸준히 나온다.
청년이 나루에 정박하는 배를 보며 말했다.
“조금 이따 사람을 모집할 거야. 저 배는 일꾼을 데리러 온 거지.”
“아, 그래. 무슨 일을 하는 건데?”
“전각 보수공사라더군. 별로 힘들지 않아. 할 만하다고.”
“흑수애에서 일을 해봤어?”
“나야 벌써 몇 번 다녀왔지. 근데, 너는 이곳 사람이 아니지?”
무한의 말투가 약간 다르니 청년이 바로 알아차렸다.
“귀주에서 내려왔어.”
“으음. 그럼 신원조회를 통과하기 어렵겠네.”
“신원조회?”
“흑수애로 들어가는 일꾼들은 신원 확인을 하거든. 이 근방 사람이 아니면 뽑지 않아.”
‘흑천의 본산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
무한의 시선이 흑천의 배 쪽으로 향했다.
“내가 보증을 서줄까? 귀주에서 온 친척이라고 하면 돼.”
무한이 청년을 주시하였다.
속을 감추거나 해코지 하려는 심산이 아니다. 원래 품성이 사람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는 게 읽혔다.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어.”
혹시라도 신분이 밝혀지면 청년이 곤란해진다.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청년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물론 여기에도 일할 곳은 많지. 하지만 흑수애로 가서 일하는 게 품삯을 배는 더 받을 수 있어.”
“신분을 속이고 들어갔다가 들통 나면 서로 곤란해질 수도 있어. 그런 건 원치 않아.”
“하하. 사실 여기 모인 일꾼들 절반은 외지인이야. 그러면서 누구의 사촌이니, 팔촌이니 하며 일하는 거지. 겨울에 이만한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거든.”
“그렇군.”
“어쩌다 보니 이번에는 혼자 오게 됐지 뭐야. 일을 하려면 마음 맞는 친구가 중요한데 말야.”
청년은 무한이 퍽이나 마음에 든 듯했다.
“전각 공사에서 일하려면 손발이 맞는 짝이 있어야 편하거든.”
무한이 망설이는데 청년이 어깨를 잡았다.
무인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생각 있으면 점심 먹고 저기로 와. 저곳에서 사람을 모집하니까.”
청년이 부두 뒤쪽에 있는 이층 건물을 가리켰다.
“생각해보지.”
“나는 우이친이라고 해. 장족이지. 여기서 백 리 정도 떨어진 우향촌에 살고 있어.”
무한이 내심 웃었다.
‘장족이면서 한족인 나를 친척으로 소개한다고?’
흑천이 그만큼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리는 없으니 우이친이 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점심을 먹고 무한은 우이친이 일러준 곳으로 갔다.
건물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한 사람씩 들어갔다가 작은 목패를 받아 나왔다.
정말 신원확인 절차가 간단한지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다.
무한이 들어가자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기다란 책상이 있었고, 그 뒤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름.”
“한무라고 합니다.”
가운데 사람이 묻고 무한이 대답하자 옆에 있는 이가 장부에 적었다.
“출신은?”
“귀주성입니다.”
묻던 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귀주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일자리를 찾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신원을 보증할 사람이 있나?”
“저는 여기가…….”
무한이 없다고 말하려는데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하 감독관, 저희 마을에 먼 친척이 있어 온 친구입니다. 제가 오자고 했지요.”
무한이 돌아보니 우이친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무한이 내심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이친이 나선 이상 장단을 맞춰야 했다.
“우향촌에 잠시 왔다 일하러 온 겁니다.”
“그래?”
가운데 있는 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는 이가 장부에 적고 목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반대편이 있는 이가 오라고 손짓하고는 목패를 건넸다.
“넌 처음이지? 잃어버리면 나오지 못한다. 잘 간직해.”
무한이 목패를 받아서 나와 살폈다.
칠십이(七十二)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잠시 후 우이친이 목패를 받아들고 나왔다.
“마침 하 감독관이 왔지 뭐야. 저분과는 안면이 좀 있지.”
무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생색을 냈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까무러칠 것이다.
천하방 검천부주가 흑수애에 잠입하는 걸 도와줬으니 들통 나면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