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당전수가 움직였으니 흑천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자신까지 데려가겠다니.
그렇지 않아도 흑천에 대해 궁금했기에 따라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전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보아하니 흑천 조무래기들 같은데 본 소가주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나?”
“흐흐흐. 네가 호위도 없이 천지분간을 못하고 싸돌아다니니…… 어쩌겠냐. 우리라도 호위를 서 주마.”
“미친놈들. 네놈들 실력으로 내 호위를 하겠다고? 발이나 닦을 수 있으면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당전수도 입심이 만만치 않았다.
이개 조 스무 명의 혈사대는 일조장이 당전수와 입씨름 하는 사이 무한 일행의 수를 파악하고 흩어져 포위하였다.
“흥! 네놈이 혈사일조장이라고? 잘됐다. 나와 한판 겨뤄보자”
마철립이 고우의 앞을 가로 막으며 나섰다.
“넌 뭔데?”
“도천 일조장 마철립이다. 일대일로 붙어보자.”
“흐흐. 도천일조장? 도천부와는 무관한 일이니 빠져라. 우리는 당전수와 심무한만 데려가면 된다.”
혈사대의 목표는 심무한과 당전수다. 도천부와는 되도록 마찰을 피하라는 명이 내려왔기에 일조장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뭐? 내 눈앞에서 사람을 데려간다고? 나를 뭘로 보고…….”
마철립이 코웃음을 치며 도를 세우는데 고우가 끼어들었다.
“감히 도천부에 대적할 자신이 없나보군. 그렇다면 빠져주지.”
마철립이 고우의 말에 잘못 들었나 싶어 황급히 돌아봤다.
일조장도 혹시나 하여 던져본 말에 고우가 의외의 대답을 하자 어리둥절해하였다.
고우가 양손을 들어 보이고 뒤로 물러났다.
“대공자!”
마철립이 어이가 없어 고함을 질렀다.
강변에서 도주한 뒤에 또다시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다니.
그러나 고우는 말없이 뒤편 전각 쪽으로 사라졌다.
마철립이 허탈한 얼굴로 장내를 돌아봤다.
어이없기는 일조장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저 녀석들 일행이 아니었어? 아니면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건가?’
고우가 빠져준다면 일은 훨씬 쉬워진다.
“들었지? 순순히 투항해라.”
예상보다 쉽게 무한 일행을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자 일조장이 재촉하였다.
무한이 당전수에게 전음을 했다.
- 나 믿어?
당전수가 무한을 봤다. 무한의 표정이 진지한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이 한 발 나서서 한숨을 쉬곤 말했다.
“도천부가 빠진다니 어쩔 수 없군. 따라가지.”
뜻밖의 대답에 귀영과 남궁우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무한에게 다른 의도가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부주, 제가 적진까지 수행하겠습니다.”
귀영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한 옆에 붙었다.
“당전수, 너는 네가 호위하지. 같은 세가잖아.”
남궁우가 당전수 옆에 섰다.
일조장은 격전을 예상하고 왔는데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니 의심이 들었다.
“병장기를 던져라.”
“그러지.”
무한이 검을 던지자 귀영 등도 무기를 내려놓았다.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한 일조장이 혈사대원들에게 일렀다.
“포박해라.”
혈사대원들이 경계를 하며 다가왔다.
“허튼 수작하면 바로 그어버린다.”
한 놈이 무한의 어깨 위에 검을 놓고 다른 놈이 손을 뒤로 하여 묶었다.
어깨와 가슴까지 줄을 둘러 단단히 결박한 뒤에야 일조장은 안심을 하였다.
“이거 뭐, 식은 죽 먹기잖아.”
스스로도 성과가 믿기지 않았다.
“그러게. 피를 보지 못해 아쉬울 지경이야.”
이조장이 맞장구쳤다.
고우는 뒤쪽 전각으로 사라지고 마철립만 남아 착잡한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일조장이 대원에게 일렀다.
“대주께 연락을 해라. 목표물을 데리고 하산한다.”
그때, 아래쪽에서 고함과 비명,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조장이 대주 쪽에서 일이 난 걸 직감했다.
“이조, 너희는 인질을 데리고 먼저 내려가. 일조는 대주를 지원한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휙, 하고 인영들이 날아들었다.
모두 여섯 명인 괴인들은 두건이 달린 피풍의를 입고 있었다. 두건을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괴인들은 나타나자마자 무한 일행은 물론 혈사대원들까지 포위하였다.
일조장이 경악하였다.
‘대주가 그새 당했다고?’
그러다 밑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안도하였다.
“쫓아! 쫓으라고!”
혈사대주가 대원들을 독려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이 저지선을 그냥 뚫고 온 모양이구나.’
대주가 무사한 건 다행이지만 안도할 상황이 아니었다.
혈사대주의 저지선을 무시하고 올 정도라면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들이라는 뜻이다.
‘좋지 않아.’
일조장은 혈사대주와 우사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을 끌기로 하였다.
“수비 대형! 인질은 안으로.”
우습게도 혈사대가 무한 일행을 보호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귀영이 무한의 귀에 대고 감탄했다.
“이럴 줄 예상했던 거죠?”
무한은 갑작스런 상황에 뭐라 할 말이 없어 지켜보기만 했다.
나중에 나타난 여섯 괴인이 손우자가 보낸 이들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이거였나?’
오는 내내 누군가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이 풍기는 기운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또 있다는 뜻이다.
그때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무한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묶인 손목에 기운을 흘렸다.
뚝!
포박이 풀리자 주위에 있던 혈사대원들이 어, 하고 달려들었다.
스윽!
무한이 손을 뻗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이 날아와 잡혔다.
“어?”
혈사대원들이 당황하여 주춤 뒤로 물러나는데 무한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고우가 사라진 쪽이다.
마철립 또한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황급히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불전을 채 돌아가기도 전에 튕겨 나와 땅바닥을 굴렀다.
“크윽!”
마철립이 도를 짚고 일어나다 눈을 부릅떴다.
불전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두건을 쓴 괴인.
그의 왼손에 사람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대, 대공자!”
고우의 머리를 본 마철립은 눈이 뒤집혔다.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도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두건을 쓴 괴인이 오른손을 스윽 쳐들었다.
손목에서 은빛 광망이 번뜩였다.
피피핏!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달려가던 마철립이 오른쪽 허리부터 왼쪽 어깨까지 사선으로 양단되었다.
“컥!”
마철립은 피를 뿌리며 쪼개졌다.
“헉!”
지켜보던 혈사대원들이 숨을 들이켰다.
도천대 일조장을 일격에 참살하다니.
“단혼사(斷魂絲)?”
당전수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단혼사는 다루기 까다롭고 수법이 악랄하여 무림에서 금기시하는 기병이다.
무한의 시선이 두건을 쓴 괴인의 오른손목을 향했다. 낚싯줄 같은 은빛 선이 칭칭 감겨 있었다.
“자기만 살려고 아등바등하더니 저리 허무하게 가네.”
귀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남궁우는 진짜 위기라는 걸 실감했는지 질린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마침 담을 넘어 들어오던 혈사대주가 괴인이 마철립을 죽이는 광경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어…….”
괴인이 단혼사에 강기를 주입하여 휘두른 걸 본 혈사대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정말 진경의 고수구나!’
우사의 경고가 머릿속을 울렸다.
이어 단혼사의 괴인이 왼손에 들고 있는 고우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누구지?
일조장이 혈사대주를 향해 외쳤다.
“저자가 도천부 고우를 죽였습니다.”
“……!”
혈사대주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머리가 고우라고?”
천하방 도천부 대공자의 죽음…… 이는 무림을 뒤흔들 사건이다.
천하방주 도왕의 장손자라는 신분이 지닌 무게는 적지 않다.
고우의 죽음이 몰고 올 파장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거 왠지 똥 밟은 것 같은데…….’
고우가 죽은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는 건 흑천이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아무런 기운도 흘리지 않고 서 있는 저 두건 괴인.
우사가 말한 고수임에 분명했다.
‘일단 살아나가는 게 우선이다!’
혈사대주가 재빨리 판단을 내리고 상황을 살폈다.
혈사대 스무 명이 무한 일행을 호위하듯 원진을 그리고 있었다.
혈사대주가 일조장을 향해 전음을 던졌다.
- 당전수하고 심무한이 누구냐?
일조장이 슬며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일단 두 놈부터 피신시켜. 나머지는 죽기를 각오하고 뒤를 막아.
일조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한이 굵은 포승줄을 가볍게 끊어내고 허공섭물로 검을 잡아채는 걸 봤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애송이가 아니다.
- 심무… 고수…….
내공이 부족하여 완전한 전음입밀 수법을 펼치기 어려운 일조장이 손짓과 함께 의사를 전했다.
그래도 오랫동안 함께 했던 혈사대주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혈사대주가 인상을 썼다.
‘흑선, 이놈들 첩보가 아주 엉망이구나.’
납치작전을 짜며 염두에 둔 것은 당전수의 독공이었다. 심무한은 큰 변수가 아니었다.
흑선의 정보에 의하면 심무한은 이제 막 무관을 출관한 풋내기였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깨지고 나서야 건너는 우사가 그리울 지경이다.
‘우사 형님이 저놈만 막아만 준다면…….’
단혼사를 든 괴인은 감당할 수 없지만 나머지 여섯은 대원들이 서너 명씩 합공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사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혈사대주가 주위를 돌아봤으나 우사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혈사대주가 내심 한숨을 쉬고 심무한에게 전음을 했다.
- 심무한이 너냐? 지금 무척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지? 우리가 뒤를 막아줄 테니 일단 같이 빠져 나가자.
난데없이 들려온 전음에 무한이 의아해 하다 연신 눈짓을 하는 혈사대주를 보곤 피식 웃었다.
‘이래서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는 건가?’
어떻게든 자신과 당전수를 잡아 가고자 하는 혈사대주의 의지만은 인정해 줄 만했다.
- 좋다.
나쁠 건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전수의 안위를 생각하면 잠시 혈사대와 손을 잡는 것도 방법이다.
무한이 당전수를 비롯한 귀영과 남궁우에게 전음을 하였다.
- 두건 쓴 놈들, 강변 괴인들과 한패거리야. 일단 혈사대와 함께 움직인다.
“에엥? 흑천과 손잡자고요?”
“말도 안 돼.”
귀영과 당전수가 반발하였으나 남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이 재차 전음을 날렸다.
- 두건 괴인들, 최소 절정이야. 특히 단혼사의 괴인은 진경이다. 나 혼자 다 못 막아.
“헉, 진경? 저야 무조건 부주의 뜻을 따를 겁니다.”
상황 파악이 끝난 귀영이 무한에게 착, 달라붙었다.
일조장이 당전수의 포승줄도 끊어주었다.
혈사대주와 무한간의 협상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사이 단혼사의 괴인이 천천히 걸어와 고우의 머리를 던졌다.
휙!
고우의 머리가 마당가에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에 꽂혔다.
“잔인한 놈…….”
귀영이 몸서리쳤다.
단혼사의 괴인이 머리의 두건을 젖혔다.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뜻밖에도 무척 준수한 인물이었다. 방금 사람의 머리를 나뭇가지에 꿴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느낄 수가 없었다.
단혼사의 노인이 무한을 주시하며 물었다.
“네가 심무한이로구나.”
백발노인을 보는 순간, 무한은 앞서 잡았던 늙은이들이 떠올랐다.
손우자의 심복들은 이상하게도 괴이한 수법을 쓰는 노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손우자의 의도를 깨달았다.
‘애초에 모두 죽이고 흑천의 짓으로 꾸미려 했던 거야.’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가 완벽한 뒷마무리 자리가 될 것이다.
자신과 당전수 등을 죽이고 혈사대까지 해치운 후 동귀어진 한 것으로 꾸미면 끝이니까.
그런데…….
백발노인의 다음 말은 예상 밖이었다.
“네가 심무한이냐? 뒤로 물러나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