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천목투심술을 수련하는 와중에도 귀영과 남궁우가 소곤거리는 소리도 다 들렸다.
“저쪽이 도천부 후계자라면 주군은 검천부주고 당전수는 당가 소가주야. 그 후환을 도천부가 감당할 수 있다고? 고우가 그렇게 어리석을까?”
귀영은 아무래도 고우가 살인멸구를 노릴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귀영의 말에 남궁우가 한마디 했다.
“귀 호위는 지체 높은 사람들의 세상을 모르니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흥. 남궁세가 출신이란 걸 뻐기고 싶은 모양이지?”
“만일 남궁가 사람들이 귀 호위가 내게 하는 걸 봤다면 어찌했을 것 같아?”
귀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하다니…… 우리는 동료잖아. 똑같은 특임감찰 호위라고.”
“그건 귀 호위 생각이지. 남궁가 사람들은 일개 호위가 남궁세가의 지낭에게 선배 대접 하라고 윽박지른 걸 알면 그 자리에서…….”
남궁우가 목을 스윽 긋는 시늉을 하자 귀영은 기분이 나빠졌다.
당전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무한 형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이번 일이 퍼지면 고우는 도천부 후계자에서 밀려날지도 몰라요.”
당전수의 말까지 듣고 나니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귀영이었다.
“흥! 그럴 생각이 있어도 실행은 할 수 없을 걸. 그날 괴인들을 쓸어버린 사람이 누군지 봤으면 말이야.”
귀영이 무한을 보며 말했다.
나이 어린 주군이 이런 고수라니.
든든하다.
“제정신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어리석은 짓을 할 수도 있다고.”
흐뭇해하는 귀영에게 남궁우가 다시 찬물을 끼얹고는 불상 뒤로 들어갔다.
“나는 여기서 잘래.”
불상 뒤에 숨는 남궁우를 보고는 찜찜한 귀영이 정문 대신 고우가 있는 뒷문 쪽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
멀리 어둠 속에서 불빛이 깜박인다.
땅에 떨어진 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객은 바위틈에 기대어 그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질녘 무한이 섰던 바위 아래 틈이다.
불빛은 무한 일행이 들어간 폐사찰 깨진 창문으로 새어 나오고 있다.
‘우연이 아니야.’
강변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정확히 자신이 있는 쪽을 보았다.
고유의 은신술이 아니었다면 발각되었을지도 모른다.
‘크크크. 재밌는 놈이야. 대체 어떻게 느끼는 거지?’
살을 에는 겨울바람도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눈 속에서 사흘을 숨어 있을 수 있는 그다.
처음에는 우객에 대한 복수였다. 그렇다고 우객과의 사이가 목숨을 걸고 복수할 정도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저 할 일이 필요했다. 어쩌면 우객과 바둑을 둘 수 없으니 대신 시간을 보내야 할 일이 있어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한을 쫓다보니 흥미가 생겼다.
‘저놈들…… 저놈들은 또 어떻게 쫓아온 거야.’
운객의 시선이 폐사찰 아래 계곡 깊숙한 어둠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밝힌 불빛이 은은하다.
그보다 더 뒤쪽에 있는 무리는 아예 불을 피우지 않았다.
무한 일행을 쫓는 패거리는 둘이다.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쫓는 자들의 솜씨가 너무나 놀라웠다. 만일 그 이상의 추적자라면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는 가정을 열어둬야 했다.
“뭔 짓을 하면 저리 많은 놈들이 쫓는 걸까?”
***
“형님, 그냥 지금 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퉁방울 같이 튀어나온 눈을 한 혈사대주가 우사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너무 시간 끌면 파리 떼들이 달라붙습니다.”
강변에서 벌어진 혈사(血事)는 근래 드문 대형사건이었다. 무림에 소문이 퍼지는 건 잠깐이다.
당가는 물론 천하방에서도 소식을 듣고 지원대가 출발했을 것이다.
혈사대주는 신속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고 싶다. 그러니 너무나 조심스레 행동하는 우사가 못마땅했다.
“그러면, 저놈들은 어떡할래? 저놈들 만만치 않아. 딱 보면 알아.”
“대체 뭘 안다는 겁니까? 이러다가 당가에 도착할 때까지 뒤만 졸졸 쫓다 끝나겠습니다.”
혈사대주가 차마 욕은 못하고 볼멘소리로 반박했다.
우사가 사사천주 피진격이 아끼는 심복 오사(五邪)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벌써 들이박았을 것이다.
‘명색이 대주인 내가 직접 나왔는데 쥐새끼처럼 염탐만 하고 있다니.’
흑천 혈사대라면 알아주는 무력대다.
피진격이 직접 콕 찍어 보내지 않았다면 절대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을 신분인데 지금 얼어붙은 산속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빠드득.
혈사대주가 이를 갈았다.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추운 건 추운 거다.
그런데 우사는 한가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난 저놈들 정체가 더 궁금해. 대체 어떤 놈들일까? 누구를 노리는 거지?”
“그게 왜 궁금한 겁니까?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혈사대주는 우물거리는 눈앞의 우사부터 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소심한 우사는 진경의 고수다. 저런 성격으로 진경에 이르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실력만큼은 진짜다.
“형님, 천주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거 잊으셨습니까? 형님은 그냥 저지르면 된다고요. 그래도 남보다 열 번은 더 신중한 행동이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그랬지.”
우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혈사대주가 옳다구나 하고 폐사찰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올라가서 치자고요.”
“그건 안 돼.”
이번에는 우사가 고개를 저었다.
“왜요?”
“말했잖아. 저놈들 보통이 아니라고.”
우사가 계곡 위쪽의 은은한 불빛을 가리켰다.
“저놈들이 대체 뭐라고요.”
“모두 일곱인데…… 모두 절정이상이라고. 게다가 그중 하나는 나도 자신하기 어려운 고수야.”
우사의 말에 혈사대주가 하, 하고 기함하였다.
‘일곱 명이 절정고수 이상이라고? 문파 하나가 총출동했다는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우사가 말한 전력이면 중견문파의 수준이다. 그런 놈들이 이 밤중에 산속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숨어 있을 이유가 없다.
혈사대주는 대책 없는 우사의 걱정 병이 도졌다고 확신했다.
당전수 일행이 대단한 고수들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애송이 몇 명에 불과하다.
자신이 직접 이끄는 혈사대 삼개조라면 순식간에 제압하여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말씀해주시죠. 계속 이러고 다닐 수는 없잖습니까?”
우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놈들…… 마치 우리가 손을 쓰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아?”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저놈들을 따라가면 당전수를 잡을 거라고 하신 건 형님이십니다.”
“그랬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너무 공교롭지 뭐야. 우리가 애송이들을 놓치고 헤맬 때 저놈들이 딱 눈앞에 나타났어. 그리고 인도하듯 우리를 끌고 여기까지 왔지.”
우사의 작은 눈이 애송이들이 있는 사찰과 추적자들이 은신하고 있는 곳을 번갈아 봤다.
“지금도 마치 우리가 애송이들을 덮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우사가 검지를 내밀어 혈사대주를 콕, 찍어 가리켰다.
“네가 애송이들을 치면 저놈들이 뒤에서 덮칠 거란 생각은 안 해?”
“저놈들이 호위라고요?”
우사의 머릿속은 어디까지 갈래 치는 걸까? 혈사대주는 머리를 쪼개 열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딱 봐도 좋지 않은 의도로 쫓는 거 모르십니까?”
“그렇다 해도 우리가 애송이들을 잡아가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혈사대주는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일단 하루만 더 지켜보자.”
우사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늘 알 수 없는 불안 걱정에 시달리는 그는 밤이면 어딘가 사라졌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나타난다. 자신의 잠자리마저 노출하지 않는 강박증 환자다.
혈사대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일조장이 속삭여왔다.
“그냥 우리끼리 치죠?”
혈사대주도 이미 결심을 굳힌 뒤였다. 일조장의 어깨를 짚으며 나직하게 귓속말을 전했다.
“네가 일조와 삼조를 데리고 뒤로 빠졌다가 우회해서 애송이들을 쳐라. 내가 이조를 이끌고 저기 중간 길을 지키겠다. 저놈들이 혹시라도 공격하면 저지할 테니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라.”
“우사 형님은…….”
“싸움이 벌어지면 싫어도 참전하겠지.”
“그때도 우물쭈물하는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만으로도 충분하잖아? 그런 눈짓을 보내고 혈사대주는 자신의 애도를 움켜쥐었다.
일조장은 곧바로 삼조장을 찾아 지시했다.
“오늘 저놈들 잡는다.”
삼조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그랬어야죠.”
삼조장이 자신의 조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야수들에게 먹잇감을 졸졸 쫓기만 하라는 게 말이 안 되죠. 그건 개나 하는 짓이지.”
혈사대원들이 일제히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겨울 산속을 헤매는 것보다 피가 튀는 싸움이 더 낫다는 뜻이다.
***
천목혈 무한한 공간을 유영하던 무한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기운을 끌어올려 집중했다.
‘백 장?’
생각보다 먼 거리였다. 거기까지 감지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산속이었고 마침 수련이 잘 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무한이 슬며시 일어나자 졸고 있던 귀영이 황급히 도를 들고 휙, 일어섰다.
귀영의 칼은 고우가 있는 전각 쪽을 향했다.
“그쪽이 아닙니다.”
무한이 불전 밖으로 나가서 마당에 섰다.
달도 없는 밤이다. 그럼에도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눈과 검은 숲이 내려다보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파른 기슭을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무한과 귀영이 움직이자 당전수와 남궁우도 깨어났다.
“어떻게 쫓아왔지?”
검을 챙겨 나온 남궁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산에서 산으로 흔적을 지워가며 왔는데도 귀신같이 따라붙다니.
그사이 꽤 올라왔는지 천목투심술을 펼치지 않고도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무력대로군.’
움직이는 방식이 일사불란한 것이 잘 훈련된 무력대였다.
“저번에 온 놈과 달라.”
무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고우와 마철립이 불전 뒤쪽 전각에서 다가왔다.
긴장한 얼굴의 고우는 이미 도를 빼어 들어 당장이라도 휘두를 듯 주위를 살폈다.
무한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거친 웃음이 들려왔다.
“크흐흐. 기다리고 있었구나. 귀는 밝은 놈들이로군.”
허물어진 담 사이로 검은 인영들이 날아들었다.
“신분이 대단한 놈들이라지 않은가. 얼마나 영약을 처먹었겠어. 내공이 빵빵하겠지.”
“그래봐야 배때기 쑤시면 벌벌 떨며 살려달라고 똥오줌 갈기더라고.”
우락부락한 인상에 말하는 품새들이 딱, 흑도였다.
기세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상스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
무한이 피식 웃었다.
이쪽이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하여 벌이는 심리전이 가소로웠다.
“웃어? 너부터 조져주지.”
혈사대 삼조장이 칼을 세우는데 일조장이 막으며 앞에 섰다.
“굳이 피 볼 생각 없다. 심무한과 당전수가 누구냐? 죽이지 않을 테니 따라 와라.”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가볍게 손짓까지 하였다.
“웬 놈들이냐? 감히 천하방 도천부를 기습하다니.”
고우가 툭, 나서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세 좋게 호통을 쳤지만 손은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흐흐. 네가 고우구나. 네가 바로 흑천 혈사대 일조장이다.”
일조장이 신분을 밝혔다.
“감히 흑천 놈들이…….”
고우가 대거리하는데 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천이 나를 왜?’
빠르게 다가오는 기운은 한둘 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