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손우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화경의 고수들을 하나하나 대입해봤으나 이 상황에 맞는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 가능성을 짚어보았다.
‘무한, 그놈의 무위가 초절정 혹은 진경이라면…… 암중호위와 연수하여 잔노와 천잔사괴를 해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가설은 한 사람에 의해 잔노와 천잔사괴, 천잔대 절반이 무너졌다는 현장 감식 결과와 배치된다.
손우자가 미간을 문지르며 최초 가설로 돌아왔다.
그는 무한의 무공이 진경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화경의 무위를 지닌 암중호위…… 그놈부터 잡아야 하는 건가.’
화경을 잡으려면 적잖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환노(幻老)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손우자가 사필염의 보고서를 책상에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
스르륵.
검은 그림자 하나가 창문을 밀고 들어와 손우자의 책상 위를 살폈다.
그리고 다시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말 눈 한 번 깜작할 사이였다.
잠시 후.
천하방 어딘가에서 뜬금없이 매가 솟아올랐다.
한밤중에 매라니.
어두운 정원을 산책하던 손우자가 밤하늘 멀리 날아가는 매를 보았다.
매는 흑천이 있는 남쪽으로 날았다.
***
창문이 활짝 열린 널따란 방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이닥쳤다.
방 상석 단상에 잘생긴 중년인이 정좌를 한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중년인의 머리 위에 검은 연기가 일렁거리다 어느 순간 코를 통해 몸으로 들어갔다.
이어 중년인이 눈을 뜨자 흰자위가 없이 온통 검은 눈이 번득였다.
잠시 후 서서히 흰자위가 돌아와 정상 눈동자가 되자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인이 손짓을 하자 활짝 열려 있던 창문들이 기운에 이끌려 저절로 닫혔다.
이어 손가락을 튕기자 사방에 있던 등에 불이 붙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서른 중반 가량의 창백한 낯빛의 사내가 들어섰다.
“납득, 무슨 일인가? 수련 중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급한 보고가 올라와서 급히 와야만 했습니다.”
“말해 봐.”
중년인, 사천주 피전격이 책상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당전수를 잡으러 보냈던 우사(優邪)로부터 보고가 왔습니다.”
피전격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놓쳤다는 건가?”
잡았으면 바로 당전수를 확보했다고 말했을 납득이다.
“그게…… 도착했을 때 이미 싸움이 끝난 뒤였답니다.”
피전격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싸움이라니? 당전수가 누군가와 접전이라도 했다는 말이냐?”
“현장을 분석한 결과 어떤 세력으로부터 기습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전수는 어찌 됐고?”
“도주한 듯합니다. 그런데 천하방 도천부 후계자 고우와 검천부주 심무한이 동행하고 있었답니다.”
피전격이 인상을 썼다.
“뭐? 도천부와 검천부가 동행을 했다고? 그 중요한 이야기를 내가 왜 이제 안 거지?”
“천하방이 내부 밀정 단속에 들어가는 바람에 흑선의 첩보수집이 원활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천하방 군사부와 같은 조직이 흑천의 흑선이다.
“흑선수사, 그놈의 농간이 아니고?”
흑선을 이끄는 흑선수사 단조는 사사천보다 흑월에 기울어져 있는 놈이다.
“그건 아닌 듯합니다. 제가 심은 밀정들도 연락이 끊겼습니다.”
“으음.”
피전격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도천부와 검천부가 호위를 하고 있었다면 당전수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그게…… 좀 이상합니다.”
납득이 우사로부터 받은 보고를 보충설명했다.
보고를 들은 피전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일백의 괴인이 습격을 했는데 도천부와 당가의 희생자는 합쳐서 마흔도 안 된다? 역시 천하방 정예는 맞는 모양이군.”
납득이 무거운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그게…… 죽은 자들 절반이 한 명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 네 명은 강기의 고수 같더랍니다.”
피전격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기의 고수가 넷이나 습격에 가담했다고? 그게 말이 되나? 확실해?”
“우사의 보고입니다.”
꼼꼼하기라면 세상에 따를 자가 없는 우사의 보고라면 믿을 만하다.
“으음.”
피전격이 침음성을 흘렸다.
강기를 쓸 줄 아는 고수라면 아무리 못해도 일문의 장로급 이상이다.
그런 자들이 뭐가 아쉬워 기습을 할까?
피전격이 보고 내용을 헤아리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강기를 쓰는 네 명이 한 놈에게 당했다고? 그러면 화경 급의 고수가 있었다는 뜻이잖아? 그게 누군데?”
납득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입수한 당전수 일행의 명단에 화경 급의 고수는 없었다.
피전격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 고우가 아닐까?”
그나마 유력한 후보가 도천부 후계자라는 고우다.
납득이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고우가 정파의 기재라는 구룡의 수좌이기는 하지만…… 화경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암중에 누군가 호위하고 있다고 봐야지요.”
“이거 참. 갑자기 화경 급의 고수라니…….”
파전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흑천의 사천 공략을 주도하고 있는 피전격의 입장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화경의 고수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천하방에 화경의 고수가 몇이나 될까?”
“도왕과 권왕을 제외하고 대략 두세 명은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으음. 우리가 당전수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그러다 누가 당전수 일행을 습격했는지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납득은 이번에도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게……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죽은 괴인들은 아무런 표식도 없고, 무공 또한 복잡하여 소속을 짐작하기 어렵답니다.”
“우사, 이놈은 늘 쓸데없는 걱정만 하고 다니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피전격이 우사에게 화풀이 하자 납득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의외의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피전격이 짜증난다는 듯 물었다.
“흑월주의 호위 무흔의 소재가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천하방에 의탁하고 있었더군요.”
“무흔이?”
피전격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무흔이 소향을 배반했다고? 확실한가?”
“배반인지 잠입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지난 팔 년여 흑월주를 감시했으나 무흔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천하방에 사달이 나며 흑선 소속 연이설의 정체가 드러났지요. 그 와중에 무흔의 행적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천하방에서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검천부 후계자 심무한의 호위 노릇을 하고 있었더군요.”
“검천부?”
피전격의 안색이 살짝 흔들렸으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납득은 알아채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피전격이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소향은 아직 난주에 있지?”
“예.”
“…….”
다시 흐른 침묵을 피전격의 나직한 목소리가 갈랐다.
“심무한이 느닷없이 나타난 심양조의 손자 맞지?”
“그렇습니다.”
피전격의 얼굴에 살기가 솟았다.
“놈에 대한 정보도 있나?”
납득이 그간 수집한 심무한에 대한 보고서를 떠올렸다.
“심양조 사후 심씨사당을 지키다…… 이년 전 열여섯 살에 심양조의 유전을 물려받았습니다.”
“놈이 당전수와 동행하고 있다고?”
“예.”
“잘됐군. 그놈도 잡아와. 당전수와 심무한 둘 다.”
“고우는 어찌할까요?”
“화경의 고수일지도 모른다며. 암중호위가 있거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피전격이 곰곰 생각을 했다.
흑천노조의 허락도 없이 천하방주 도왕의 손자 고우까지 납치한다는 건 아무래도 부담이 된다.
“걔는 그냥 둬.”
납득은 심무한을 납치하는 것조차 부담이 된 듯 염려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심무한을 잡아오면 천하방과 전면전을 벌여야 합니다.”
“흥! 마천이 감숙에서 영역을 넓히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우리와 전면전을 할 수는 없지.”
“하지만…….”
“이미 끈 떨어진 놈이라며. 도왕이 그런 놈 때문에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을 거야.”
피전격의 말에 납득이 고개를 조아렸다.
***
일행은 며칠간 산에서 산으로 움직였다.
길도 없는 험한 산을 탔기에 무공을 익힌 일행도 지쳐갔다.
요산자와 함께 산천을 주유했던 무한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길을 갈 뿐이다.
“쉬었다 가자. 제아무리 추적자가 있다하더라도 지금쯤은 나가 떨어졌을 거야.”
고우가 털썩, 바위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언제까지 산길을 타야 하는 거야?”
남궁우도 지친 다리를 주무르며 물었다.
무한은 대꾸하지 않고 커다란 바위에 올라 지나온 길을 보았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왠지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천목투심술로 집중하여 바라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예민해진 건가?’
지난 며칠 신경을 곤두세우긴 했다.
무한이 시선을 돌리다 맞은편 산중턱에서 멈췄다.
눈 덮인 산기슭에 전각들이 보였다.
“오늘은 저기서 묵는 게 좋겠어.”
“저거 폐사찰 같은데? 찬바람은 피할 수 있겠네.”
남궁우가 반색하여 일어났다.
일행이 계곡을 건너 사찰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넘어간 뒤였다.
사찰은 그리 크지 않았다. 요사채 등은 대부분 무너지고 불전만 간신히 지붕을 이고 있었다.
불상 위 지붕은 뚫려 있어 비라도 오면 그대로 새어들 것만 같았다.
귀영이 나뭇가지를 챙겨와 불상 앞에 불을 피웠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지.”
고우가 마철립을 향해 눈짓을 하였다. 두 사람은 불전 뒤 허물어진 전각으로 갔다.
고우는 따라오면서도 일행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아니면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았는지 당전수를 특히 꺼렸다.
“흥! 여기까지 와서도 고고한 척하는 거야 뭐야.”
귀영이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무한이 사라지는 고우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사람은 때로 체면에 목숨을 걸기도 하지.”
“저놈은 그럴 놈이 아닙니다. 그때 보셨잖아요. 혼자 살겠다고 도주하던 걸.”
“그걸 본 사람이 있으니 문제지.”
무한은 고우에게서 이따금씩 풍기는 살기를 느끼는 중이다.
이해는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예?”
귀영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묻자 남궁우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머리를 좀 써보라고. 고우 같은 자가 자신의 치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
“뭘 어떻게…… 설마, 살인멸구? 에이, 너무 나갔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동료를…….”
무한이 귀영을 보았다.
네가 고우의 동료냐는 눈빛에 귀영이 움찔했다.
“오늘은 귀 호위가 첫 불침번 순서죠?”
무한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강변에서의 싸움 이후 천목혈이 계속 깨어 있다.
처음에는 네 명의 괴인들과 생사가 갈리는 싸움에서 강렬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 여겼는데 이후로도 열려 있어 스스로도 의아해하는 중이다.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나?’
무한은 눈을 감고 자는 척하며 천목혈에 의식을 집중했다.
강변의 혈투 이후 밤마다 본능적으로 천목투심술을 수련하고 있다.
열려 있는 천목혈은 마치 검은 밤하늘처럼 깊고 어두웠다.
무한은 의식을 집중하여 천목혈에 담고자 하였다.
점차 호흡이 가늘고 길어지며 의식이 영겁너머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의식의 한 조각이 자신의 감각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조식과 선정에 들되 깨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