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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12화 (112/250)

112화

오대세가를 규합해서라도 천하방과 일전을 벌이겠다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무사히 당가까지 가는 게 우선이야. 그래서 말인데 당 장로의 시신을 표국에 맡기는 게 어떨까?”

“그럴 수는 없어.”

당전수가 반발했다.

“당 장로도 구천에서 네가 무사히 귀가하는 걸 원할 거야.”

무한은 배후가 손우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강호에서 손우자에 대한 신망은 무척 높다.

“비겁자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게 적이 원하는 거라는 생각을 안 해?”

“……?”

“적이 노리는 건 우리 모두의 목숨이야. 특히 너는 반드시 죽이려 들 거야.”

“대체 왜 나를 노리는 건데?”

“그래야 당가를 자극할 수 있으니까. 네가 죽으면 당가는 폭주하겠지.”

무한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 결과로 당가가 몰락할 수도 있어.”

“어림없는 소리!”

“자신하지 마. 단언컨대 원흉은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너를 노리는 거야.”

“…….”

“표국에 당 장로 시신을 맡겨. 정 걱정이 되면 호위에게 함께 운구하라고 해.”

당전수가 한참 생각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

당가의 소가주로 이런 지경에 처하리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고우보다 영리했다.

무한의 제의를 받아들여 표국을 찾아 당현전의 시신을 맡기고 남은 호위 한 명에게 표행과 함께 오라고 일렀다.

무한은 의원을 찾아 장교명과 공우를 맡겼다.

“죄송합니다. 따라가야 하는데.”

“걱정 말고 일단 상세부터 회복하세요. 거동할 수 있게 되면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고요.”

무한이 이르고는 객잔으로 돌아왔다.

귀영과 남궁우는 당전수와 함께 출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철립은 고우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함께 가야 합니다. 지금은 체면 차리실 때가 아닙니다.”

“아니! 지원대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해.”

남궁우가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방을 쳐다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일개 무인보다 못한 놈이 도천부 대공자라니…….”

귀영도 혀를 찼다.

“나도 저렇게 한심한 놈인 줄은 몰랐어.”

무한이 당전수에게 일렀다.

“밤이 되면 떠나자. 말은 두고 갈 거니까 짐은 간단히 챙겨.”

일행은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배다리를 건넌 다음 무한은 하류 쪽 산길로 향했다.

“당가로 가려면 저기 관도로 가야 하는 거 아냐?”

남궁우가 묻자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하류로 우회해서 갈 거야.”

당전수가 이의를 제기했다.

“하류라면…… 흑천의 영역이 너무 가까워.”

“위험을 감수해야지.”

손우자보다 흑천을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무한이다.

“흉수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지?”

남궁우가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천하방에 내분이 생긴 거야. 그렇지?”

무한은 대답 대신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고우와 마철립이다.

“비겁한 놈들! 일행을 버리고 도주하다니.”

멀리서 고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귀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양손을 벌려 보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답 없는 인간이네.”

잠시 후 다가온 고우가 말했다.

“함께 출발했으면 끝까지 같이 가야지. 너희만 살겠다고 가다니…….”

무한은 대거리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가자!”

몸을 돌려 신법을 펼쳤다.

“저 새끼…….”

고우가 버릇처럼 욕을 하려다 삼켰다.

정신이 들고난 뒤 그도 무한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방으로 돌아가면…… 군자의 복수는 십년도 늦지 않다고 했어.’

그때 가서 이 수모를 되갚아 줘도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마철립은 고우의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어찌됐건 그가 모시는 사람이다.

“가시죠. 공자.”

고우를 재촉하여 무한 일행을 뒤따랐다.

귀영이 무한의 뒤를 바짝 쫓으며 물었다.

“저놈들을 달고 가실 겁니까?”

신법을 극성으로 펼쳐 떨쳐버리자는 소리다.

무한이 뒤를 슬쩍 돌아봤다.

고우가 가볍게 뒤를 따라붙고 있다. 실전에 약해서 그렇지 무공이 아주 허접한 건 아니다.

“따라오게 둬요.”

무한은 정말 괴인들이 고우까지 해칠 생각이었을까가 궁금했다.

다시 한 번 공격을 받으면 손우자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런! 대체 어떻게 경계를 섰기에…….”

대노한 변위초가 뇌옥장을 향해 호통을 쳤다.

무한이 인계한 당가장로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자결했다.

“분명 쇠사슬로 결박하고 내공을 폐하고 혈도까지 짚어 두었습니다. 입에 재갈까지 물렸는데…….”

“그런데 어떻게 죽었단 말이냐?”

뇌옥장도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살펴봐도 어찌 죽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총군사께서 오셨습니다.”

무사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변위초가 인상을 썼다.

집법당의 위신이 말이 아니다.

“뇌옥까지 올 것 없으니 내가 나간다고…….”

변위초가 뇌옥을 나가려는데 이미 손우자가 지하뇌옥으로 들어섰다.

“총군사가 누추한 곳까지 무슨 일이시오?”

손우자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 죽은 추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피의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면목 없게 됐소.”

변위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집법당주를 맡은 이후 이런 수모는 처음이다.

“심문 결과는…… 밝혀진 게 있습니까?”

“도통 입을 열지 않았소. 지독한 자요.”

손우자의 시선이 고문으로 다 빠진 추노의 손톱에 머물렀다.

“제가 한번 살펴보지요.”

손우자가 추노의 시신을 검안했다.

잠시 후.

“죽음은 때로…… 많은 것을 알려주지요.”

손우자가 추노의 왼쪽 어깻죽지의 문신을 가리켰다.

‘어? 저런 게 언제 생겼지?’

추노를 인계받은 후 옷을 모두 벗겨 알몸으로 만든 뒤 모든 걸 기록한 뇌옥장은 어깻죽지에 새겨진 작은 뱀 문신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뭐라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손우자가 가볍게 탄식을 하며 일어서더니 말을 이었다.

“이자는 만성독약을 복용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건…… 해약을 제때 먹지 못하면 독성이 발휘되어 죽음으로 이르는 약일 겁니다.”

실제로는 잔노의 솜씨다. 추노가 순순히 받아들였기에 자결한 것으로 보였을 뿐.

그러나 손우자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아!”

변위초가 가볍게 탄성을 흘렸다.

잡혀서 해약을 먹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독약이라니.

“이 문신은 흑천 사문(蛇門)의 표식입니다.”

손우자가 혼란스러워하는 뇌옥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어서 혈액이 응고되어야 비로소 나타나는 문신이니…… 아마 살아 있을 때는 몰랐을 거요.”

“과연…….”

변위초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자마자 바로 사인과 정체까지 밝혀내다니.

손우자가 탄식을 하며 일어섰다.

“흑천의 수법이 참으로 지독하군요. 마천이 감숙까지 진출한 이때 흑천까지 본방을 노리다니.”

변위초의 안색도 침중하게 굳었다.

“마천에 이어 흑천까지 준동한다면 그야말로 심각한 일 아니오?”

“어쩌면 천하제일령을 발동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천하제일령(天下第一令).

과거 구파와 오대세가가 심양조를 천하제일인으로 추대하며 건넨 영패.

단 한 번뿐이지만 천하제일령이 떨어지는 순간, 구파와 오대세가가 따르겠다고 약조했다.

변위초는 놀란 얼굴로 손우자를 쳐다봤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천하제일령을 발동한다는 건 중원 무림을 소집한다는 뜻이다.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변위초는 뜬금없었다.

감숙에서 마천의 세력이 확장되고, 흑천이 호전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무림에 이렇다 할 중대 변고는 아직까지 없다.

“천하제일령이라면 정마대전 같은 상황이어야 발동이 가능하지 않겠나?”

“마천과 흑천이 동시에 발호한다면 정파는 정마대전보다 더한 곤욕을 치를 것입니다.”

손우자가 탄식을 하였다.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군사부로서는 대응방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렇겠지.”

그게 군사부의 일이기도 하니까.

“흑천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조사해봐야겠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변위초는 뇌옥을 빠져나가는 손우자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어깨에 실린 무거운 짐을 느낄 수 있었다.

“건강도 살피시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손우자를 위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마디를 보냈다.

뇌옥 문을 나서던 손우자 슬쩍 돌아보고는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손우자가 군사부로 돌아오자 이군사 사필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가로 향하던 당 소가주 일행이 피습을 당했답니다.”

손우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피해는?”

“무인들 대부분을 잃었답니다. 당 소가주와 고우 공자, 심 특임감찰 외 몇 명만 남은 듯합니다.”

“흉수는 밝혀졌는가?”

“아직 조사 중입니다. 무려 일백에 가까운 괴인들이랍니다. 그런 세력을 키울 만한 곳은 많지 않습니다.”

“당 소가주 일행은 어디 있나?”

“그게…… 종적을 감췄습니다만 당가로 향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그럴 테지. 공격이 이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

손우자가 피곤한 듯 검지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도천부와 검천부에 상황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게.”

“방 차원에서 무력대를 지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흉수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방이 나서면 파장이 클 걸세.”

“그렇겠군요.”

사필염이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로도 전서구를 날려 상황을 전하게.”

사필염이 나간 뒤에도 손우자는 의자에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였다.

‘천잔대를 잃은 건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뜻밖이기는 했다.

천잔대가 몰살당하고 천잔사괴와 잔노까지 당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당전수나 고우의 무위는 익히 알고 있다. 변수라면 역시 무한이다.

손우자가 주목하고 있는 건 무한의 호위다.

강유가 붙여 줬다는 무한의 호위에 대해 잔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은연중 잔노의 죽음을 기대하고 있었나?’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그러지는 않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암중호위의 무공이 그 정도라는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야. 나 역시 마찬가지지.’

손우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도 몰랐다. 그래서 상황에 비추어 판단했다.

그렇게 잔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떨친 손우자는 강변에서 벌어졌다던 싸움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잔노는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준 뒤 그냥 밀어 붙여버리는 성격이다.

‘도천대와 당가의 무인들은 천잔대를 저지할 수 없지.’

고우와 당전수, 무한…….

무한의 무공이 알려진 이상이라는 경고는 잔노에게 주었다.

군사부에서 수집한 무한의 무위는 절정에 달했고, 이는 손우자마저 놀라게 했다.

잔노는 이에 대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천잔사괴까지 투입했다는 건 무한의 암중호위가 등장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암중 호위가 잔노와 천잔사괴를 해치울 수 있을까?’

손우자로서도 의문이다.

천잔사괴와 잔노를 제압했다면 화경의 고수라는 뜻이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화경의 고수가 호위라니.

화경을 이룬 고수가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상상키 어렵다.

‘강유, 도대체 누굴 붙인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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