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왜들 이래? 우리끼리 이러지 말자고. 고수가 노리고 있는 거 몰라? 이러면 상대의 수에 넘어가는 거라고!”
남궁우가 양 진영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두 손을 휘저었다.
“상대가 이렇게 얕은 수를 쓴 이유가 뭔지 알아? 서로 믿지 못하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귀영이 남궁우를 보며 기가 막혀하였다.
‘네놈이 반말을 찍찍거려서 이 사달이 난 거잖아?’
뻔뻔하게도 남궁우는 모두를 훈계했다.
“정신 차리라고. 적들이 간과한 게 있어. 우리에게는 놈들을 잡을 기회가 있다고.”
“그게 뭔데?”
귀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궁우가 자신을 가리켰다.
“바로 나! 남궁세가의 지낭 남궁우가 여기 있다는 걸 간과한 거지.”
이번에는 귀영뿐만 아니라 모두가 입을 딱 벌렸다.
뻔뻔한 놈이다.
당전수가 어이없어 물었다.
“네가 남궁세가의 지낭이라고?”
“그래. 못 들어봤나? 같은 세가 사람으로서 섭섭하군. 아무리 사천과 황산이 멀다지만 남궁지낭이라는 별호를 모르다니.”
남궁우의 신분이 드러나자 모두가 놀랐다.
비록 방계라지만 남궁지낭이라는 별호는 가주가 직접 내린 것이니만큼 무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남궁지낭이 왜 여기에…….”
“아, 내가 이번에 특임감찰 호위가 됐거든.”
남궁우가 무한을 슬쩍 보며 말했다.
“굴러들어온 복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긴 하지만 차차 깨닫게 되겠지.”
무한은 남궁우의 뻔뻔함에 기가 찼다.
“고 대공자 때문에 못한 말을 계속 하지. 눈에 발자국이 없다는 건 답설무흔의 경지에 이른 고수라는 거야.”
“답설무흔? 화경의 고수란 말이야?”
“으음. 꼭 화경의 고수만 답설무흔을 펼칠 수 있는 건 아냐. 특별한 신법을 지닌 사람은 눈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있지. 하지만 적어도 초절정은 이뤄야 가능해.”
“그럼 흉수가 초절정고수란 말이야? 그런 고수라면 정공으로 나와도 상대할 자가 없을 텐데?”
“그건 여기에도 초절정고수가 있기 때문이지. 심 부주가 초절정고수거든.”
남궁우가 무한을 가리켰다.
그러자 고우가 피식 웃었다.
“삼재검수가 초절정이라고?”
남궁우가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삼재검수의 옷깃조차 잡지 못하고 허접한 춤을 추다 비틀거린 사람이 누구더라?”
“이 새끼가!”
고우가 발끈했으나 남궁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적의 의도는 확실해. 우리를 다 죽일 거야.”
남궁우의 말에 마철립이 코웃음을 쳤다.
“흥! 걱정 마십시오, 대공자. 저희가 목숨을 걸고 놈을 잡겠습니다.”
비록 암습에 당했지만 도천대 이개조라면 두려울 게 없다.
“으음. 용기는 가상한데 머리가 따르지 않나보네. 지금 상황을 보면 몰라? 우리는 사냥감이라고.”
남궁우가 말하자 무한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공포!”
남궁우가 잘라 말했다.
“너희 지금 두렵지? 겉으로 안 그런 척하지만 은근 떨리잖아. 오늘 밤 혹시 내가 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들지?”
마철립이 코웃음 쳤다.
“허튼 소리. 도산검림에서 살아온 도천대다. 죽음을 두려워할 자는 없다.”
“아니라고? 지금 시신을 가지고 와서 당가를 닦달하는 이유가 뭔데? 어제 너희가 그랬잖아. 이건 분열을 획책하는 거라며? 근데 오늘은?”
고우가 끼어들었다.
“당 소가주가 우리 해명을 믿지 않고 보복할 가능성도 있으니 확인하려 한 것이다.”
“소가주가 말했잖아. 당가라면 독을 쓰거나 암기를 사용한다고. 봐? 저게 독이나 암기에 당한 거 같아? 어제와 똑같이 칼에 당한 거잖아? 칼은 너희가 들고 있는 건데?”
고우가 반박을 못하자 남궁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포 때문이야. 공포 때문에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하면 공포가 사라질 거 같거든.”
“난 솔직히 별로 두렵지 않은데?”
귀영이 말하자 남궁우가 혀를 찼다.
“어제 당가, 오늘 도천부 그러면 내일은 어딜까?”
그 말에 귀영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남궁우가 귀영의 가슴을 콕, 찍으며 말했다.
“우리도 세 명을 죽인다면…… 너도 포함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
귀영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뭐, 아닐 수도 있어. 당가와 도천부를 이간질 한 걸 보면 저 둘부터 제거할 계획일지도 몰라.”
“왜 그리 생각하는 건데?”
당전수가 물었다.
“너희가 머릿수가 많잖아. 너희 두 세력이 합하면 마흔 명 가까이 되지. 게다가 당가 소가주와 도천부 대공자도 나름 고수라고 할 수 있잖아?”
병 주고 약 주는 남궁우다.
“나라도 일단 내부 분열을 일으킨 다음 흩어졌을 때 하나씩 해치우려 할 거야.”
“그래서 수색을 하지 말자는 거야? 그럼 어쩌자는 건데?”
“적은 음지에 있고 우리는 노출되어 있잖아. 이럴 때는…….”
남궁우가 강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속히 도주해야지.”
“뭐라고? 지금 나보고 도주하라고 한 거냐? 너, 남궁세가 사람 맞아?”
고우가 반발했다.
“너만 아니라 우리 모두 도주해야 한다고 말한 건데? 상황이 불리할 때 도주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고우와 도천대는 물론이고 당전수 역시 도주라는 말에 난색을 표했다.
당가의 체면이 달린 문제다. 소가주가 적이 두려워 도주했다는 게 알려지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한다.
“왜 이리 꽉 막힌 거지? 체면 차리다 죽을 거야?”
“비겁하게 사느니 죽는 게 나아.”
당전수가 대꾸하는데 무한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주할 필요 없을 것 같아.”
무한은 아직 안개가 남아 있는 강변 숲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이 왔어.”
모두 놀라 무한의 시선을 따라 숲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고우가 인상을 찡그리고 내뱉는 순간, 안개 속에서 서서히 사람들이 나타났다.
“포진!”
순간 마철립이 외쳤다.
도천대가 고우 앞에 진형을 갖춰 섰다. 수없이 전투를 치른 도천대는 굳이 이르지 않아도 지금 인원에 맞춰 최적의 진을 짰다.
세 명씩 조를 짜서 삼재진을 형성하고, 그 삼재진이 다시 삼재의 방위를 점했다. 진의 복판에는 도천대 이조장이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여섯 명은 고우를 중심에 넣고 육합진을 구축했다.
마철립은 두 진의 중앙에 섰다.
도천대가 진세를 짜는 사이 당가의 무인들도 당전수 주위를 에워쌌다.
“우리가 우측을 맡을 테니 너희가 좌측을 막아.”
무한이 당전수에게 말했다.
강변을 등지고 도천대가 중앙, 당가가 좌측을 막고 반대쪽 우측에 무한 일행이 섰다.
“오행진을 펼치자.”
남궁우의 제안에 무한이 가운데 서고 귀영이 좌측, 남궁우가 우측을 맡았다.
“두 사람은 뒤를 받치세요.”
남궁우가 장교명과 공우에게 말했다.
“왠지 섬찟해. 저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진을 짠 후 남궁우가 안개 속에서 드러난 이들을 살폈다.
유령처럼 서 있는 이들의 얼굴에는 칼자국이 수도 없이 나 있었는데, 그 수가 얼핏 보기에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
대도와 도끼 등으로 무장한 괴인들은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인들은 처참했던 동료들의 시신이 떠올랐다.
“저 새끼들이었어…….”
누군가의 목소리를 끝으로 침묵만 흘렀다.
“꿀꺽!”
고우가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로 민망했는지 고우가 소리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천하방 도천부에 도전을 하다니!”
나타난 무리들은 말없이 일행을 바라볼 뿐이다.
“정체를 밝히지 못할까!”
고우가 재차 호통을 치자 숲속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여라!”
단지 한마디였다.
순간 무리들이 땅에서 튕기듯 달려왔다.
“어어?”
고우가 당황하는 사이 도천대 무인들이 칼을 앞세웠다.
당가의 무인들 역시 암기를 꼬나 쥐며 다가오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괴인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부딪혔다.
최초의 접전은 가운데 선 도천대였다.
삼재진의 선두에 선 이조장이 앞장 선 괴인이 내민 칼을 쳐내고 가슴을 찍었다.
순간 상대가 그 칼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어엇?”
당황한 이조장이 칼을 비틀자 양손이 피범벅이 됐는데 괴인은 놓지 않았다.
그 순간 뒤따라온 괴인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도끼를 내리찍었다.
이조장이 사력을 다해 칼을 뽑아 도끼를 막았는데, 그사이 앞에 선 괴인이 피범벅이 된 손으로 이조장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크윽!”
이조장이 목줄이 잡히며 비명을 터트렸다.
순간 양쪽에 있던 조원들이 괴인의 양 옆구리를 칼로 쑤셨다.
그러나 괴인은 목줄을 쥔 이조장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입으로 이조장의 얼굴을 물었다.
“아아악!”
이조장이 비명을 터뜨리고 양옆을 보좌하던 무인들이 당황하여 연신 칼을 쑤셨다.
괴인은 허리가 동강이 나 내장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이조장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빠가각!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크윽!”
볼이 뜯긴 이조장이 비틀거리는데 뒤따라온 괴인들이 칼과 도끼를 내리찍었다.
카캉!
도천대 조원들이 이조장을 대신하여 칼을 받아냈으나 그 사이 도끼를 든 괴인이 이조장의 목을 갈겼다.
퍼억!
이조장의 목이 잘리며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끔찍한 광경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이뤄진 최초의 접전은 모두의 가슴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뒤이어 괴인들이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괴인들은 동귀어진을 서슴지 않았다.
팔 하나를 내주고 목을 따는 식으로 덤벼들자 도천대와 당가의 무인들이 당황했다.
“물러나지 마라! 밀리면 끝장이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마철립이 대원들을 독려했으나 초반 기세에서 이미 밀렸다.
도천대와 당가의 무인들, 무한 일행까지 합쳐 사십여 명에 이르렀으나 괴인의 수는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크윽!”
“컥!”
순식간에 삼재진의 선두에 섰던 세 명의 도천대 무인이 난자당했다.
괴인들은 쓰러진 무인들도 도끼나 칼로 마구 찍어 엉망으로 만들었다.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삼재진을 풀고 육합진으로! 손에 사정을 두지 마라! 일격에 해치워!”
마철립이 달려드는 괴인의 목을 치며 외치며 대원들을 독려했다.
당가도 고전을 하였다.
“있는 대로 퍼 부어. 접근하지 못하게 해!”
당전수가 외쳤고, 당가의 무인들은 독을 바른 암기를 던지며 거리를 두려 했으나 괴인들은 앞사람을 방패삼아 달려들었다.
무한의 일행에게도 십여 명의 괴인들이 들이닥쳤다.
서거걱!
무한이 달려드는 괴인의 칼을 피하며 목을 잘라냈다.
그러나 뒤따르던 괴인들이 도끼와 칼을 쭉 뻗었다.
카카강!
무한이 검으로 반원을 그리며 짓쳐 드는 도끼와 칼을 걷어냈다.
그러나 괴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무한의 양 옆에 있던 귀영과 남궁우는 물론이고 뒤를 받치던 장교명과 공우도 곧바로 접전에 들어갔다.
괴인들의 무공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게다가 생사를 도외시 하고 달려드니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이렇게 압도적인 전력을 지니고 있었으면서 왜 암습을 가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게다가 이들의 우두머리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다.
무한이 전황을 살폈다.
‘이대로 가다간 전멸이다. 일단 해치우고 보자.’
무공 수위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럴 계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