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나흘 째 되는 날 새벽.
무한은 살을 에는 추위에 깨어났다.
모닥불이 꺼져 있었다.
무한이 일어나자 뒤따라 장교명과 공우가 깨어나 모닥불에 잔가지를 집어넣어 불씨를 살리려 했다.
장교명이 귀영을 찾았다.
“불침번이 모닥불도 지키지 않고 어디를 간 거야?”
귀영이 마지막 불침번이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믿고 호위를 맡길 수 있나.”
또 다른 감찰관 공우가 영 미덥지 못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귀영 탓을 했지만 속내는 천하방 감찰조사관이 한겨울에 산속에서 노숙을 한다는 게 마뜩잖은 것이다.
남궁우도 뒤늦게 일어나 연신 팔다리를 뻗어 추위로 굳은 몸을 풀면서 말했다.
“새벽에 어딘가 부리나케 가더라고.”
잠시 후 귀영이 나타나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도천부 놈들이 끝내 사고 쳤습니다. 당가와 고우 일행이 한바탕 붙을 것 같습니다.”
무한보다 장교명이 먼저 관심을 나타냈다.
“도천부가 사고 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당가 사람이 셋이나 죽었어.”
귀영이 자신이 염탐한 성과를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경계를 서던 당가 무인들이 암습을 당한 것이다.
“도천부가 왜 그런 짓을 해?”
“그놈들은 원래 제멋대로야. 간이 배 밖에 나왔지. 당가를 건드리다니.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는 애들인데 이제 일 난 거지.”
무한은 묵묵히 짐을 챙겼다.
귀영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직접 확인해야 했다.
당가의 인원은 올 때 보다 늘었다. 당전수를 따라왔던 네 명의 호위와 당가에서 급파한 열 명의 무인, 그리고 죽은 당현전의 시신을 운구하는 마차와 인부까지 스무 명에 달했다.
적잖은 인원인데 세 사람이나 죽는 걸 몰랐다?
무한이 말에 올랐다.
“먼저 가볼 테니 짐 챙겨 와요.”
작은 골짜기 입구 하천 옆 개활지에 당가와 도천부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다! 그러면 이제 함께 움직이자. 그러면 오해를 풀 수 있을 것 아닌가?”
“흥! 정말 그럴 자신이 있소?”
뒤이어 당전수의 볼멘소리도 들려왔다.
무한이 다가가자 모두 돌아봤다.
대치하고 있는 두 무리 가운데 놓여 있는 세 구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무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신의 상태가 너무 참혹했다.
세 구 모두 팔다리를 자르고, 한 구는 두 눈까지 파냈다.
무한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암습자가 있었어. 흉수도 이 자리에 있는 것 같고.”
당전수가 눈에서 불길을 뿜어내며 말했다.
장로를 잃은 데 이어 또 세 명이나 잃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고우가 답답한 듯 말했다.
“이봐, 너 멍청이냐? 우리가 왜 이런 짓을 하냐고?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당가와 도천부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수작질을 한 거라니까!”
당전수도 도천부의 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우에게 화풀이를 하는 중이다.
무한이 시신을 살펴보고 말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팔다리와 눈을 파냈어. 천돌혈을 파괴하여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을 거야.”
“이런 짓을 할 놈은 흑천밖에 없어. 정파는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이러지 않는다고.”
고우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흑천이라고?’
무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천이 이리 빤히 들여다보이는 수를 쓸까?
뒤늦게 무한의 일행이 왔다.
“우욱!”
남궁우가 시신을 보고 토했다.
“으이구. 특임감찰 호위가 시신을 보고 토하다니.”
귀영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면박을 주었다.
당전수가 어금니를 콱, 깨물고 신음하듯 내뱉었다.
“누구든…… 당가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당전수의 독기 어린 말에 모두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화경에 이르지 않는 한 제아무리 고수라고 하더라도 독은 두렵다. 독의 종주라는 당가의 소가주가 이를 악물었으니 혹시나 불똥이 튀지 않을까 두려웠다.
칼에 눈이 없는 것처럼 독 또한 상대를 가리지 않으니까.
무한이 당전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동행을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해.”
당전수가 순순히 승낙했다.
반면 고우는 함께 하자는 의사를 철회했다.
“독을 쓰겠다면…… 함께 하기 어렵겠군.”
당전수가 자신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걸 알기에, 혹시라도 실수를 빙자하여 독을 쓸까 염려한 것이다.
고우 일행이 돌아간 뒤 무한은 당가와 함께 길을 떠났다.
“이건 시작이야.”
남궁우가 무한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무한은 묵묵히 말고삐를 쥐고 앞을 보며 가는 중이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참혹하게 시신을 훼손하지 않았을 테니까.
“흉수가 누군지 궁금하지?”
“너는 알아?”
“모르지. 하지만 왠지 흑천은 아닌 거 같아.”
무한이 남궁우를 보았다.
여자처럼 흰 볼이 겨울바람을 맞아 상기되어 있었다.
남궁세가의 지낭이라더니 짚이는 바가 있나?
무한이 빤히 바라보자 남궁우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확실치는 않지만…… 오늘 밤에 또 희생자가 나올 거 같아.”
온종일 말을 달려 숲길을 벗어난 일행이 너른 강가에 도착했다.
강가는 얼었지만 한복판은 아직 물이 흐르고 있어 말을 타고 건너기 어려웠다.
“십 리 정도 내려가면 마을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시죠.”
당가의 무인이 말했으나 당전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강가에서 야영한다.”
소가주의 지시에 당가의 무인들은 중언부언하지 않고 곧바로 야영준비에 들어갔다.
모닥불을 두 곳 피우고 주위에 천막을 쳤다.
그러는 사이 당전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무한이 귀영에게 말했다.
“우리도 당가 옆에서 야영을 하죠. 그리고 밤에 함부로 나다니지 말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오줌 누러 가다 독에 씌인 귀신이 될 수도 모르니…….”
귀영이 잔뜩 날이 서 있는 당전수를 보며 말했다.
당전수가 흉수를 잡기 위해 사방에 맹독을 깔아두었으리라는 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귀영은 세찬 바람을 타고 독이 날아올까 염려하여 얼굴을 면사로 덮고 잠자리에 들었다.
겨울 강가의 추위는 매서웠다.
경계를 세웠으나 모두가 선잠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새벽 강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폐를 얼리는 듯한 차디찬 안개를 들이마시고 연신 기침을 하던 귀영이 투덜거렸다.
“이거 중독된 거 아냐? 왜 이리 기침이 나지?”
“차디찬 안개를 들이마셨는데 당연하지.”
남궁우가 말하자 귀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길바닥에서 구른 지가 몇 년인데. 이건 아무래도 이상해.”
귀영이 품에서 약병을 꺼내 환약 몇 알을 꺼내 삼켰다.
“그게 뭐야?”
“모든 독에 일단 효과가 있는 약이야. 너도 줄까?”
“됐거든? 넌 역시 귀가 얇은 놈이야.”
“뭐?”
“모든 독에 효과가 있는 약이 어디 있냐고. 돌팔이에게 당한 거지.”
두 사람이 소란을 피우는데 새벽안개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고우를 비롯한 도천대가 안개를 헤치고 나타나더니 십여 장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앞에 선 고우가 소리쳤다.
“당전수! 나와라!”
야영천막에서 나온 당전수가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자 고우가 외쳤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니라고 했는데 보복을 해? 죽고 싶은 게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당전수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봐라! 네놈이 한 짓이 아니냐?”
고우가 손을 들자 도천대가 갈라지고 수레가 나타났는데, 그 위에 시신이 세 구나 놓여 있었다.
멀리서 봐도 팔다리가 끊어진 걸 알 수 있었다.
모두 수레 주위로 몰려들었다.
무한이 가까이 가자 귀영이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
“똑같이 당했네요.”
당가의 무인들이 당한 것과 똑같았다.
“네가 한 짓이 아니야?”
고우가 눈알을 부라리자 당전수가 시선을 피하며 무한에게 말했다.
“어제 누가 내게 멍청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간질이라고 했지 아마?”
고우의 얼굴이 벌게 달아올랐다.
당전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을 긁었다.
“당가는 말야. 암습을 할 때 암기를 써. 왜 귀찮게 칼질을 하냐고.”
무한이 고우에게 말했다.
“고 공자, 당가 사람들은 어젯밤 야영지를 한 발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무한까지 나서니 고우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당가에서 한 짓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양쪽을 이간질하는 건 어린아이도 넘어가지 않을 뻔한 수다.
그럼에도 께름칙한 건 어쩔 수 없다.
“좋아. 그렇다면 무사들을 동원해서 주위 백 리를 뒤지자.”
고우가 말하자 당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보이지 않는 적이 부담스러웠다.
“잠깐!”
남궁우가 손을 들자 고우가 물었다.
“뭐야? 너는.”
“지금 인원을 나눠서 수색을 한다고 하길래. 그럼 안 된다고 하려고.”
“뭐?”
“어제 사건 현장을 봤는데 눈이 내렸는데도 발자국이 없었어. 그게 무슨 뜻이겠어?”
고우가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도천대의 시신 주위에도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뜻이지?”
“으음. 도천부 고 대공자는 머리가 나쁘구나.”
고우가 입을 딱 벌렸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다니.
“너, 너 이 새끼, 뭐야?”
도천 일조장 마철립도 나섰다.
“감히 고 대공자께 함부로 말하다니. 죽고 싶은 게냐?”
“아, 아. 그럼 안 되는 거였나?”
고우의 시선이 무한을 향했다.
“지금 나, 물 먹이는 거냐? 네 하인 같은데 저리 방자하게 굴도록 둘 셈이냐?”
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귀영이 나서 말했다.
“이 사람은 감찰단에서 임명한 특임감찰 호위입니다. 하인이 아니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하간 누구의 개는 아니라는 뜻이죠.”
귀영이 말하며 마철립을 보았다.
“뭐? 이 새끼들이?”
고우가 화를 참지 못하고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남궁우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순간 무한이 검집을 내밀어 고우의 발을 막았다.
자신의 발길질이 막히자 고우가 펄쩍 뛰어 오르며 뒤돌려차기를 하여 무한의 얼굴을 노렸다.
무한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검집을 들어 막았다.
턱!
고우의 발이 무한의 검집에 걸려 멈췄다.
“정말 나와 싸워보겠다는 거냐?”
고우가 무한을 노려보았다.
“다짜고짜 내 호위에게 발길질을 하는데 막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무한의 말은 고우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체면을 상한 이상 힘으로 눌러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후회하지 마라!”
싸늘한 코웃음과 함께 고우가 주먹을 내질렀다.
무한 정도는 맨손으로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내지르는 주먹과 발길질마다 무한이 슬쩍 슬쩍 피하니 허사로 돌아갔다.
겉보기에는 고우의 맹렬한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피하는 걸로 보였다.
“그만 하죠?”
어느 순간 무한이 검집으로 날아드는 고우의 발을 막았는데 공교롭게도 정강이뼈를 쳤다.
“크윽!”
고우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마철립을 비롯한 도천대가 일제히 도를 뽑았다.
촤라락!
순간 당가의 무사들도 일제히 검을 뽑았다.
수십 자루의 검이 뽑히는 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차디찼던 대기가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