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무한이 집법당 정문을 넘었다.
귀영이 얼굴을 검은 보자기로 가린 추노를 수레에 싣고 뒤를 따랐다.
애써 잡은 추노를 집법당에 넘기는 귀영의 볼이 불룩 튀어 나왔다. 그는 무한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리 전갈을 받은 집법당주 변위초가 직접 집법전 앞 너른 마당까지 나왔다.
뒤에 선 선우휘의 안색이 꺼멓게 죽었다.
무한이 숨긴 흉수의 행적을 잡으려고 천하방 안팎을 샅샅이 뒤졌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추각주를 맡은 이래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다.
“당가 당현전 장로를 살해한 피의자를 데려왔습니다.”
무한이 쇠사슬에 묶인 채 수레에 앉아 있는 추노를 가리켰다.
귀영이 머리에 씌운 보자기를 걷자 세모꼴 눈을 한 늙은이가 나왔다.
“이 자가 누군가?”
“집법당으로 넘길 것이니 직접 취조하면 될 겁니다.”
변위초가 추노를 살폈다.
고문의 흔적이 없다.
“취조를 하지 않았나?”
“감찰에 필요한 사안은 알아봤습니다.”
무한의 말에 변위초가 미간을 찌푸렸다.
애매한 답이다.
“감찰에 필요한 사안이라…….”
“제가 받은 명은 천하방 내부에 흉수와 결탁한 자를 밝혀내는 것입니다.”
“알고 있네. 어쨌든 흉수를 넘겨주어 고맙군.”
변위초는 무한이 아무 조건 없이 추노를 넘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무한이 선우휘 쪽을 보며 말했다.
“사실 추각이 거의 다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슬쩍 선우휘를 띄워 주었다.
선우휘는 무한의 말이 더없이 얄밉게 들렸으나 변위초는 그리 생각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지.”
직접 빈청으로 이끌고 귀한 차와 과자를 대접했다.
“그런데 목격자는 왜 데려오지 않았는가?”
변위초는 선우휘로부터 무한이 목격자와 흉수를 모두 잡아갔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 각주가 오해하고 있어 해명을 해야겠습니다.”
무한이 잠시 뜸을 들이며 선우휘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그날 추각주가 흉수와 싸우는 도중에 누군가 목격자를 구해가는 걸 봤는데 뒤를 쫓지 못했습니다.”
“보고도 놓쳤다고?”
“흉수의 무공이 상당하여 추각대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기에 포위망을 풀 수 없었지요.”
“그런 고수가 있었다니…… 그자는 왜 목격자를 빼돌린 거지?”
변위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선우휘 쪽을 보았다.
연이설을 흑천의 밀정으로 의심하면서도 묻는 건 무한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
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흔은 연이설을 데리고 떠났고, 무한은 그와 관련한 흔적을 모두 지웠다.
무한에게 암중호위가 있었다는 걸 아는 이는 몇 안 되고, 그 암중호위가 떠났다는 걸 아는 이는 귀영 한 사람뿐이다.
선우휘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게 말이 되오? 검천부가 포위하고 있었으면서 연이설을 빼가는 걸 보기만 했다는 건 정말 믿기 어렵소.”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흉수를 잡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흉수가 추각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는…… 워낙 긴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무한이 네가 잘했으면 목격자를 놓쳤겠냐는 눈빛으로 대꾸하자, 선우휘의 얼굴이 다시 벌겋게 타올랐다.
“내부에서 결탁한 자가 있다고 생각하나?”
변위초가 난처한 선우휘를 대신하여 화제를 돌렸다.
“아직 진행 중인 사안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양해하여 주시지요.”
특임감찰은 감찰단주와 방주에게만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변위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임감찰이 흉수를 잡았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동시에 자신의 공로를 집법당에 넘긴 무한에 대해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건가?”
“거만한 선우휘의 코가 납작해졌다더군.”
“역시 검천부야.”
그럴수록 선우휘의 분노는 깊어갔다.
***
손우자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창밖의 밤이 오히려 밝아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와 섰다.
한쪽 팔이 이상하게 짧은 노인은 양쪽 귀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다리도 절었다.
“잔노(殘老). 추노가 곤란하게 됐어.”
“버려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손우자가 길게 탄식했다.
“그게 추노를 위한 일입니다.”
손우자가 어둠보다 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잔노, 당신들은 알잖아. 내가 버릴 수가 없다는 걸…….”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
손우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화제를 돌렸다.
“오도(五道)의 실력을 간과했어.”
잔노가 흠칫했다.
오도라면 검천부에 있는 다섯 기인을 말한다.
“오도가 개입했습니까?”
“아니. 그들은 세상사에 직접 개입하지 않아. 인과에 함부로 개입했다가 자신들의 도를 망칠까 두려워하지. 하지만…….”
손우자의 머릿속에 무한이 떠올랐다.
“오도가 그놈을 가르친 게 분명해. 천무행을 보냈더니 살아 돌아왔어. 게다가 고벽후까지 죽음에서 건져냈지.”
“…….”
잔노는 손우자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이제 열여덟에 불과한 애송이인데.’
하지만 손우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게다가 추노까지 잡았지. 발톱을 숨긴 호랑이 새끼였던 거야.”
잔노가 흠칫 놀라 손우자를 보았다.
그가 이렇게 누군가를 높이 평가하는 경우는 천기자 외에 처음이다.
마치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붕(鵬)과 같은 존재가 손우자다.
“이제라도 제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잔노의 말에 천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잔대를 데려가.”
“예?”
“녀석이 무공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깜찍한 놈이야.”
손우자는 고강후가 생각보다 무능하다는 걸 새삼 되새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애 하나 감시조차 못하다니.’
심양조가 죽었을 때 심무한까지 제거하고자 했다. 그걸 막은 게 고강후였다.
심 씨 핏줄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는 명분이었지만 속셈은 경천십이식을 얻고자 함이었다.
고강후의 욕심은 오도가 나타나며 물거품이 되었다.
“어차피…….”
손우자의 목소리는 마치 어둠 속을 유영하듯 차분하게 흘렀다.
“당전수, 고우 그리고 심무한. 그들의 죽음이 필요해.”
“아!”
잔노가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사부가 어찌 나오나 봐야겠어.”
손우자의 말에 잔노의 머릿속에 떠오른 노회한 얼굴.
손우자의 사부 천기자였다.
기천부 깊숙한 곳에 은신하고 있는 천기자.
그를 죽이고자 자객을 수없이 보냈으나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천잔대는 천기자를 죽이기 위해 길러낸 자들이다.
잔노는 손우자의 대계에 변화가 생겼음을 짐작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잔노가 조용히 물러나는데 손우자가 한마디 더했다.
“추노…… 되도록 편히 보내줘.”
***
비가 내리는 호수가 목옥.
주인이 없는 거실 평상에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바둑돌이 촘촘히 놓여 있어 한창 격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둑 두던 사람은 없고, 다만 한 사내가 바둑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흰 옷을 입은 사내는 부드럽기 그지없는 인상이었기에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풀어질 것만 같았다.
“다음 수가…… 다음 수가 뭐였을까?”
어지러운 난전.
흑돌의 다음 수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의 시선이 바둑판 너무 창밖으로 향했다.
호수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내리는데…… 비를 그리워하는 이는 오지 않는구나.”
비를 좋아한 흑돌의 주인은…… 다시 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한참 창밖을 지켜보던 사내가 이윽고 목옥을 나섰다.
문 앞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던 갈의사내가 물었다.
“가려고?”
구름처럼 하얀 옷을 입은 운객이 바람 같은 사내, 풍객의 물음에 잠시 멈춰 섰다.
“가야지.”
“이미 끝난 일이야.”
세 번의 살행을 실패하면 의뢰비를 환불하고 물러나는 화수전의 규칙.
우객이 죽고 환불 처리까지 끝났다.
“궁금하지 않아? 우리가 풍운야우를 맡고 나서 처음으로 실패한 거잖아?”
“그게 의미가 있나?”
“우리 삶에 의미 있는 일이 있었나?”
운객이 중얼거리고는 빗속으로 들어갔다.
***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바람은 찼다.
한겨울 여정은 무인에게도 쉽지 않다.
성밖마을을 벗어나니 길이 좋지 않았다. 눈이 내렸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한 길은 한낮이 되면서 진창으로 변했다.
당가 일행이 먼저 떠나고 뒤이어 고우와 도천대가 따랐다.
무한은 십 리 정도 떨어져 뒤를 따르는 중이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로 덮인 산에 눈이 쌓여 있었다.
무한은 말고삐를 쥔 채 무심히 앞을 응시하며 가고 있었다.
무흔과 대화할 때 마음 속 깊은 곳에 무언가가 끊어진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가면서 그게 무엇인지 느끼고 있다.
부모와 조부모의 복수 그리고 권력자들의 전횡으로 부패한 천하방 해체.
목표가 명확했기에 단조롭기 그지없었던 지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지금 그 명확했던 목표가 흔들리고 있다.
흑천이 자신을 천하방에 심은 게 아닐까 의심하면서 모든 게 흐트러졌다.
‘흑천노조를 만나서 확인해야 해.’
확인한다고 해서 자신이 흔들릴 거라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확인을 하려는 건 어머니 때문이다.
무한은 자기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머니 진소향이 천하방을 노리고 아버지 심군하에게 접근한 거라면…… 그래서 자신을 천하방 후계자로 심으려 했다면…….
자신은 태생부터 누군가의 의도에 세상에 나온 게 아닌가.
무한이 자신의 생각에 깊이 잠겨 가는 동안 뒤를 따르는 귀영과 남궁우는 쉼 없이 떠들었다.
주로 무한에 대해서 남궁우가 묻고 귀영이 대답했다.
“특임감찰은 왜 저래? 원래 저렇게 음울해?”
“음울? 아닌데? 그러고 보니 요즘 좀 우울해하는 것 같긴 하네.”
“원래 성격이 그런 건가? 평소 어떤데?”
“성격? 안 좋지. 안 좋아. 그러니까 가까이 할 생각 말라고.”
“뭐가 그리 안 좋다는 거야?”
“으음.”
귀영이 생각해봤는데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궁우가 알아서 해석했다.
“머리는 좋지만 아직 사람 다루는 법이 서툰 모양이구나. 원래 머리 좋은 인간들이 그래.”
잠시 무한을 살핀 남궁우가 말했다.
“성격이 이상하면 곤란한데. 일단 보완해야 할 사항으로 분류하자.”
“근데 넌 왜 그리 우리 부주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건데?”
“내가 강호에 나온 이유가 있거든. 일단 나의 뛰어난 지혜를 알아줄 사람이 필요해. 심 부주가 그런 그릇인지 아닌지가 중요하거든.”
“으응……. 너, 좀 이상한 애구나.”
“사내로 태어났으면 응당 가질만한 포부지. 하긴 너처럼 밑에서 구른 애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이 자식이? 너 나이 몇이야? 은근히 고참을 까네?”
“에헤이, 귀 형. 내가 말실수를 한 거야. 참아, 참으라고.”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수군거리다 옥신각신하기를 반복하며 길을 가는 두 사람 뒤로 두 명의 감찰조사관이 따르고 있다.
당가 내부를 조사하러 가야 한다며 무한이 동행시킨 장교명과 공우의 안색이 썩은 감자처럼 칙칙했다.
범인까지 잡힌 마당에 왜 까칠하기로 소문난 당가를 조사하러 가야 하느냐는 불만이 가득했다.
한겨울 추위 속에 수천 리를 가야 하는 여정에 한숨만 나왔다.
겨우 다섯 명에 불과한 특임감찰 일행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