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당가가 오대세가의 일원이긴 하지만 흑천을 오롯이 감당하기는 어렵지요. 이번 당현전의 죽음을 계기로 당가와 연대를 강화하는 겁니다.”
“그러면 당가를 위해 무력이라도 지원하자는 건가?”
고강후가 인상을 썼다.
“마천과 전쟁하자며? 그런 시국에 흑천과 대판 붙으면 전력손실이 적잖을 텐데…….”
“물론 전면전까지 가면 곤란하지요. 양측이 맞붙기 직전 부주께서 나서서 화해를 성사시키면 됩니다.”
“으음. 그렇다면 복안이 따로 있다는 건가?”
“복안이랄 것도 없습니다. 우선 당가로 사람을 보내 위로를 전하고, 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조만 하세요.”
고강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잔에 직접 술을 따랐다가 훌쩍 마셨다.
독한 술이 가슴을 적시며 흘러들어갔다.
“그 후에는?”
고강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손우자는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고강후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흑천이 반발할 것이고, 무력충돌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겠지요. 그때 당가를 설득해서 일정 영역을 양도하는 수준에서 물러나는 겁니다.”
“그걸 당가에서 받을까?”
“받을 겁니다. 흑천이 사천을 원하는 한 당가는 흑천과 결판을 내거나 사천 남부를 내주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차피 내줄 거 천하방의 입회하에 내준다면 향후 흑천은 그 이상을 요구하지 못할 것이니 당연히 받아들일 겁니다.”
“당가, 그 독한 놈들이 과연 순순히 물러날까?”
“멸문 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겠지요.”
***
고벽후와 의형제들이 감숙으로 떠난다고 하여 무한이 성밖마을까지 배웅 나갔다.
성밖마을 어귀에 이르자 고벽후가 무한에게 말했다.
“이만 헤어지자.”
무한이 고벽후를 비롯하여 연추산 등을 향해 예를 취했다.
“감숙으로 가거든 꼭 기별을 주십시오.”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물주께 자주 보고할 거야.”
장초가 흐뭇한 얼굴로 두둑한 전낭을 툭툭 치며 말하자 홍염이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동생에게 기대어 사는 게 그리 좋냐?”
“부자 동생을 두는 것도 능력이라고.”
“으이그. 그러니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사냐고.”
부부가 아옹다옹하니 모두가 크게 웃었다.
고벽후가 무한의 손을 잡았다.
“이번 일을 무사히 넘긴 건 모두 네 덕이다.”
“제가 한 게 있나요.”
“아니다. 네가 천하대전으로 끌고 가지 않았더라면 언제 내가 천하방 수뇌부 앞에서 호통을 칠 기회가 있었겠냐?”
“으음. 호통 칠 기회를 주어 고맙다는 뜻이군요.”
“그렇지.”
무한이 웃으며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멸마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는데요?”
멸마대는 해체되고 난주 아래쪽에 새로운 감숙지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흥! 맹약의 집행자라는 신분을 우습게 보는군. 무력대가 있든 없든 나는 맹약의 집행자야.”
고벽후는 딱히 개의치 않는 듯했다.
“손우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천과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강경파 놈들은 이 기회를 절대 그냥 두고만 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더더욱 가서 확인해봐야지.”
고벽후가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고원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놈들이 있다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하하. 당연히…… 내가 누구냐?”
“철혈의 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고벽후와 의형제들이 말에 오르더니 말고삐를 채어 바람같이 사라졌다.
무한이 검천부로 돌아오니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하하. 내가 왔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남궁세가의 지낭이라는 남궁우가 눈앞에 서 있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부주에게는 내가 필요해.”
남궁세가에서 들러붙던 남궁우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하. 마침 은 단주께서 가주와 친분이 있지 뭐야. 하지만 그분이 깐깐한 건 알고 있지? 실력이 없으면 절대 채용하지 않았을 거야. 나를 제대로 아는 몇 안 되는 분 중에 하나지.”
남궁우는 뻔뻔한 얼굴로 으스댔다.
“…… 그렇게 해서 내가 특임감찰 호위가 됐어. 바로 네 호위지.”
옆에서 듣고 있던 귀영이 인상을 썼다.
“어디서 굴러온 놈인데 헛소리를 하는 거야? 특임감찰 호위는 나라고.”
“호오?”
남궁우가 순간 귀영에게 바짝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흐음. 나불거리는 주둥이 때문에 요절할 상이군.”
“뭐?”
“주인 잘 만난 줄 알아. 아니었으면 벌써 황천을 건넜을 거야.”
왠지 그냥 하는 소리 같지 않은 분위기에 귀영이 흠칫했다.
‘이놈이 관상을 볼 줄 아나?’
한 대 패주고 싶은데 차림으로 봐서 자신과 신분이 다른 것 같아 께름칙하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특임감찰 호위 남궁우야.”
특임감찰은 호위를 두 명까지 둘 수 있다.
남궁우는 무슨 수단을 썼는지 감찰단 호위 임명장을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무한이 고개를 저었다.
“남궁세가 사람을 호위로 쓸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돌아가.”
무한의 말에 귀영이 놀랐다.
저 계집애 같은 놈이 남궁세가 사람이라고?
“이봐. 사람 차별하지 말라고. 남궁세가 사람은 호위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남궁우는 더 말을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귀영 옆에 가서 섰다.
“여기가 호위 자리인가? 앞으로 잘해보자고.”
귀영의 어깨까지 툭, 쳤다.
졸지에 남궁세가 사람과 동격이 된 귀영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입만 쩍 벌리고 어어, 하였다.
***
“무슨 일이야?”
당전수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하대전에 외빈으로 참여하여 당가와 천하방 간의 우호를 다짐하기는 했으나 구체적으로 얻어낸 건 없었다.
“범인을 놓쳤다며?”
당전수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퉁명스레 내뱉었다.
천하방에서 일부러 놓아준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하는 듯했다.
무한이 떠날 차비를 하느라 별원을 분주히 오가는 당가의 호위들을 보며 물었다.
“언제 출발하지?”
“내일.”
당전수가 하루도 머물기 싫다는 듯 내뱉었다.
“사흘만 더 기다려 줄래?”
“왜? 그사이 범인이라도 잡아줄 수 있어?”
“흉수는 확보했어. 하지만 배후를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해.”
추노를 잡은 사실을 추각이 알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당전수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사실대로 일러주었다.
당전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흉수를 잡았다고?”
“일단 집법당으로 넘길 거야. 조사가 끝나면 당가에게 통보하겠지.”
“범인…… 범인을 잡았다고? 그럼 우리에게 넘겨. 피해자가 우리잖아. 조사를 해도 우리가 해야지.”
“말했잖아. 이건 천하방 내의 문제라고. 칼잡이만 잡을 게 아니잖아? 진정한 흉수를 잡아야지.”
당전수가 침음성을 흘렸다.
“배후가 흑천 아니었어?”
무한은 입을 닫았다.
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나 당전수는 내막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좋아. 그런데 당가는 무슨 일로 오겠다는 거야? 설마, 당가를 감찰하겠다는 거야?”
“확인은 해야지.”
“그건 받아들일 수 없어. 그건 당가를 모욕하는 거야.”
“아니. 당가를 조사하는 게 아냐.”
“그럼?”
“흑천을 조사할 거야.”
무한은 당가로 가서 흑천과 조우할 셈이다.
당전수가 잠시 생각했다.
이번 천하방 행에서 장로 당현전이 죽고, 원래 의도했던 무력지원은 말도 꺼내지 못했다.
천하대전에 참석하긴 했는데 중원 정도에 위기가 닥치면 좌시하지 않는다는 허울뿐인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래, 검천부가 몰락했지만 천하사패잖아.’
천하사패의 일원인 검천부의 수장을 데리고 가면 그나마 면이 설 것이다.
당전수가 나름 머리를 굴리고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 그러지.”
그때 바깥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도천부 고우 대공자가 왔습니다.”
“고우?”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고우가 들이닥쳤다.
만면에 웃음을 짓고 들어오던 고우가 무한을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는 왜 여기 있는 거냐?”
무한이 고우를 바라봤다.
인당혈이 찌릿하며 깊숙한 천목혈까지 열리는 느낌이 들며 고우가 어떤 인간인지 들여다보였다.
고우는 아버지 고강후를 닮아 턱선이 굵은 인상이 강인한 무인의 풍모를 풍긴다.
하지만 그 내면은 익지 않아 유약한데 거만하기까지 하다.
무한은 고우를 무시하고, 당전수에게 말했다.
“그럼 사흘 후 출발하는 걸로 하지요.”
당전수는 돌변한 무한의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무한이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고우가 길을 막아섰다.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물었잖나?”
무한이 고우를 보고 말했다.
“특임감찰 공적 업무 중입니다. 사사로이 답할 수는 없지요.”
“뭐? 뭐라고?”
고우가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무한이 옆을 스치고 나갔다.
“저, 저게…….”
무한이 대놓고 자신을 무시할 줄 몰랐던 고우는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러다 당전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깨닫고 어이없다는 듯 양손을 벌렸다.
“이거 참……. 소가주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네. 요즘 애들은 권한만 쥐면 위아래가 없어.”
“도천부 고 대공자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당전수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지난번에 고강후로부터 냉랭한 대접을 받았으니 좋은 말이 나올 리 없다.
‘이 새끼도 싸가지가 없구나.’
고우가 이맛살을 찌푸리곤 말했다.
“당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도와주려 왔지.”
“누가 그럽니까? 당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당전수가 굳은 얼굴로 재차 물었다.
고우가 아차, 했다.
무한 때문에 잠시 흥분하여 말실수를 했다.
체면으로 먹고 사는 무림에서, 가뜩이나 오만한 당가에게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기에 눈앞의 당전수는 너무 어려 보였다.
“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도천부는 당가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다는 입장이네.”
‘말을 해도…….’
당전수는 내심 울뚝밸이 솟았으나 억지로 눌러 참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도천부주께서 내게 자네와 함께 당가로 가서 흑천과의 대치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라 하셨네. 이제 걱정할 것 없어. 도천부가 나섰으니.”
‘고강후가? 왜?’
차갑게 외면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무슨 꿍꿍이 속이지?’
내키지 않았으나 바로 거절하지 않았다.
당전수는 나이가 어려 경험은부족하지만 자신이 당가를 대표하여 왔고, 가문이 난처한 지경이라는 걸 잘 안다.
검천부에 이어 도천부 대공자까지 데려가면 흑천에 보여주는 패로 써먹을 만하다.
‘게다가…….’
아니, 자신을 무시한 천하방에 당가의 위세를 보여주고도 싶었다.
흑천이라는 거대한 적을 맞아 잠시 혼란스러운 것일 뿐 수백 년 흘러온 가문의 저력은 깊었고, 이를 천하방의 주축이라는 검천부나 도천부에게 과시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당전수가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흘 후 출발합니다. 저는 출발준비를 해야 해서 이만…….”
축객령이다.
고우의 제의를 수락했지만 그동안 무시당했던 마음까지 풀린 건 아니다.
고우의 눈에 서릿발이 맺혔다.
허나 입꼬리를 올리면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렇겠지. 당가까지는 먼 길이 아닌가.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천천히 나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