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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05화 (105/250)

105화

변방의 일개 무력대주가 군사부 일군사를 조롱하다니.

다른 방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주와 수많은 부서의 장이 있고, 방파의 주요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일개 무력대주가 이렇듯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건 천하방뿐이다.

이런 기이한 구조는 검신 심양조가 천하방도들은 한 형제이기에 직책과 권한에 따른 상명하복 관계가 아닌 경우에는 모두가 동등하다고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벽후의 태도는 확실히 안하무인이었다.

하지만 몇몇 원로들은 검신 심양조가 방주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천하제일인 앞에서도 자유로이 격론을 벌이다 서로 욕설까지 오가기도 했다.

검신 사후 점차 위계와 형식이 강화되고, 어딘가 모르게 고압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공손승이 반박하려는데 대전에 창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 늙은이도 군사부의 처사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네.”

모두의 시선이 대전 문으로 향했다.

“동 대학사?”

문향전주 대학사 동중용, 무화전주 대교두 송양과 수석교두 우문조였다.

동중용이 들어오자 도왕과 권왕도 일어나 예를 취했다.

동중용의 연배가 그들보다 높았다. 동중용은 문향전주이지만 대외적으로 천무관을 대표했다.

맡은 직책은 천하방 산하 무관의 관주에 불과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중원은 물론 황실에서까지 신망을 얻고 있는 동중용이다.

도왕이 예를 취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동중용이 군사부와 장로회의 석을 보며 말했다.

“이번 천무행에서 하마터면 문하생들이 큰 희생을 치를 뻔했더군.”

동중용은 엄중한 어조로 물었다.

“천무행은 단순히 강호 경험을 쌓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위험한 실전에 문하생을 투입한 이유가 뭔가?”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마치 질책을 하는 듯 들렸다.

은진언이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대학사, 이건 천하방 내의 일입니다.”

“알아. 하지만 천무관 문하생들이 모조리 죽을 뻔 한 일이기도 하지. 천무관주로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고벽후를 가리켰다.

“저 자가 문하생들을 난주로 피신시키지 않았다면 문하생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을 걸세.”

동중용의 말에 파문이 일었다.

천무행에 자녀를 보냈던 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내막을 알고 있었다.

함구령 때문에 거론하지 못했는데 동중용이 지적하고 나서니 심정적으로 응원하는 형국이었다.

돌연, 손우자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관망만 하던 총군사가 일어나자 모두 쳐다봤다.

무한의 시선도 자연 손우자에게 향했다.

‘드디어 나왔군.’

동중용에게 부탁했을 때 손우자가 맞상대하리라는 예상을 했다.

도왕이나 권왕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손우자가 아니면 입을 막을 수 없으리라.

손우자가 한발 앞으로 나와 사패가 있는 단상과 좌중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취하고는 말했다.

“대학사까지 이번 천무행 작전을 거론하시니 그냥 넘어가기가 어렵게 됐군요.”

그러면서 도왕에게 청했다.

“천무행 작전에 대해 해명해도 되겠습니까?”

도왕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손우자가 대전 주위를 경계하는 무사들에게 일렀다.

“아직은 비밀을 유지해야 하니 대전 문을 닫고 광장에 있는 이들을 백 보 밖으로 물려라. 일파의 수장들 외에 퍼지는 건 곤란하다.”

그러자 무사들이 대전 문을 닫았다.

끼이익.

커다란 문들과 창문까지 닫히자 손우자가 다시 한발 나서서 말했다.

“천무행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작전은 사실 더 큰 작전의 일부분에 불과하지요.”

뜻밖의 말에 모두가 손우자를 주시했다.

“마천은 자중지란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천주와 소천주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였지요.”

손우자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울렸다.

마천이 자중지란의 상황이라니.

대부분의 이들이 처음 듣는 이야기다.

무한 역시 내심 놀랐다.

‘천주와 소천주가 대치하고 있다고?’

소마와 검마의 얼굴이 자연스레 교차했다.

손우자는 나직한 어조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천의 전향자는…… 그의 신분까지 밝히기는 어렵군요.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전향자라고 하지요. 그가 우리 측에 무슨 의도로 접근하여 전향의사를 밝혔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모두가 숨죽여 손우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천주와 소천주 사이의 갈등에서 불거진 일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오랫동안 묵었던 갈등을 터뜨린 신호탄이지요. 천주와 소천주 어느 쪽에서 쏘아 올린 건지도 불확실합니다. 그만큼 현재 마천 내부의 상황이 어지럽습니다.”

손우자에 따르면, 군사부는 전향의사에 모종의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승룡대와 현무대를 보냈다.

“……유 장로는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맹약을 어기는 강수까지 두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손우자가 전경목과 고벽후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십여 년 평화가 지속되는 동안…… 마천과 천하방 무력대 간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져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이는 군사부의 판단 착오이고 책임을 통감합니다.”

총군사의 통렬한 반성에 대전 안에 긴장감이 돌았다.

분위기 또한 반전되었다.

맹약을 놓고 벌이던 논쟁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손우자는 한마디 하였을 뿐이지만 오랫동안 머릿속에 존재했던 마천에 대한 공포를 현실로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으음.’

무한은 손우자의 무심한 눈빛을 보며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손우자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천이 내분에 휩싸였다면 지금이 공략할 기회 아니오?”

유곡명의 말에 손우자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닙니다. 적의 내분이 무르익기를 기다려야죠.”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은연중 마천과의 전쟁을 전제로 말했다.

손우자가 동중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무행 작전에서 문하생들은 사실상 큰 위험은 없었습니다. 전향 의사 자체가 거짓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요란하게 작전을 펼친 이유는 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손우자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승룡대와 현무대의 희생은 예기치 못한 불행이었습니다. 유 장로 또한 마천이 이리도 무도하게 나설 것이라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유 장로와 무력대의 희생으로 우리는 마천의 내분을 확실하게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동중용의 물음에 손우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소천주가 감숙에 주둔하게 됐습니다. 천주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됐지요. 이제 둘 사이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겁니다. 그게 우리에게는 기회이지요.”

‘궤변, 궤변이야.’

무한은 기가 찼지만 대전 안의 사람들은 총군사의 지략에 감탄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 팔을 내주고 적의 숨통을 끊는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총군사의 심모원려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구려.”

“형님은 애초에 스스로를 희생할 생각이었구나!”

유곡명이 맞장구쳤다. 형의 죽음에 비분강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손우자가 말했다.

“고원의 맹약으로 그간 평화가 유지되어 왔으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맹약에 따르면, 마천은 먼저 우리 측 맹약 집행자에게 처벌을 요구하고, 미흡할 경우 자체 무력을 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무력으로 나왔지요. 이는 맹약을 체결한 의의를 스스로 저버린 행위입니다.”

그러더니 고벽후를 보며 말했다.

“모두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초래한 것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딛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손우자가 모두를 보며 말했다.

“천무행 작전에 대한 공과는 마천을 제거한 후 다시 논의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때가 되면 누가 옳고 그른지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손우자는 마지막 말을 하며 도왕과 권왕을 향해 예를 취했다.

“그리 하라.”

도왕이 선언하자 더는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무한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어찌된 거야?’

도왕을 쳐다봤지만 천목투심술로도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가장 첨예한 사안이었던 천무행 작전 안건이 마무리된 후 나머지 사안은 형식적인 토의를 거쳐 일사천리로 흘렀다.

천하대전이 마무리된 이후 천하방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마천과의 전쟁.

아무리 손우자가 당부했다고 해도 소문이 퍼져 나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

고강후의 비원(祕苑).

정자에 정갈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고강후와 손우자가 마주했다.

몇 순배 술이 오가고 고강후가 물었다.

“정말 전쟁을 벌일 생각인가?”

손우자가 고강후를 빤히 보다 말했다.

“난세가 영웅을 부릅니다. 부주께서 천하방 후계자가 되기 위한 기회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평화를 원하네.”

가만있어도 천하방 후계자가 될 수 있다. 괜히 마천과 전쟁을 벌여서 의외의 변수라도 나오면 곤란하다.

‘전쟁을 벌이더라도 내가 후계자가 된 뒤여야 한다.’

그게 고강후의 결론이었다.

이미 천하방 문파 오할 이상의 지지를 암묵적으로 끌어냈는데 굳이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손우자는 생각이 달랐다.

“천하방은 무수한 영웅들이 모인 문파입니다. 부친의 후광에 기대어 후계자가 선정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 나를 어찌 보고!”

고강후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손우자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십여 년 평화가 지속되며 마천이나 흑천, 그리고 우리 천하방에는 힘이 축적되어 있지요. 그 힘을 분출하지 못하고 안에서부터 썩어들고 있지요. 고인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손우자의 시선이 정자 옆 연못을 바라보았다.

“물이 썩지 않으려면 한번쯤 휘저어야 하지요. 저는 지금 물을 휘저을 장대를 부주께 드리는 겁니다.”

“으음…….”

“제가 천하방주가 될 수 있도록 세 번의 기회를 드리겠다고 했지요. 첫 번째 기회는 이미 드렸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이보게…… 전쟁이란 게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네. 변수가 너무 많아. 그리고…….”

“그 변수를 이겨내고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른 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하방이 존재하고 있지요.”

손우자가 고강후의 말을 끊었다.

‘이놈이…….’

고강후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우자를 노려보다 눈이 마주쳤다.

뱀처럼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눈.

‘재수 없는 놈.’

고강후는 손우자의 목을 비틀어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손우자는 고강후의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어갔다.

“마천과 전쟁에 앞서 흑천과의 분쟁을 해결해야 합니다.”

“…….”

“부주께서 나선다면 방내 지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보고 흑천과 협상하라는 건가?”

“쉽지 않은 문제죠. 지난 십년 간 끊임없이 다퉈왔으니까요.”

마천과의 전쟁 종식 이후 주적이 흑천으로 바뀌었다.

대규모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대리로 내세운 문파 간의 소규모 분쟁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게 쉽겠어? 흑천노조가 어떤 인물인데. 아버지라면 몰라도 내가 나선다고…….”

흑천노조는 아버지 도왕 대의 인물이다.

“후계자로서의 면모는 스스로 쟁취하는 겁니다.”

“끄응.”

옳은 말이긴 하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을 어쩌라고.

“일단 당가장로 피습사건을 계기 삼아 당가의 지원에 앞장서세요.”

“당가를 지원하라고?”

고강후가 의아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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