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천하방의 정체성까지 거론하니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저는 맹약을 집행한 고 대주가 왜 포박을 당한 채 이 자리에서 죄인 취급 받고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맹약에 대해 걸고넘어지려던 이들이 잠잠해지자 모공연이 일어나 소리쳤다.
“대체 누가 한낱 무력대주에게 맹약 집행자라는 감투를 주었단 말이냐. 장로회의에서는 승인한 적이 없다!”
무한이 모공연을 향해 정중하게 답했다.
“최초 맹약 집행자 이후 신분은 비밀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무한의 시선이 다시 대전 안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맹약 집행자의 안위를 위한 결정이었지요. 누군가 삿된 목적으로 맹약 집행자를 암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흥! 그렇다면 아무나 집행자라고 날뛰어도…….”
무한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한 자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이가 없군요. 천하방이 그리 허술한 곳입니까? 방주와 총군사는 알고 계셨으리라 믿습니다만…….”
그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닫았다.
“잠깐!”
장로 유곡명이 화제를 돌렸다.
“기가 막히구나. 형님은 방의 작전안에 따랐을 뿐이다. 군사부와 장로회의에서 승인한 작전이 맹약을 위반했다는 것인가?”
“작전의 전모를 모르니 그건 답변할 수 없군요.”
무한이 군사부와 장로석을 보며 말했다.
“극비작전이라 밝힐 수 없다지 뭡니까?”
말과 다르게 무한은 천무행 작전에 대해 속속들이 꿰차고 있었다.
당가장로 암살사건을 빌미로 군사부를 감찰하며 천무행 작전의 내용을 입수하여 검토했다.
원안이나 장로회의를 거쳐 나온 수정안 모두 맹약을 아슬아슬하게 준수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면 죽은 유곡선의 현지 재량권이 너무 컸다는 점이다.
‘방주령까지 쥐어 주다니.’
자칫 마천과 전투가 발생할 수 있는 작전이었음을 감안하면 적절한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거만하면서도 겁이 많은 유곡선이라는 인물과 감숙 변방이라는 상황이 만나 최악의 결과를 빚었다.
“형님도 천하방 장로셨다. 맹약에 대해 모르고 계셨을 리가 없지. 현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무한이 손을 들었다.
“맞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감숙 변방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히 모르시겠군요.”
무한이 대전 옆 복도를 향해 말했다.
“들어오시죠.”
전경목이 성큼성큼 들어와 도왕을 비롯한 상석에 포권을 하고, 이어 좌중을 향해 예를 취했다.
“저자가 누군가?”
전경목은 이제 막 승룡대주가 되어 아는 이가 많지 않았다.
“섬서지부 승룡대주 전경목이오.”
“아!”
궤멸 수준의 타격을 받아 해체까지 논의됐던 비운의 무력대.
전경목은 자신에게 수많은 시선이 꽂히자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덧없이 스러져간 대주 이하 수많은 대원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분노마저 일었다.
“본인은 당시 승룡대 부대주로 천무행 작전에…….”
전경목이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여는데 군사부 일군사 공손승이 제지했다.
“천무행 작전은 공개할 수 없소.”
“이미 끝난 작전인데 왜 공개할 수 없다는 말이오?”
“그에 대한 답 또한 할 수 없소.”
막무가내였으나 군사부의 방침을 무시할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전경목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알았소. 나는 유곡선이 고원의 맹약을 어긴 부분만 이야기할 것이오. 그래야 죽은 형제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을 것이오.”
전경목이 말을 마치고 슬쩍, 무한을 보았다.
이리 나올 줄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다.
공손승도 그것까지는 제지할 수 없었다.
“……대주가 받은 최초의 접선지는 분명 접경에서 이백 리 밖이었소. 그런데 대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들어갔소. 따로 명을 받았다고 했소.”
전경목은 죽은 승룡대주나 자신은 고원의 맹약에 대해 알지 못했으니 유곡선이 내린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고 했다.
“고원의 맹약에 대해 누군가 명확하게 일러줬다면…….”
“흥!”
유곡명이 코웃음을 쳤다.
“명색이 승룡대의 대주와 부대주가 고원의 맹약에 대해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이냐?”
전경목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곡명을 보더니, 시선을 돌려 대전 안의 수장들을 보았다.
“이 중에서 이번 일 이전에 고원의 맹약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었던 분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오.”
사람들이 시선을 피했다.
“그렇소! 섬서지부 일개 무력대에 불과하지만 알고 있었어야 했소. 그게 우리의 불찰이었소. 그런데 맹약을 알고도 명을 내린 자는 대체 누구요? 왜 사전에 일러주지 않은 거요?”
“…….”
“나는 고 대주와 함께 승룡대를 기만하고 사지로 내몬 자를 고발하러 왔소.”
“패장 주제에 책임을 누구에게 묻겠다는 것이냐?”
유곡명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전경목이 맞받아쳤다.
“적어도 우리가 상대할 자에 대해 분명히 알려줬어야 했소! 마천의 무력대를 상대할 것이란 정보만 주었어도 승룡대가 이리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오!”
비분에 찬 전경목의 외침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유곡선은 마천의 추적자가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했소. 그나마 일정조차 틀렸지.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광풍대의 기습을 받았소.”
“작전에 투입된 무력대가 기습에 대한 방비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했소! 당연히 했지! 하지만 접경을 넘어 정찰을 보낼 상황이 아니었소. 접경이 코앞이니 경계병과 본진이 불과 백여 장 거리였소.”
전경목이 유곡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경계를 보내고, 진영을 구축하던 차에 바로 기습을 받았소. 그들은 우리의 움직임을 꿰고 있었소. 주둔하자마자 들이닥쳤다는 말이오.”
승룡대는 전향자를 쫓아온 추적자가 있을 뿐, 설마 마천의 무력대가 접경을 넘어 들어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소마의 오른팔 광풍대라도 정면 대결이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오.”
무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대가 습격할 때 승룡대원들은 야영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대원들 대부분이 천막을 치거나 진을 구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이 갑작스레 쳐들어오자 승룡대주는 조장들을 이끌고 적의 선봉을 꺾으려 했다.
승룡대주는 마천 무력대가 정예로 소문난 소마의 광풍대라는 사실도, 광포가 직접 선봉에 섰다는 것도 몰랐다.
광포의 광풍대는 승룡대주와 조장들을 휩쓸었고, 남은 부대주 전경목과 대원들은 간신히 무기만 챙겨 적을 맞아야 했다.
무한이 당도했을 때 승룡대는 필사적으로 응전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전투에 패해 궤멸당하다시피한 주제에 변명을 늘어놓다니. 자네가 무력대주가 맞는가?”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제대로 싸울 전장을 주시오! 그러면 싸우다 죽겠소.”
“…….”
비분에 찬 외침에 대전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유곡명이 말을 돌렸다.
“승룡대가 들어오자마자 마천도가 몰려왔다는 것도 이상하군.”
그러면서 무한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마천 역시 맹약을 어긴 게 아닌가?”
‘이번에는 물타기인가?’
무한이 유곡명의 시선을 받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유곡명, 군사부, 장로회의…… 셋이 짜고 멸마대에 책임을 넘기고자 하는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인다.
무한의 시선이 도왕에게 향했다.
자신도 아는 걸 도왕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도왕은 무심한 눈길로 듣기만 할 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무한은 도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천하방주이면서 마치 제삼자처럼 간여하지 않고 있다.
천하방은 천하제일방파이지만 수많은 문파가 모였기에 여타 방파와 다른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방주 휘하의 집행부와 군사부, 장로회의 삼각 체제로 운영하며 결속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세 곳에서 권한을 나눠 가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방주는 무소불위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군사부나 장로회의의 전횡을 보고만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약점이라도 잡힌 듯…….
‘약점? 방주가 약점이 잡혀 있다는 건가?’
고벽후가 슬쩍 무한을 봤다.
망설이는 듯한 눈빛에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고벽후가 나서서 말했다.
“당시 우리 쪽은 멸마대와 승룡대, 현무대가 동시에 접경지역에 들어와 맹약을 어긴 상황이었소. 마천은 광풍대뿐이었으니 마천에 책임을 물을 상황이 아니오.”
유곡명이 머쓱해 하였다.
고벽후가 이어서 말했다.
“나보고 감숙 북부를 내주었다고 하는데 그 또한 맹약 위반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지금쯤 우리는 마천과 전쟁을 하고 있었을 거요.”
멸마대가 도주하여 감숙 북부를 그냥 내준 걸로 알고 있었던 이들이 이 같은 사정을 알자 아, 하는 신음성이 흘렸다.
“마천 소천주 역시 난주까지 진출한 이유와 과정을 천하방주에게 통보했을 것이오. 군사부는 이를 받았소? 받았으면 내게 전달했어야 하오.”
손우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나 공손승을 포함한 삼군사들은 약간 당황했다.
‘받았겠지. 그러나 비밀에 붙였을 것이고.’
상대측 맹약 집행자의 통보를 이쪽 집행자에게 전달하지 않은 것은 월권이다.
“그동안 내가 이번 사달을 일으킨 마천 전향자를 쫓느라 미처 건네주지 못한 건가?”
고벽후는 무한이 알려준 대로 군사부의 퇴로를 열어주었다.
고벽후가 방에 들어온 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 전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삼군사 문요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답했다.
“유 장로 시해사건이 처리된 후 전하고자 했소.”
궁색한 대답이었다.
“흐음. 시해사건이라…… 군사부는 아직도 내가 사적 이유로 유곡선을 죽였다고 생각하는가보군.”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소. 이 사건에 대한 군사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중립이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포박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군.”
고벽후가 말하고는 양팔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굵은 포승줄이 단번에 끊어졌다.
대전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랐다.
삼을 꼬아 만든 저 굵은 포승줄을 끊을 고수는 많지 않다.
“뭐, 뭐하는 짓이냐?”
“군사부가 나를 죄인이라 여기는 줄 알고 순순히 포박을 받았지 뭐요. 아니라니 굳이 묶여 있을 이유가 없지.”
“지금 신성한 천하대전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것인가?”
“후후. 형이나 아우나 머리가 모자라기는 마찬가지군. 집안의 배경만 믿고 장로에 오르다니…… 이러니 그따위 작전이나 짜지.”
“저런 방자한!”
“미친놈 아닌가!”
무한이 생각하기에도 고벽후의 발언은 선을 넘었다.
하지만 고벽후는 당당했다.
“내게 죄가 있다면 입증하라.”
“…….”
고원의 맹약에 대해 대전 안은 물론 광장에 있는 이들까지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전경목의 증언으로 유곡선의 명이 맹약을 위배했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맹약에 따르면 이 사안에 대해 천하방과 마천 간의 합동조사반이 꾸려야 하오. 군사부에서는 이미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고벽후가 군사부 쪽을 보았다.
군사부 네 명의 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흥! 군사부가 모든 일을 비밀리에 처리한다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명백한 사안조차 숨기고 진행할 생각인 줄은 몰랐군.”
“말조심하게.”
공손승이 보다 못해 주의를 주었다.
“천하의 형세는 변방 무력대주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 않네. 마천과 흑천을 상대해야 하는 군사부로서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일 뿐이네.”
“그렇군. 이 모든 걸 비밀에 붙이고 방을 혼란으로 몰고 가는 이유가 마천과 흑천을 상대하기 위해서였군. 나 같은 무부는 이해할 수 없는 무슨 고도의 전략이라도 진행하는 건가?”
고벽후가 조롱하듯 말하자 공손승의 안색이 시뻘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