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수많은 생각들이 넓은 대전을 휘젓는 가운데 무한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대전 바로 문 앞 말석은 수많은 문파의 가장 끝자리다.
그 자리에 일선문주 우곽이 앉아 있었다.
여전히 수문위사의 일을 하고 있었기에 복장은 허름했으나 표정은 일파의 문주답게 진중했다.
뒤이어 문주들이 앉은 자리 뒤에 줄줄이 앉아 있는 군사부와 만재당 등 천하방 집행기관의 장들 쪽을 훑었다.
군사부는 손우자를 비롯한 삼군사가 모두 나와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오시를 알리는 큰 북소리와 함께 도왕 고진과 권왕 복호명이 나란히 걸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기천부 천기자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천하대전을 시작하라.”
고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요한 대전을 깨웠다.
요식에 따른 절차들과 인사발표에 이어 올해의 성과 등을 지나 논쟁적인 사안이 올라오며 서서히 대전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예상대로 첫 번째 안건으로 천무행 작전이 올라왔다.
강퍅한 인상의 은진언이 앞으로 나왔다.
“본 건은 감찰단에서 주관하겠소. 천무행 작전과 장로 시해사건을 합쳐 다룰 것이오.”
무력대가 둘이나 궤멸되고 감숙북부를 내어준 대실패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최초 발언자는 천무행 작전의 입안자 군사부 삼군사 문요였다.
“……이상으로 군사부 최초 작전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밝힙니다.”
이어 장로회의를 대표하여 장로 모공연이 입장을 밝혔다.
“장로회의는…… 군사부 원안의 허점을 보완하여 무력대를 보강하였고, 유곡선 장로에게 현지 작전지휘권을 주어 완벽한 작전안을 마련하였는데…….”
각자의 입장을 밝힌 후 군사부는 최초 입안과 달리 장로회의에 수정하여 작전을 진행했다고 주장했고, 장로회의는 여러 장로들과 참관인들의 의견을 수용한 수립한 최선의 계획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러면서 애초에 이런 무리한 작전계획을 세운 군사부를 비난했다.
“전향의사가 왔을 때 비밀리에 특임조를 보내 데려왔어야 했소. 이렇듯 복잡하게, 그러면서도 허술하게 세웠으니 장로회의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보강계획으로 현무대를 보낸 것 아니오!”
이에 군사부는 자신들은 복수의 안을 제출했는데 장로회의가 천무행 작전을 선택했고, 그마저 임의로 변경했다고 반박했다.
은진언은 공정하게 주관한다고 하였으나 오고가는 설전 속에 책임은 불분명해지고, 사건의 실체는 흐트러졌다.
‘서로 짜고 벌이는 논박이 무슨 소용인가?’
무한의 눈에 군사부와 장로회의가 말을 맞춘 게 훤히 보였다.
결국은 모두가 최선을 다했으나 예상치 못한 마천의 대대적인 추격 때문에 실패한 작전으로 귀결되고, 이 과정에서 장로를 살해하여 작전 실패의 도화선이 된 멸마대주의 처분만 남는 상황으로 돌아갔다.
무한은 속으로 탄식했다.
‘이래서야…….’
도무지 정상적인 흐름이 아니다.
작전은 실패하고 사람이 죽었는데 진행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각자 권한과 재량을 내세웠고,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책임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무한은 도왕을 슬쩍 바라보았다.
도왕은 이 어지러운 논쟁을 지켜만 보고 있다.
아니, 이 자리가 귀찮다는 듯 눈을 감고만 있다.
‘자신은 상관없다는 뜻인가?’
옆에 앉은 권왕도 자신과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다.
논쟁은 극으로 치달았다.
모두가 명분과 당위성을 내세운 교활한 주장에 승룡대와 현무대 등 죽은 무인들의 유족은 혼란에 빠졌고, 그 원한이 멸마대를 향했다.
“멸마대가 항명을 하고 본방의 무력대를 위험에 빠뜨렸다면 일벌백계로 처단해야 하오.”
심지어 멸마대주의 처형을 요구하는 유가족도 있었다.
“방주! 멸마대주를 데려와 직접 처분을 내려주시오.”
멸마대주를 문초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치자 은진언이 손짓을 했다.
“멸마대주를 들이라.”
잠시 후.
고벽후가 군사부 무사들에 이끌려 들어왔다.
두 팔을 뒤로 하고 단단히 포박된 고벽후를 보자 무한은 내심 울컥했다.
고벽후는 묶인 채로 적의에 찬 무수한 시선을 가르며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죄를 지은 자가 저리도 당당하다니.”
유곡선의 장로직을 승계한 아우 유곡명이 개탄하자 여러 사람들이 동조했다.
은진언이 손을 들어 흥분한 이들을 제제했다.
“조용하시오. 아직 죄가 밝혀진 게 아니잖소!”
무한이 정식으로 집법당에 고변을 제기했기에 유곡선 살해사건은 범죄가 아니라 방규와 고원의 맹약 조문을 따져 해석해야 하는 사안으로 바뀌었다.
자연 고벽후도 죄인이 아닌 논박의 당사자였기에 금제를 받지 않아야 했다.
무한이 굳이 집법당에 고변장을 제출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군사부는 마치 죄인처럼 보이도록 했다.
무한은 내심 분노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지금 나서서 포박을 풀라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금만 참으세요, 대형.’
고벽후는 무한의 시선을 모른 척 흘리고, 도왕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취한 후 턱을 치켜들고 당당히 대전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오연한 고벽후의 태도에 유곡명이 더욱 분노했다.
“죄가 없다니! 작전을 수행하는 장로를 시해한 게 죄가 아니면 대체 뭐가 죄란 말이오!”
유곡선의 출신가문 심천유가(深川劉家)는 오대세가에 필적할 만한 가문으로 천하방 상위문파에 속한다.
이에 동조하여 대전 안 곳곳에서 탄식성이 흘러나왔다.
“장로를 살해하고도 저렇게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다니!”
“변방의 기강이 엉망이구나.”
다시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은진언이 고함을 질렀다.
“조용! 조용하시오! 여기는 천하대전이오! 자중하시오”
이어 고벽후를 향해 말했다.
“멸마대주는 유곡선 장로 살해혐의로 이 자리에 있음을 아는가?”
모두의 시선이 고벽후에게 꽂혔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살해가 아니라 방규에 따라 고원의 맹약을 집행한 것이오.”
대전 안의 사람들이 흠칫, 놀라 서로를 봤다.
방규에 따라 장로를 죽였다고?
“유곡선 장로는 천하방과 마천이 맺은 고원의 맹약을 어겼고, 맹약 집행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소.”
그러자 유곡명의 입에서 고함이 터졌다.
“무슨 개소리냐, 이 살인자야! 방의 작전을 수행하는 장로를 시해하고 무슨 낯으로 뻔뻔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
“그러게 말야. 무력대주가 지부를 내주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군.”
“천하방 형제를 살해하였으니 엄벌에 처해야 하오.”
대전과 아래 광장에서 동시에 비난이 쏟아졌다.
유곡명이 고벽후를 노려보며 말했다.
“마천 따위와 맺은 협정이 뭐라고 본방 장로를 시해한단 말이냐! 작전에 오류가 있었다면 본방에 이의를 제기하여 시시비비를 가렸어야 할 일!”
유곡명이 광장에 있는 유가족을 가리키며 참담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봐라. 네 독단으로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이들의 처참한 심경이 보이지도 않느냐! 시신조차 못 찾았다! 어찌 그리도 잔인하단 말이냐?”
유곡명의 호소는 승룡대와 현무대 유가족들의 마음도 자극했다.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고벽후를 찢어죽일 기세로 돌아갔다.
“하하하.”
고벽후가 크게 웃었다.
“저, 저런 무도한 놈이 있나? 여기가 어디라고!”
“제정신이 아니로군.”
여기저기서 호통과 비난이 쏟아졌다.
문득, 고벽후가 웃음을 멈췄다. 좌중을 돌아보는 그의 눈이 이글이글거렸다.
“십육 년!”
벼락같은 그의 고함에 모두가 움찔했다.
단상의 도왕과 권왕마저 흠칫하여 고벽후를 보았다. 고함에 실린 내기가 심상찮다는 걸 짐작한 것이다.
“먼지바람을 뒤집어쓰며 십육 년을 마천과 싸워왔소! 그런 내게 한마디 상의 없이 작전을 펼치고, 심지어 고원의 맹약마저 깨뜨린 자가 누구요?”
고벽후의 눈에 불이 붙었다.
“모두 오해하고 있나본데…….”
그의 시선이 군사부와 장로석으로 향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건 고원이 맹약을 깨뜨린 자를 잡아 처단하기 위함이오!”
“뭐, 뭐라고?”
“저런 미친놈이 있나!”
고벽후의 선언에 대전 안이 뒤집어졌다.
장로를 살해하고도 모자라 또 누구를 잡겠다고?
도왕과 권왕마저 미간을 찌푸렸다.
고벽후의 시선이 무한을 슬쩍 스쳤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냐?’
무한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고벽후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가 이내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맹약의 집행자로 천무행 작전의 입안과 진행과정에서 맹약에 어긋나는 결정을 한 자!”
이어서 군사부와 장로들을 노려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대전 안 대부분은 고원의 맹약에 대해 몰랐다. 체결 당시에도 세부 내용까지 아는 이가 없었다.
맹약이 선포된 지 팔 년여 세월이 흘렀기에 그저 마천과 휴전조약을 맺었다고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대부분의 이들에게 감숙 변방의 일은 관심사 밖이었다. 그러니 자꾸만 거론되는 고원의 맹약이 뭔지 궁금했다.
“대체 고원의 맹약이 뭐기에 장로를 시해하고도 저리 뻔뻔한 것인가?”
누군가 중얼거리듯 중얼거리는데 무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원의 맹약에 관한 사안은 여기 적혀 있습니다.”
무한이 가져온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고원의 맹약 조항이 적혀 있고, 말미에 적힌 글은 맹약 집행자의 권한을 밝혀 놓았다.
모두의 눈에 들어온 조항.
- 맹약의 집행자는 위 조항을 어긴 자를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즉결처분할 수 있다.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그렇다면 천하방주나 마천주까지도 포함이 된다.
“말도 안 돼!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결정할 수 있잖아!”
“아무나 죽여 놓고 맹약을 어겼다고 뒤집어씌우면? 누가 저런 조항을 인정했단 말이냐?”
대전 안이 삽시간에 시끌벅적하였다.
확실히 유례없는 조항이었다.
“맹약 자체가 애초에 잘못됐어!”
맹약의 파기까지 거론되었다.
그러자 무한이 상석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와 단상 아래 서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를 취했다.
“…….”
모두의 시선이 무한에게 쏠렸다.
무한이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으며 입을 열었다.
“고원의 맹약은 당시 검천부주께서 방주의 명을 받아 체결한 것입니다. 맹약에 문제가 있다고 하니 검천부주로서 당시 상황을 말씀드려야겠군요.”
낭랑하고 담담한 어조에 머리가 맑아지는 것만 같다.
대전 안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모여 있고, 이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보통사람은 물론이고 무공을 익힌 자들도 주눅이 들 정도다.
“당시 마천과의 감숙 경계를 두고 일진일퇴하며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매년 사상자가 일천여 명을 넘었지요.”
무한은 수많은 수장들 앞에서 일점 흔들림 없이 할 말을 이어갔다.
“십여 년 간에 걸쳐 전면전에 버금가는 수많은 생명과 끝없이 자금을 퍼붓던 분쟁을 매듭짓기 위해 방주와 마천주가 결단을 내린 조약입니다. 다시는 그런 희생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이 같은 강수를 둔 것이죠.”
무한이 고원의 맹약 체결 이유와 과정, 그럴 수밖에 없는 사항을 짚었다.
맹약을 주관한 검천부의 후계자로서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니 누구 하나 제지할 수 없었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고 맹약을 위반하고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천하에 천하방이 설 자리는 없을 겁니다.”
무한은 말을 마칠 때쯤 도왕을 향하여 예를 취했고, 도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는 뜻이다.
무한의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담긴 내용은 강력했다.
- 맹약을 무시하면 천하방은 설 자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