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지금 천하방에서 도천부의 위세는 그야말로 방주에 버금간다 할 수 있다.
도천대 일조장 마철립.
밑바닥에서 일조장까지 오르는 동안 수많은 싸움을 겪었고 승리해왔다. 그런데도 늘 신검무적대보다 한 수 뒤진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 신검무적대가 거의 해산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제 천하방 제일 무력대는 도천대다.
마철립은 그 위상을 제대로 누리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 지난날 받았던 설움을 되돌려 줄 기회를 잡았다.
애송이가 멀뚱멀뚱 마철립을 쳐다보며 물었다.
“나를? 무슨 일로?”
“당가장로 암살사건으로 상의하고자 하십니다.”
마철립이 바로 덧붙였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대공자께서 직접 당가 장로 암살사건을 조사 중이십니다.”
이제 무슨 상황인지 알겠지? 마철립이 을러댔으나 애송이는 시큰둥했다.
“그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대공자께서 당가 장로 암살사건으로 상의를 하고자 하신다고요.”
“이상하군. 그가 뭔데 이 사건에 개입하는 거지?”
“그건…….”
마철립은 말문이 막혔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뭐야? 대공자께서 암살사건을 조사 중이고, 도움을 주겠다는데 좋아라 하며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마철립이 당황했다.
“나는 그와 상의할 일이 없다. 가봐라.”
무한이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젓고는 일어나서 안채로 들어갔다.
“대공자께서는 호의로…….”
마철립이 굳은 얼굴로 나가는 무한에게 다가서는데 귀영이 끼어들었다.
“이봐. 부주께서 나가라고 했잖아. 왜 지저분하게 들러붙어?”
마철립이 홱, 고개를 돌려 귀영을 노려보았다.
“뭘 봐? 심부름꾼 주제에 감히 누구 앞에서 야리는 거야?”
저렴한 귀영의 말투에 마철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도천대 일조장의 위상은 도천부는 물론 천하방에서도 제법 높은 편이다.
“너, 넌 뭐냐?”
“부주 호위이자 특임감찰 호위다.”
“뭐야, 호위 주제에…….”
그러다 복도로 들어가는 무한의 뒷모습에 말을 끊고 다가가며 외쳤다.
“부주!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고우 대공자께서 부르신다고 했잖습니까?”
무한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할 말 있으면 오라고 해라.”
“예?”
무한이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보다 그냥 돌아서자 마철립이 외쳤다.
“천하사패에 대한 우의로 제가 직접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욕을 받다니. 이건 도천부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그대로 사라지는 무한.
뒤따라가는 마철립을 귀영이 막았다.
“네가 뭔데 직접 왔다고 생색내는 거지?”
“도천대 일조장 마철립이다. 비켜라. 지금 네 주인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안 보이나?”
“미친놈!”
귀영이 비웃었다.
“네놈이 도천대 일조장이든 뭐든, 심부름 온 놈이면 하인이지. 할 말 있으면 내게 해라.”
“뭐라고?”
“하인이 하인과 이야기하는 게 뭐가 잘못됐냐? 우리 주인께서 볼 일 없다니 하인 놈은 조용히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하면 된다. 그것도 모르고 하인 노릇하는 거냐?”
그러고는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뻗대다 맞지 말고.”
마철립의 눈에 불이 튈 것만 같았다.
한 가닥 이성이 도집으로 가려는 손을 잡았다.
여기는 검천부.
무한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마철립이 이를 갈며 말했다.
“대공자께 그대로 전하겠다.”
후회할 거다…… 라는 말을 삼킨 마철립이 귀영을 노려보던 시선을 휙, 거두고 그대로 돌아가 나갔다.
***
쾅!
고우가 탁자를 내리쳤다.
“이 새끼들이…… 감히 내 명을 거역했다는 것이냐?”
무한과 선우휘를 불러들였는데 둘 다 오지 않았다.
그의 앞에 도천대주 신악강과 일조장 마철립이 서 있었다.
“대주, 도천대 위상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요?”
고우가 엉뚱하게도 신악강을 질책했다.
신악강이 덤덤한 얼굴로 예를 취하며 말했다.
“이건 도천대의 위상과 다른 문제입니다.”
“그럼, 그러면 내가 문제라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건 천하방 명령체계의 문제입니다.”
정중하게 대답하면서도 신악강의 가슴은 답답했다.
이건, 네가 선을 넘은 거야. 무한과 선우휘는 공식적으로 조사 권한이 있고 너는 없잖아.
차마 그 말을 뱉을 수 없다.
도왕과 함께 도천대를 키워온 무인 신악강.
적들 앞에서는 한 자루의 도를 들고 날뛰는 비천광도(飛天狂刀)라 불리지만, 머리 또한 영리한 인물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도천대를 지금과 같이 키워내지 못했을 것이다.
도왕의 아들 고강후에 이어 손자에게 도천대 지휘 권한이 넘어갔는데, 어째 갈수록 못난 녀석들이다.
핏덩이 때부터 봐온 녀석이 머리 위에 앉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리 경우가 없으니 감당하기 어렵다.
‘진작 은퇴했어야 하는데…….’
무력대의 수장 노릇을 할 나이가 훌쩍 지났음에도 도왕은 그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신악강의 뒤에 서 있던 마철립이 입을 열었다.
“검천부주는 대공자께서 이 사건에 개입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철립의 말에 고우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오르는데, 신악강이 돌연 뒤로 돌더니 마철립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이 새끼가…… 간단한 심부름도 제대로 못 한 놈이 터진 입이라고 주둥이를 나불거려? 지금 네 추측을 듣자는 거냐?”
의외의 전개에 고우가 입을 딱 벌렸다.
“이 새끼!”
신악강은 정강이를 걷어차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따귀를 사정없이 날렸다.
가슴에 쌓인 울화를 수하에게 풀면서도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철립 이놈은 고강후가 자신의 턱밑에 꽂아놓은 비수이니까.
짜악.
어금니가 나갈 것 같은 따귀를 맞으면서도 마철립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세 번째 따귀에는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황급히 부복하며 마철립이 외쳤다.
“죄송합니다. 대주!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무조건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신악강은 그에게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두려운 존재. 눈조차 마주할 수 없었다.
신악강이 몸을 돌려 고우에게 예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소주. 수하의 잘못은 바로 처리하는 걸 원칙으로 하다 보니 험한 꼴을 보였습니다.”
시뻘건 신악강의 눈과 마주치자 고우가 움찔했다.
신악강은 사실 그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다. 도왕 밑에서 커왔으며 아버지 고강후도 무시 못 할 도천대 그 자체였으니까.
고우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도천대가 왜 천하방 제일무력대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군요.”
그 역시 신악강이 왜 마철립을 때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유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부복한 마철립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신악강의 두툼한 손바닥에 맞은 뺨이 얼얼한데, 엉뚱하게도 귀영의 말이 스쳤다.
‘심부름 온 놈이면 하인이지.’
***
눈앞에서 흉수와 목격자를 잃은 선우휘는 견책이라는 징계를 받았으나 지위를 잃지는 않았다.
독이 오른 선우휘는 성 밖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당시 천하방 성문이 닫혀 있었으니 무한이 목격자와 흉수를 검천부로 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숨을 만한 안가를 싹 뒤지고 있는 중이다.
선우휘가 성 밖을 들쑤시는 동안 무한은 배속된 감찰조사관들과 함께 천하방 여러 기관을 차례차례 감찰했다.
그런데 무한 역시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감찰호위로 격상한 귀영은 초조해졌다.
“그놈을 고문해서 배후를 밝혀야 한다고요. 이러다간 무능한 특임감찰이 될 겁니다.”
천하대전에 참석하기 위해 복장을 갖춰 입은 무한이 커다란 동경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었다.
“조사관 그놈들을 믿는 건 아니겠지요? 그놈들 대충대충 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으세요?”
무한이 장포의 깃을 잡아 바로 세우며 말했다.
“그럴수록 좋은 겁니다.”
“예? 무능한 게 좋은 거라고요?”
“감찰조사관의 임기가 언제까지이죠?”
“그야…….”
“우리가 잡아야 할 자는 흉수가 아닙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신지.”
“특임감찰의 임무는 흉수의 배후이지요. 흉수가 잡혀도 배후가 밝혀지지 않으면 감찰은 계속되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당분간 특임감찰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이게 의외로 아주 도움 되는 직책이더군요.”
“그러다 무능하다고 짤리면요?”
“아직 조사해야 할 곳이 많이 남았는데 누가 중도에 특임감찰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말입니까?”
“천하방 기관은 거의 다 감찰했는데…….”
“피해자 쪽도 조사해봐야죠.”
“피해자……? 당가 말입니까?”
“이게 당가 내부의 암투라면?”
“에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렇다고 해도 굳이 천하방에 와서 일을 벌일 이유가 없죠.”
무한은 피식, 웃었다.
이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조만간 당가로 갈 겁니다. 가서 두어 달 있을 것이니 준비해두세요.”
“당가로요? 사천 말입니까? 거기는 흑천의 세력도 꽤 크다던데…….”
뜬금없는 외유에 어리둥절해 하는 귀영을 뒤로하고 무한은 검각을 나섰다.
천하대전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천하대전(天下大典).
천하방 모든 문파가 모이는 대회합.
무한은 지난날 할아버지 심양조의 손을 잡고 들어섰던 천하대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오늘 광경 또한 그때와 다르지 않다.
천하대전에 빼곡히 앉아 있는 문주들이나 대리인들 앞에 개인상이 놓여 있었다.
앞 광장에도 수많은 이들이 개인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문주를 따라온 각파의 사람들이다.
어지간한 사람은 숨도 쉬지 못할 엄숙한 분위기.
무한은 천천히 대전으로 들어갔다.
북쪽 단상에 놓인 천하사패의 자리.
지난날과 배치가 약간 달라졌다.
오른쪽 가장 상석부터 도천부, 패천부, 기천부 그리고 말석이 검천부다.
이중으로 된 단상 한 칸 아래쪽 좌우에는 고강후와 강유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무한은 고강후의 번뜩이는 시선을 받으며 단상 상석 자신의 자리에 올라앉았다.
이를 보는 고강후의 눈에서 질투와 시기에 찬 광망이 흘러나왔다.
자신은 아직도 도천부의 대리인일 뿐이데, 저 어린놈은 상석에 앉아 검천부를 대표하다니…….
체면을 더없이 중요하게 여기는 고강후는 상석이지만 한 칸 아래 앉아 있어야 하는 자신의 위상이 치욕스러웠고, 아버지 도왕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왜 아직도 도천부주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는 걸까.
아니, 천하사패를 해체하자는 자신의 제안을 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온갖 생각이 스쳤다.
대전 안의 모든 문주들 역시 이 배치를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심지어 고소해하는 시선까지 느껴진다.
‘올해까지만 참자!’
천하사패를 해체하여 방주 휘하 모든 문파가 동등하게 대우하는 안건을 장로전에 제출해 놨다.
‘그리되면…….’
방주 아래 모든 자리는 단상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차기 후계자로 옹립되면 방주 아래 자신만 오롯이 앉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연로한 데다 무공에만 관심이 있으니…… 사실상 방을 운영할 수도 있지.’
그날 상석에 앉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고강후는 지금의 치욕을 억누르며 다시 한 번 무한을 봤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한이 슬쩍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그러니 더욱 열이 솟아 눈알을 부라렸다.
그의 속을 알기라도 하듯 무한은 고소를 지어 보였다.
‘저 새끼가?’
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무한이 시선을 돌렸다.
그게 마치 너 따위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듯하여 더 속을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