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무흔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그도 아는 바가 많지는 않았다.
무한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무흔은 그게 생소했다.
무한의 성장 과정이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출생과 신분에 관한 비밀을 듣고도 이렇게 냉정할 수 있다는 것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으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무한이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무흔을 보았다.
무흔이 무얼 묻는지 안다.
무한은 대답 대신 물었다.
“흑천에서도 제 존재를 알고 있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다만, 흑천노조께서 알고자 한다면 숨길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흑천이라 에둘러 물었는데 무흔은 바로 알아듣고 흑천노조도 알고 있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다시 침묵이 흐르고.
어느 순간 무한이 앞에 놓여 있던 전낭을 다시 밀었다.
“무슨 뜻이십니까?”
“떠나시라는 겁니다.”
늘 무심했던 무흔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잠시 후 무흔이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연이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지요?”
모종의 결단을 내린 무흔의 표정에서 심각함을 느낀 무한이 물었다.
“제가 잠시 임무를 망각했습니다. 부주의 안전이 최우선인데 사적 인연으로 연이설을 구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무흔 대협이 흑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제 흑천과 무관합니다.”
“아니요!”
무한이 말을 잘랐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
무흔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무한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자신이 흑천에서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한에게는 독이 된다.
“연 낭자가 특별한 분 같더군요.”
“그런 건 아닙니다.”
무흔은 부인했으나 스스로도 옹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 낭자를 데리고 떠나세요.”
“부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무흔은 망설였다.
무한이 흑천의 밀정 연이설을 그냥 보내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아는 까닭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흔이 조용히 일어나 예를 취하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무한은 무흔의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 순간 초가 꺼졌으나 그마저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의식은 방 안의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을 유영했다.
혼란스러웠다.
어머니를 찾고 싶은 충동과 어린 아들마저 속인 것에 대한 배신감이 동시에 들었다.
할아버지의 안배에 따라 초절정에 이른 무공을 얻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피붙이 하나 없이 보이지 않는 적의 칼을 의식하며 복수를 위해 살아온 지난 팔 년.
보통 사람이라면 몇 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어머니가 의도한 바였다니…….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음속 어딘가 의지를 잇던 끈이 툭, 끊어진 느낌이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나를 천하방에 들여보낸 진정한 의도가 뭘까?’
어머니가 자신에게 천하의 주인이 되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흑천을 위해서?’
흑월과 사천의 연합으로 탄생한 흑천.
자신은 흑천노조의 외손자가 된다.
강호에 이런 신분이 있을까?
백도가 숭상하는 천하제일인의 손자이자 백만 흑도의 종주라는 흑천노조의 손자.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흑백 양도에서 환영받지 못할 존재다.
흑백 양도 간의 간격은 무척이나 크다. 둘 사이에는 피의 강이 흐르고 있다.
백도는 흑천노조의 외손자로 볼 것이고, 흑도 역시 그를 천하제일인의 손자로 볼 것이다.
그야말로 칼날 위에 선 셈이다.
***
중원 곳곳에서 올라오는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보고서.
손우자는 대충 훑어보고 책상 위로 툭, 던져 놓았다.
이상하게도 머릿속 신경 한쪽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양쪽 이마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손우자는 그게 추노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추노는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예가 없다.
지금 천하방에서 추노가 상대할 수 없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 방해자가 있었습니다.
-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제 아래는 아니었습니다.
왠지 자꾸 그 말이 떠오른다.
머릿속이 뻑뻑하다.
“후우.”
두 손으로 눈두덩을 문지르고는 마른세수를 해도 안개가 낀 듯 뿌옇다.
손우자가 서랍에서 가루약 한 포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약을 달고 산 지 벌써 십 년여.
잠시 후 온몸이 나른해지고 정수리가 열리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짓누르던 피로가 사라지고 마치 하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듯 모든 게 명확하게 보인다.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세상.
얽히고설킨 인과 연을 따라 더듬어 가던 그의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심무한…….’
그래 너였구나.
왜 심무한이 떠올랐는지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무의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답은…… 대개 맞았다.
일각 후.
손우자는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보고서에 파묻혀 졸고 있는 모습은 총군사가 얼마나 격무에 시달리는지 보여준다.
보고서를 들고 왔던 부사 하나가 존경의 눈초리로 손우자를 보다 조용히 돌아나갔다.
***
귀영이 인상을 쓰며 들어왔다.
“독한 놈이네요.”
그의 옷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듯하자 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문했습니까?”
“고문이라뇨. 좀 만져 준 것뿐입니다. 배후가 누군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무한이 한숨을 쉬었다.
귀영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추노는 고수다. 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무한의 무공을 몰랐기 때문에 방심했던 결과다.
그런 고수가 귀영의 고문에 입을 열 리가 없다.
“고문할 필요 없습니다. 잘 가둬만 두세요.”
세모꼴 눈의 노인은 귀영이 은신처로 쓰던 성 밖 마을 흉가 지하실에 갇혀 있다.
“반드시 살려둬야 합니다.”
“제가 사람 죽이고 그러는 사람 아니거든요?”
“멀쩡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무한이 서늘한 눈으로 쳐다보자 귀영이 움찔, 하더니 볼멘소리를 하였다.
“범인을 잡았는데 왜 시간을 끄시는 겁니까? 지금 딱, 내놓고 내가 해결했다 하면 바로 부주의 위상이 천하방을 흔들 건데요.”
무한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피를 흘릴 이유는 없다.
그자는 누군가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조급한 자는 그자를 잃은…… 그 누군가일 것이다.
‘손우자…….’
그자 하나가 아닐 것이다.
또 누가 있을까.
그때 수문무사가 보고했다.
“추각주가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 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우휘가 들이닥쳤다.
“무슨 일입니까?”
선우휘가 무한을 노려보다 말했다.
“내가 부주를 잘못 본 것 같소.”
선우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무한의 집무실을 둘러봤다.
검각 집무실은 아버지가 쓰던 곳이다.
“선대의 유산을 이어받아 호의호식하는 도련님이라고 본 건 미안하게 됐소.”
선우휘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잦아들었다.
“내놓으시오.”
흉수를 내놓으라는 말이다.
“…….”
“내가 분명히 말했소. 추각의 일에 개입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
“그날 밤 강변에 검천부 사람들이 깔렸던 걸 알고 있소.”
선우휘는 나름 조사를 하고 왔다.
무한은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차가 떫었다.
추각에서 눈치챌 거라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한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나의 일을 할 뿐입니다.”
선우휘의 송충이 같은 검미가 꿈틀했다.
“나 역시 분명히 말했는데, 잊은 모양이군요. 추각 역시 조사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추각이 목격자와 범인의 행적을 파악하고도 눈앞에서 놓친 건 감찰대상입니다.”
“그게 말이 되오?”
“말이 되지 않으면? 제멋대로 범인을 쫓다 놓치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선우휘를 바라보는 무한의 눈빛이 더없이 서늘했다.
선우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으나 대꾸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성 밖 경비대와 협조하여 잡았어야 했다.
배후를 캐기 위해 은밀하게 잡으려 했다는 변명을 하기에는 결과가 너무 좋지 않았다.
“알겠소. 추각이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두시오.”
선우휘가 그대로 돌아섰다. 부탁을 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나가는 선우휘를 보며 귀영이 중얼거렸다.
“저놈…… 힘으로라도 그 늙은이를 빼 갈 모양인데요?”
“뒤를 밟히지 말아야겠군요.”
“에이…… 귀찮게 됐네.”
***
성 밖 마을 백가상단의 지부.
내실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크으으…….”
하얀 금창약 가루가 뿌려지자 마치 불에 덴 듯한 아픔에 연이설은 자기도 모르게 연신 신음성을 흘렸다.
등 왼쪽 척추 옆으로 범의 발톱이 훑고 지나간 듯 긴 상처가 나 있다.
“이걸 어째. 이 고운 등에 끔찍한 흉터가 나겠네.”
유아가 상처 주위를 따듯한 물로 닦고, 금창약을 뿌린 후 붕대를 묶어 주었다.
“고, 고마워요.”
연이설은 쓰라림을 참으며 유아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다.
“움직이지 말고 쉬어요. 상처가 커서 다시 터질 수 있으니까.”
유아가 신신당부하고 나갔다.
가만 엎드려 있으니 고통이 가라앉는다.
‘이럴 때가 아닌데.’
흑천의 밀정이라는 게 발각됐으니 한시바삐 도주해야 한다.
‘무흔…….’
집에서 습격 받았을 때, 그리고 곡물창고 앞에서 죽을 뻔 했을 때 나타난 흑의복면인.
두 번 다 경황이 없어 대화를 나눌 수 없었지만 누군지 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이니까.
흑월주의 암중호위가 왜 천하방 검천부에 의탁했을까?
흑선수사(黑扇秀士)가 잠적한 무흔이 천하방에 머무는 것 같다고 했을 때 그럴 리가 없다고 코웃음 쳤다.
‘무흔은 배반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라고…….’
그녀가 타박했을 때 흑선수사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모습이 떠오른다.
‘단조. 네 말이 맞았어. 무흔이 여기 있었어.’
혹시 하는 마음에 천하방에 잠입한 지 삼 년.
무흔의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는데 뜻밖의 사고를 당하자마자 나타났다.
‘내가 있었던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왜 지금은 모른 척 하는 거지? 정말 흑천을 배신했나?’
무흔이 검천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자신을 모른 척하는데 실망했다.
‘무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때 스르륵, 허공이 일렁이고는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흔?”
무심한 얼굴의 무흔이 연이설을 바라봤다.
“…….”
연이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꾸중을 듣는 분위기에 말문이 막혔다.
이윽고 무흔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자.”
그날 밤 무흔은 연이설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
***
“도천 일조장 마철립입니다. 대공자의 명을 받고 부주를 모시러 왔습니다.”
딱 벌어진 어깨에 깔끔한 무복 왼쪽 가슴에 금색수실로 수를 놓은 도천(刀天)이라는 글귀가 유난히 선명했다.
마철립은 마치 당연히 가야 할 것 같은 무례한 태도로 말했으나 무한은 덤덤하게 물었다.
“대공자?”
마철립이 아, 하고는 다시 말했다.
“도천부 고우 대공자의 명입니다.”
비록 예를 취했지만 말투는 한없이 무례했다.
도천부 무사는 무한을 앞에 두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무한을 훑어보았다.
‘역시 애송이군. 조부의 유산을 물려받아 과분한 대우를 받는 애송이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