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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100화 (100/250)

100화

아무도 없는 지붕에 울려 퍼지는 무한의 목소리.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무흔의 전음이 들려왔다.

- 저 여인을 구출하면 추각원들이 저자를 잡기 수월할 겁니다.

무한이 현장을 보았다.

추각원들은 자객으로부터 연이설을 보호하느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고전 중임에도 증인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무한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자 무흔의 기척이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무흔의 기척을 따라 무한의 시선이 이어졌다.

군사부를 통해 연이설이 흑천의 밀정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무한이다.

‘무흔…… 흑천과 무슨 관계인 거지?’

오늘 밤도 대놓고 묻지 않았다면, 무흔은 연이설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엇!”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는 연이설의 신형에 추노는 물론이고 추각원들까지 놀랐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추노는 물론이고 추각원들 그 누구도 쫓을 수 없었다.

추노는 추각원들을 뚫을 수 없었고, 추각원들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추노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추각원 무사들이 연이설을 쫓으려 했으나 그녀를 앉은 무흔은 순식간에 담을 넘어 사라졌다.

“으아아!”

연이설을 놓친 추노는 광분했다.

쉭쉭쉭!

원뿔형 쇠추가 허공을 찢어발기듯 사방으로 비산하자 추각원들은 피하기 바빴다.

“컥!”

추각원들의 합격진이 흔들렸다.

그사이 추노는 강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잡아!”

선우휘가 다급하게 외치며 뒤따라 몸을 날렸다.

그에 앞서 추노와 가까이 있던 추각원도 몸을 날렸는데.

쉭!

퍼억!

강물 속에서 쏘아져 나온 원뿔 쇠추가 추각원의 면상에 꽂혔다.

추각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강물로 떨어졌다.

선우휘는 물속으로 잠기는 수하의 몸을 잡아 끌어냈으나 이미 죽었다.

선우휘가 쇠뇌를 꺼내 강물 속 어딘가로 쏘았다.

추각원들 역시 연달아 쇠뇌를 발사했으나 되돌아오는 건 없었다.

“이…….”

선우휘는 부릅뜬 눈으로 밤 속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노려보았다.

자객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충분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수하들만 잃고 놈을 놓치고 말았다.

삐익!

뒤늦게 달려오는 경비대의 호각소리가 요란하다.

“자객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하구 경비대에 연락하고 수색선을 띄워라! 너희는 부상자를 의방으로 옮겨라!”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그제야 협조를 요청한 선우휘.

굳은 얼굴로 추각원을 돌아보고는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선우휘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만의 대가를 뼈저리게 치렀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추노는 강물을 거슬러 올랐다.

한적한 갈대밭에 몸을 숨긴 추노가 복면과 야행복을 벗었다.

안에 입은 옷은 평범한 갈의.

추노가 바위 밑에 야행복을 감추고 일어서 갈대밭을 나서는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무한이었다.

“……?”

느닷없이 길을 막는 무한을 본 추노가 두려운 목소리로 떠듬거리며 말했다.

“뉘신데…… 길을 막는 게요?”

약간 굽은 허리까지 완벽하게 늙은 하인으로 바뀐 추노.

“역시 천하방 사람이었던가?”

무한의 담담한 한마디.

추노는 상대가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왔다는 걸 알았다.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두려움에 떠는 척 한 걸음 물러나던 추노가 소매를 휘둘렀다.

쉭!

원뿔형 쇠추가 무한을 향해 날았다.

텅!

놀랍게도 무한은 손목으로 쇠추를 가볍게 쳐냈다.

순간 달려드는 추노.

한 손은 밑에서 쳐올라오고 다른 한 손은 어깨에서부터 쏘아져 왔다.

‘반추장(半椎掌)’

선 동작 없이 그대로 쏘아지는 장이지만 위력만큼은 바위를 깨뜨린다는 내가장법이다.

무한은 당가의 장로가 장법에 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뿔형 쇠추는 당연히 이목을 끌기 위한 수법.

반추장을 보자 비로소 흉수임을 확신했다.

스르륵.

무한의 신형이 옆으로 흐르며 검집으로 추노의 턱을 노렸다.

순식간에 무한을 놓쳤지만 추노는 당황하지 않고, 다리를 걸며 앞으로 내밀던 손바닥을 휘감아 내려쳤다.

능수능란한 임기응변이 산전수전을 헤쳐 온 고수임을 증명했다.

다만 상대가 나빴다.

고벽후를 통해 온갖 박투술을 익힌 무한이다.

삼재보법으로 흐르듯 추노의 뒤로 돌자 추노는 앞으로 일 장이나 나가서 몸을 돌렸다.

추노는 무한의 공격을 예상하고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었는데.

따악!

뒤통수에서 이는 화끈한 충격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쿵!

그대로 쓰러지는 추노의 뒤에 귀영이 서 있었다.

“정말 부주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군요. 이놈하고 짜신 겁니까?”

귀영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추노의 양손을 뒤로 하고 묶었다.

***

“집법부 추각에서 당가 장로를 살해한 자객을 쫓았는데 강물로 뛰어들어 도주했다고 합니다.”

보고를 들은 손우자의 미간이 잠시 꿈틀했다.

‘바깥출입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추노의 고집도 만만치 않다.

아마도 그가 드러나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란 생각에 명을 거역했을 것이다.

돌아오면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손우자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사안은?”

“당가주가 호위대를 파견하였고, 곧 도착한답니다.”

천하방을 믿지 못한 당가주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호위대를 늘릴 모양이다.

손우자는 여전히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안건을 물었다.

“다음…….”

언제나 그렇듯 격무에 시달린 손우자는 밤이 이슥해지자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거의 대부분의 밤을 군사부 집무실과 이어진 침방에서 지내는 손우자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은 몇 되지 않는다.

추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이면 돌아올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손우자는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오랜만에 자신의 방에서 단잠을 잤다.

그러나 추노는 아침이 되어 손우자가 다시 군사부로 향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손우자는 염려하지 않았다.

***

아침이 되어서야 무흔의 기척이 느껴졌다.

무한이 무흔이 있는 곳을 향하여 말했다.

“우리 서로 할 얘기가 있는 듯하군요.”

그러잖아도 미심쩍었던 무흔의 출신.

흑천으로 의심되자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자칫하면 복수를 하기도 전에 흑천과 연루되어 검천부가 궤멸될 수도 있다.

스르륵.

무흔의 표정은 평소처럼 무심했으나 오랫동안 봐온 무한은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이설은 흑천의 첩자로 분류된 자입니다. 그런데 무흔 대협과도 인연이 있는 듯해서 묻는 겁니다.”

우선 알고 있는 사실부터 밝혔다. 말속에 덫을 놓고 원하는 바를 끌어내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몇 안 되는 내 사람이니까.

무흔이 흑천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조용히 떠나보내는 걸로 마무리 할 생각이다.

그랬기에 진실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무흔은 주저했다.

일각 여 시간이 흐르고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무흔.

결국 무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호위에서 해직합니다.”

그리고 서랍에서 두툼한 전낭을 꺼냈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을 때 자신을 지켜준 이다.

어떤 의도가 있는지 몰라도 악의는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 묻지 않고 보내려 하였다.

“부주…….”

무흔은 전낭을 받는 대신 예를 취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럴 수 없다니.

무흔은 허리를 굽힌 예를 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저를 부주의 호위로 임명하신 분은…… 부주의 모친이십니다. 그분만이 이 임무에서 저를 해촉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무한은 고개를 갸웃하다 그대로 굳었다.

여기서 왜 어머니가 나오는 거지?

자신을 천하방에 들여보내기 위해 스스로 자진한 어머니…….

천하방에 떠도는 기녀라는 소문은 믿지 않았다.

천목투심술과 같은 투심술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기녀가 어디 있을까?

그랬기에 늘 당당했다. 그 당당함의 밑에는 어머니의 목숨을 딛고 섰다는 죄책감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죄책감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 있는 자를 잡아 처단하겠다는 목표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인 흉수를 처결하고자 스스로의 죽음까지 무릅쓰고 자신을 천하방으로 들여보낸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문득 스치는 생각에 무한이 흔들거렸다.

설마…… 그렇다면?

짧은 순간 수많은 기억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다…….

- 그분만이 이 임무에서 저를 해촉할 수 있습니다.

부릅뜬 무한의 눈이 무흔을 꿰뚫을 듯 쏘아봤다.

“살아계십니다.”

무한이 기어이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엄마가 살아 있다?

그럼 내가 본 것은 뭐란 말인가?

목을 맨 어머니의 시신.

마씨 할아범이 황급히 와서 눈을 가렸고, 시비들이 시신을 수습했다.

“귀식대법을 익히셨습니다.”

이해가 간다.

열 살 어린 무한이 귀식대법이 있다는 걸 생각했을 리가 없으니까.

왜?

왜 자식까지 속이고…….

“밝힐 수 없는 신분이셨습니다.”

무한은 온갖 생각이 뒤엉켜 이어나갈 수 없었다.

무흔의 말이 저 멀리 딴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순간, 정수리를 뚫고 차가운 기운이 천목혈로 흘러들었다.

무한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

늘 안개 속에 갇혀 있었던 느낌의 실체를 알 것 같았다.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같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죽었는데 천하방 검천부주였고, 어머니는 뒤이어 자진했다.

천하제일인이라던 할아버지는 천일고에 당했음에도…… 아들 심군하가 의혹을 남기고 실종되었음에도…… 자신과 아들의 복수는 생각지도 않는 듯 자연스레 죽음을 받아들였다.

무한에게 복수를 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천하방을 해체하겠다는 무한의 말만 듣고 치밀한 안배만 남겼을 뿐이다.

불안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한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더없이 고요했다.

받아들여라…… 지금은 받아들여야 할 때다.

무한의 시선이 무흔을 향했다.

“흑천 사람이셨습니까?”

고요한 물음이 정적을 갈랐다.

“흑천…… 아니, 정확히는 흑월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렇게 냉정하고자 했는데도 묵직한 사실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무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무슨 뜻입니까?”

“흑천노조의 유일한 직계이십니다.”

“…….”

무한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더 놀랍지도 않다.

엄마가 흑천노조의 외동딸?

아버지와 어머니가 왜 숨어 살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도대체 어찌하여 천하방 검천부주가 흑천노조의 외동딸과…….

머릿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던 모습이 스쳐갔다.

비록 어릴 적 기억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늘 조심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는 무흔의 말에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충동이 휘몰아쳤다.

살아 있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

천지간에 홀로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살아 있다.

“부주…… 월주께서는 많은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아니, 이제는 전대 월주라고 해야겠네요. 아버님을 만나면서 월주의 자리에서 내려오셨으니까요.”

무흔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고 목소리는 한없이 무거웠다.

무한은 듣기만 하였다.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들어야 한다.

무흔이 스스로 말하게 두어야 한다.

무한의 천목투심술이 극성으로 발휘되었다.

무흔의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무너지고 베이는 와중에도 두 눈은 더없이 차갑게 다가오는 진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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