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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99화 (99/250)

99화

‘알고 있었어.’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웅크리고 있던 그 세월의 의미를 손우자는 알고 있었다.

검신이 떠난 검천부를 돌아보는 이가 없기도 했지만, 무한 스스로도 고립을 택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검천부에…… 손우자의 눈과 귀가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진 생각.

할아버지 사후 재정을 핑계로 의도적으로 축소한 검천부.

얼마 되지 않은 하인과 경비무사가 전부였는데 그중에 손우자에게 자신의 동태를 전한 이가 있을 것이다.

‘대체…… 누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인물이 없었다.

가장 유력하다면 정체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 무흔 정도.

무흔이 기천부 강유의 소개로 왔다는 걸 감안하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무한의 천목투심술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두 사람의 기질이 너무 맞지 않는다.

누군가 들으면 납득할 수 없는 육감일 뿐이라고 하겠지만 의외로 이런 감이 진실에 가깝다.

답답해진 무한이 정원으로 내려왔다.

자신이 만든 정원을 거니는데 누군가 등롱을 들고 다가왔다.

‘유아?’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이가 유아다.

“한밤중에 여기서 뭐하세요?”

“으응. 생각할 게 있어서.”

무한은 자신이 유아까지 의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 줄 알고 야식을 가져왔죠.”

유아가 들고 온 찬합을 흔들며 웃었다.

두 사람은 정원 돌탁자에 앉아 야식을 먹었다.

“특임감찰을 맡으셔서 골치 아프죠?”

유아가 유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전혀 걱정스러워 하는 말투가 아니다. 오히려 무한이 중요한 직책을 맡은 걸 뿌듯해 하였다.

“감찰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정말 알기 어려운 게 사람의 마음이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러니 이 밤까지 고민하시는 거겠죠?”

유아는 생각 없이 종알거렸다.

어떨 때는 손위 누이 같은 유아가 이럴 때는 여동생 같기도 했다.

유아는 한참 수다를 떨다가 비운 찬합을 들고 갔다.

덜렁거리며 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유아를 의심하다니…….’

그러다 갑자기 굳어버렸다.

‘……!’

무한은 번개처럼 지나가는 생각의 파편을 잡았다.

잠시 후, 무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손우자…… 정말 대단하구나.’

그날 손우자는 몇 마디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를 솔직하게 드러냈고, 아는 바를 밝혔다.

그 과정에 덫을 놓은 것이다.

무한이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깔아놓은 덫.

그것은 자신의 주위 지인들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암수였다.

의심에 의심을 하며 스스로를 고립하는 것.

그게 손우자가 원하는 것이리라.

무한의 눈이 어두운 하늘로 향했다.

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너머에 별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진실은…… 결국 드러날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가려도.’

하나의 의문을 벗겨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

어쩌면 양파와도 같은 게 아닐까.

벗기고 벗기다 보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양파.

그제야 진실은 벗겨낸 하나하나의 껍질 속에 있음을.

‘손우자가 원흉이라면…… 도천부는?’

고강후는 왜 나를 견제하고 있는 거지?

두 사람이 손을 잡았을까?

잡았다고 해도 그 동맹이 견고하지 않을 것이다.

손우자의 의도를 고강후는 모르고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방주 도왕의 태도다.

천무행 작전도, 고벽후의 연금령도 모두 방주의 승인 하에 이뤄진 것이다.

어째서 도왕은 손우자의 전횡을 보고만 있는 걸까?

그 역시 할아버지처럼 모종의 금제에 당한 게 아닐까.

하지만 직접 대면했을 때 천목투심술로 느꼈던 도왕에게서 금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지. 화경의 존재를 내가 어찌 다 파악할 수 있겠어.’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밤새 생각을 정리한 무한은 좌정하여 운기조식을 하였다.

기운이 흐르고, 온몸에 남은 생각의 찌꺼기들이 사라졌다.

***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무한에게 배정된 네 명의 조사관.

감찰단 소속인 그들은 신출내기 무한에게 지휘를 받는 게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건조한 어조로 보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감찰은 만재당입니다. 이미 통보해두었으니 가서 조사하시면 됩니다.”

무한 역시 덤덤하게 지시했고, 조사관들은 간단히 예만 취하고 돌아갔다.

“영 뻣뻣하네요.”

귀영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무한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뛰어난 조사관이라 해도 군사부에서 뭔가를 찾아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무한은 이미 손우자가 섞어 놓은 일 푼의 거짓을 알아냈다.

- 오해하고 있군. 자객은 흑천의 짓일세.

너무나 당연하게 대답한 한마디가 무한의 귀에 거슬렸다.

정황상 흑천의 짓임이 분명했지만, 총군사는 증거도 없이 단정 지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적어도 천하방 총군사라면 심증이나 물증 정도는 대야 했다.

그런데 이어서 알려줄 수 없다고 할 때, 잠시 간격이 있었다.

숨을 한 번 고르는 것에 불과한 짧은 순간이었으나 무한의 천목투심술에 걸렸다.

그리고 뒤늦게 복기하며 그게 거짓을 위한 간격이라고 느꼈다.

만재당으로 간 조사관들이 손우자의 이목을 끌어줄 터였다.

‘그사이 자객을 찾는다.’

자객은 손우자의 곁에 있다.

그리고 무흔과 비등한 실력자이다.

그를 불러내려면 미끼가 필요하다.

그 미끼가 있는 곳은…….

무한의 눈이 어둠 속 천정을 향했다.

“무흔…….”

***

어둠 속에 잠긴 건물 앞을 두 명이 지키고 있다.

‘저기다!’

추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닳고 닳아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늙은 가슴에 한 가닥 희열이 번졌다.

저곳에 숨은 년만 죽이면 지긋지긋했던 자책을 지울 수 있다.

‘나를 알아본 대가다.’

당현전을 죽일 때는 물론이고, 연이설을 죽이러 갈 때도 복면을 했다.

그런데 그녀는 대번 알아보았다.

그 이유도 알고 있다.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세모꼴의 눈.

손우자는 바깥출입을 하지 말라고 했으나 추노는 밤마다 나가 연이설의 종적을 추적했다.

그리고 이제 연이설 그년을 죽일 시간이다.

그날 마수에서 벗어난 연이설은 여전히 성 밖 마을을 떠돌고 있었다.

당가의 장로가 죽은 뒤 천하방은 물론 성 밖 마을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더욱이 수배령까지 내려진 상태.

“후아…….”

어둠 속에서 연이설이 갑갑한 숨을 토해냈다.

성 밖 마을 한 상단의 곡물 창고.

연이설은 수일 째 이곳에 은신 중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안으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

밀정으로서의 본능은 등 뒤까지 바짝 쫓아오는 추적자들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연이설은 등짐을 확인하고 짧은 검을 손에 쥐었다.

이윽고 자시.

“별 이상 없어. 수고하게.”

“에이. 이놈의 밤 근무는 영 적응이 안 돼.”

창고 앞에서 교대가 이뤄지는 틈을 타서 창고 뒤쪽 창문을 열고 연이설이 빠져나왔다.

부피가 크고 무거운 곡물창고 경계는 허술했다.

연이설은 그대로 십여 장 떨어진 뒤편 담을 넘어 골목 끝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 나온 곳은 널따란 강이다.

성 밖 마을에 펼쳐진 경비망을 통과할 유일한 길은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연이설이 등짐에서 수중호흡을 위한 대롱을 꺼내려는데 소리 없이 한 사람이 내려섰다.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살기.

“……!”

연이설이 대롱을 버리고 바로 검을 쥐고 돌아섰다.

두 눈이 보여야 할 복면에 검은 면사가 꿰어져 있다.

연이설은 등골이 오싹했다.

‘세모꼴의 눈!’

그가 아니라면 굳이 눈까지 가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이설은 순간 검을 날리고 강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휙!

어린아이 주먹 만한 원뿔형 쇠추가 날아와 연이설의 등판을 노렸다.

연이설은 위기를 느끼고 몸을 비틀어 피하려 하였으나, 늦고 말았다.

퍽!

척추가 부러지는 건 피했으나 쇠추는 등판을 스치며 타격을 가했다.

“으윽!”

연이설은 척추가 부러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에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쿵!

추노는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의 무릎께에서 쇠추가 흔들거렸다.

이제 보니 쇠추는 투명한 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추노가 쇠추에 연결된 투명한 줄로 연이설의 목을 감으려 했다.

그때.

쉭!

둘 사이를 파고든 강력한 쇠화살이 추노를 뒷걸음질 치게 하였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검은 그림자들.

“…….”

언뜻 보기에도 십여 명이 넘었다.

앞에 선 자는 집행부 추각주 선우휘.

“천하방을 우습게 본 건가? 아니면 정말 내부자인가?”

선우휘의 싸늘한 목소리가 추노의 전신을 감았다.

추노는 혼자였지만 집행부 추각은 수십 명이 움직인다.

연이설의 행적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목격자를 처치하기 위해 자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고, 드디어 추노를 포위할 수 있었다.

추노는 말없이 세모꼴의 눈을 굴릴 뿐이다.

“이상한 복면이군. 눈까지 가리다니.”

선우휘는 복면 속의 얼굴이 정말 궁금했으나 서둘지 않았다.

당가의 장로를 단번에 죽였다면 최소 초절정의 고수라는 뜻이다.

물론 추각의 각원 열 명. 그리고 외곽을 두른 스무 명의 추각 무사들이라면 진경의 고수도 잡을 수 있다.

선우휘는 수하들의 피를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야기 좀 나눠보자고.”

시간이 갈수록 포위망은 두터워질 것이다.

추노 또한 이를 알고 있었다.

미련 없이 연이설의 목에 줄을 감으려 들었고, 선우휘가 곧바로 암기를 날렸다.

뒤이어 추각의 각원들이 사방을 점하며 추노를 향해 달려들었다.

***

무한은 공터가 보이는 건물 지붕에 서서 선우휘와 추노의 대치를 보고 있었다.

옆에선 귀영이 소곤거렸다.

“변위초가 자신했던 이유가 있었네요.”

무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흔을 통해 연이설의 행적을 알아낼 수 있었던 자신과 달리, 선우휘는 현장 흔적만 가지고 연이설을 알아내고, 이를 미끼로 자객까지 잡아낸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다만, 선우휘가 예상치 못한 건 자객의 무위였다.

퍼억!

둔탁한 격타음과 함께 추각원 하나가 뒤로 나뒹굴었다. 바로 그 자리를 메꾼 다른 각원 덕분에 이차공격은 피했지만 아마도 중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싸움은 선우휘의 기대와 달리 흘러갔다.

자객은 선우휘와 추각원들의 합공을 버티며 날뛰었다.

샤샤삭!

추가 달린 이상한 줄을 휘두르는 통에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었다.

추각원들도 피하기 바쁜 판이니 이차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추각 무사들은 감히 달려들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선우휘는 경비대를 부르지 않았다.

호각을 불거나 신호탄만 쏘아도 성 밖 마을 경비대가 몰려올 텐데 굳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명예욕인가?’

수하의 목숨보다 자신의 명예가 더 중요한가?

아니 그게 설령 추각의 명예라고 해도 무한이 보기에는 명분이 되지 않았다.

“저러다 놓치는 게 아닐까요?”

귀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각원 하나가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잘린 팔이 바닥에서 꿈틀거린다.

무한은 말없이 지켜만 볼 뿐이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데 굳이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자객의 추포는 일차적으로 추각의 임무.

특임감찰인 자신은 자객과 결탁한 내부 세력을 파악하는 것이다.

자객이 설령 추각원을 몰살한다 해도 빠져나갈 수는 없다.

섬서로 간 염량을 제외한 방옥헌, 조공하, 문역기가 사방에 은신하고 있다.

그 뒤로 한때 신검무적대의 일원이었던 검천부의 가솔들이 포진하고 있다.

또한 선우휘가 부르지 않아도 싸움이 길어지면 경비대가 달려올 것이다.

그때, 뒤에서 무흔의 기척이 느껴졌다.

무한이 천천히 상반신을 돌려 텅 빈 지붕 위를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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