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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98화 (98/250)

98화

무한의 한마디 한마디는 참관인들의 의문을 대변했다.

“맞아!”

“애초에 무리한 작전을 승인한 장로전에도 책임이 있어!”

참관인들이 맞장구치고 장내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땡, 땡, 땡…….

대장로 갈천경이 탁자에 놓은 작은 종을 연달아 두들겨 모두를 침묵시켰다.

갈천경이 무한을 보며 말했다.

“검천부주는 신중해야 할 걸세. 방의 작전은 결코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 이해할 수 없지. 드러낼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는 말일세.”

“그게 형제들의 목숨보다 중요한 일이라면 수긍해야겠지요.”

수긍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무한이 물러나지 않자 대장로 갈천경도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냉랭하게 굳히고 물었다.

“그래서 대체 어쩌자는 건가?”

무한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천하사패에 주어진 권한이 몇 가지 있더군요.”

내공을 실은 목소리는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멸마대 처분과 천무행 작전에 대한 시시비비를 천하사패! 검천부의 이름으로 천하대전에 가져가겠습니다.”

“……!”

일순 장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천하대전.

천하방 모든 문파가 모이는 천하대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한은 그 자리에 멸마대 처분과 천무행 작전을 올려놓겠다고 선언했다.

“뭐야? 누구 맘대로!”

장로 하나가 호통을 쳤다.

그러자 대장로 갈천경이 손을 들었다.

“천하방 문파는 어떤 사안이든 천하대전에 올릴 수 있소.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 다섯 문파의 동의가 있어야 하오. 그러나 천하사패는 바로 천하대전에 안건을 상정할 수 있소. 검천부주는 그 권한을 쓰겠다는 말이오.”

갈천경이 무한을 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장로 호중석이 벌떡 일어나 탁자를 내리쳤다.

“말도 안 돼. 이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무한이 호중석을 향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장로께서 천하방의 규정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놀랍군요.”

그러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장로전을 나갔다.

호중석의 안색이 벌겋게 물들었다.

장로들은 물론 수많은 참관인이 배석한 자리에서 어린놈에게 면박을 당했다. 호중석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저 새끼를!’

***

무한이 장로전에서 치받은 사건은 천하방 곳곳으로 빠르게 퍼졌다.

이제까지 없었고, 그러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천하방 곳곳에서 설왕설래했다.

“어린놈이 제대로 미쳤군! 저러다 소리 소문 없이 죽고 말거야.”

“제아무리 검천부주라지만…….”

“대장로가 노기로 울화가 치밀어 온종일 거처에서 나오지도 않으셨다네.”

“아무래도 집안에 가르치는 어른이 없어서 그래.”

무한을 두둔하는 이들도 있었다.

“규정에 있는 대로 한 거니 잘못한 건 아니지.”

“흥! 장로전이 그동안 안하무인으로 군림하긴 했어.”

“언제고 누군가 짚었어야 할 일이었어.”

모인 사람들마다 무한이 벌인 소동을 이야기하니 자연 멸마대와 천무행에 대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천무행을 다녀온 문하생이 있는 집안에서부터 서서히 당시 있었던 일이 퍼졌다.

천하방 군사부 회의실에서도 무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심 부주가 선을 넘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군사부까지 물고 들어갈 것 같습니다.”

삼군사(三軍師) 문요가 말을 꺼냈다.

총군사 손우자와 세 명의 군사.

이들이 천하방을 관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무행 작전을 입안한 책임을 물으려 들 겁니다.”

문요가 손우자를 보았다.

어디선가 작성한 천무행 작전이 손우자의 손을 통해 그에게 건너왔다.

고원의 맹약을 지키는 선에서 다듬어 제출한 이가 문요다.

자신에게 책임이 넘어올 것 같아 찜찜하지만 손우자를 물고 늘어질 수는 없다.

그는…… 그저 검토하라고만 했으니까.

일군사와 이군사는 모르는 척 입을 닫고 있었다.

손우자가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원안이 보관되어 있으니 군사부에 책임을 물을 자는 없네. 장로회의를 거치며 변질된 것 아닌가.”

손우자가 군사부에 책임이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다.

문요는 구명줄을 잡기라도 한 듯 얼굴이 밝아졌다.

그때.

부사(副士) 한 사람이 들어와 보고했다.

회의 중인데 무슨 일이냐는 듯 손우자가 쳐다보자 부사가 황당한 얼굴로 손에 든 배첩을 받쳤다.

“회의 중인데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특임감찰이 군사부를 감찰하겠답니다.”

“뭐라고!”

이군사 사필염이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군사부를 감찰하겠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손우자는 피곤한지 다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배첩을 열어보았다.

군사부 감찰에 앞서 손우자를 만나고 싶다는 무한의 방문첩이다.

“내일 보자고 해라.”

손우자는 별거 아니라는 듯 배첩을 툭, 자신의 책상에 던졌다.

***

창문이 없는 길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어느 순간 지하로 내려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천하방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라더니.’

과연 그렇다.

천하방 총군사 손우자는 천하방주보다도 만나기 어려운 인물이다.

일 년에 수차례 암살 시도가 이뤄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천하방을 움직이는 삼축(三軸)의 하나이자 머리.’

그게 군사부다.

수많은 문파가 모인 천하방은 여타 방파와 운영방식이 달랐다.

천하방주가 이끄는 무력기관들.

장로회의가 관장하는 천하방 운영과 실무기관들.

그리고 천하방의 전략과 전술, 정보 등을 다루는 군사부.

세 곳의 세력이 균등하다 알려져 있고, 그래서 천하방을 움직이는 세 개의 축, 삼축이라 부른다.

마천이나 흑천, 아니면 숨어 있는 반대세력은 끊임없이 군사부를 노리고, 손우자는 그래서 거의 은둔하다시피 한다.

무한 역시 아직 그를 본 적이 없다.

접견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무한이 들어온 쪽 맞은편에 문이 하나 있을 뿐 창문조차 없었다.

사방 벽에서 타오르는 유등으로 답답하게까지 느껴지는 공기.

폐쇄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위압하는 분위기를 지닌 이곳을, 손우자는 선택했다.

천하방 총군사의 접견실이 과연 이곳뿐일까?

무한은 천목투심술을 극성으로 펼치고 나타날 손우자를 기다렸다.

천하방 총군사라면 천목투심술도 통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빈틈은 있을 것이다.

그 한 틈을 얻기 위해 천목혈에 집중했다.

이윽고.

덜컥.

맞은편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훤칠한 키에 무심한 얼굴로 걸어 들어오는 중년 서생.

“……!”

순간 무한의 미간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극성으로 끌어올린 천목투심술.

천목혈을 바늘로 찌른 듯한 통증에 절로 미간이 좁아든다.

“너무 누추한 곳으로 모셨나?”

평이한 목소리에 어울리는 지극히 평범한 얼굴.

자세히 보면 준수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도 특징이 없다. 뒤돌아서면 잊어버릴 듯한 인상이다.

단 하나.

피곤에 찌든 듯한 저 두 눈.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뱀같이 차가운 눈빛.

그 빛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팔성에 이른 천목투심술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평범한 인상이 맞은편에 앉았다.

‘이놈이다!’

그러나 무한은 직감할 수 있었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저 몸으로 느꼈을 뿐이다. 마치 검이 정수리에 꽂히는 듯한 충격에 척추가 전율했다.

무한은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올리며 예를 취했다.

“이제야…… 천하방 총군사를 뵙는군요.”

무의식적으로 손우자는 배제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바뀐 것은 고진과 고강후를 만난 이후다.

- 나는 네 적이 아니다.

적이 아니라던 도왕 고진.

그리고 당가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던 고강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해친 암중의 적은 내부에 있다.

무한은 그 머리를 찾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있다.

도왕이나 고강후가 원흉이라 여겨왔는데, 그들이 주범이 아니라면…….

자연 군사부로 눈길이 갔다.

하지만 손우자까지는 의심하지 않았다.

군사부는 검신의 의제 천기자가 창설하고 장악해왔던 곳.

총군사 손우자는 천기자의 대제자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손우자를 총군사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재사와 정보원과 조사관, 심지어 비밀임무를 띤 조직과 자체 무력대까지 지닌 군사부다.

그 실체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정확히 아는 이도 없다.

그렇기에 주범은 아니지만 원흉을 돕는 조력자가 숨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조력이 아니라 원흉이었다면…….

‘손우자를 제쳐놓고 음모를 꾸밀 수가 있을까?’

손우자를 의심하는 것보다 할아버지의 안목을 부정하는 게 더 힘들었다.

밤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더없이 냉철했다.

‘할아버지도 실수할 수 있다.’

천하제일인이자 신으로까지 불렸지만…… 천일고에 당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놀라웠던 할아버지의 안배에 익숙한 나머지 간과한 사실.

손우자를 바라보는 무한의 눈빛은 더없이 깊었고, 진실을 마주했음에도 내면은 혼란스러웠다.

‘이자가 어떻게…… 할아버지를 완전히 속일 수 있었을까?’

손우자는 피곤한 듯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면서 간단한 인사도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군사부 감찰과 관련이 있는 건가?”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지위가 높고, 감출 게 많아질수록 가면은 두터워진다.

손우자도 가면을 썼다.

그런데…… 한순간, 정말 찰나 같았던 그 한순간의 눈빛을 봐버렸다.

천운이었다. 천목투심술이 팔성에 이르지 않았다면 놓쳤을 것이다.

무한은 내면의 흔들림을 애써 누르며 덤덤하게 말했다.

“군사부 감찰은 절차에 따른 겁니다. 특임감찰을 맡은 이상 모든 기관이 대상이지요.”

“이제까지 군사부를 감찰하려던 이는 없었네만…….”

손우자가 쓴 가면은 평범함이다.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기에 가장 먼저 찾아온 겁니다.”

손우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았으니 본론부터 꺼내지 그래. 돌려 말하는 건 질색이니까.”

“당 소가주의 방주 접견은 왜 미뤄지고 있는 겁니까?”

손우자가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무한을 주시하며 말했다.

“돌려 말하는 버릇이 있군. 묻고 싶은 건 흑천과 당가의 싸움에서 천하방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아닌가?”

손우자는 평범하지만 과격했다. 곧바로 핵심을 꺼내들었다.

“나는 흑천과 당가의 분쟁을 원하네. 당가가 몰리는 순간 도움을 줘서 동맹을 맺고자 하네.”

“그래서 당전수를 노린 겁니까?”

“오해하고 있군. 자객은 흑천의 짓일세.”

불쾌할 질문임에도 손우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받아 넘겼다.

“이미 증거를 찾았군요.”

“…….”

손우자는 아무 것도 없는 탁자를 검지로 툭툭, 쳤다.

증거는 있지만 알려줄 수 없다는 태도.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고 참전할 생각인데, 당가 사람을 해칠 이유는 없지. 그보다…….”

손우자가 손가락질을 멈췄다.

“천하방을 적으로 간주하는 이유가 뭔가? 아버지 죽음 때문인가?”

느닷없는 화제 전환에 무한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그런가 보군.”

손우자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천하방 정도 되는 세력이면 밀정은 물론 딴 생각을 하는 놈도 있지. 하지만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짓은 어리석은 일이야.”

손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감찰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군사부에 숨어든 흑천의 밀정이라도 잡아주면 좋겠군.”

감출 것 없다는 시원시원한 행동과 말투…….

너무나 자연스러운 손우자의 행동에 무한은 자신이 본 눈빛이 착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가다 말고 손우자가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여기는 취조실인데…… 애들이 군사부 감찰에 대해 반감이 많은 모양이네. 내가 사과하지.”

그러고는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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