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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97화 (97/250)

97화

잠시 생각하던 당전수가 말했다.

“전쟁을 원하다고? 대체 왜?”

“전쟁으로 먹고 사는 자들. 그런 자들이 있어.”

“…….”

당가의 권력구조는 직계를 우선한다는 원칙이 있어 후계 구도에서 권력다툼이 많지 않았다.

과거에 친형제 간에 불상사가 일어난 적도 있긴 했으나 독왕 이후 외아들로 이어지는 바람에 최근까지 순탄하게 권력이 이어졌다.

그러기에 아직 어린 당전수는 천하방의 권력암투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한은 당전수를 직접 보고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알았다.

흉수는 당현전을 일장에 죽였다.

그런 그가 당전수를 놓쳤을 리가 없다.

소가주가 천하방에서 죽는다면 당가는 철저히 밝히려 할 것이고, 그 와중에 천하방과 적대관계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장로라면 좀 다르다. 적당히 경위를 알아보고 공동의 적을 끌어내 책임을 물을 여지가 있다.

‘애초에 적당한 자극을 노린 거야.’

당전수는 말이 없었다.

무한은 당전수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둘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당가의 무사가 와서 보고했다.

“도천부주께서 오셨습니다.”

당전수가 벌떡, 일어났다.

도천부가 천하방 실세라는 건 당전수도 안다.

고강후가 거침없이 들어오더니 당현전의 위패 앞에 분향을 하였다.

분향을 마친 고강후가 당전수에게 다가와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천하방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천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흉수를 잡겠네.”

고강후가 시선을 돌려 무한을 향해 말했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특임감찰을 맡아 사건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왔습니다.”

“네 임무가 중하다. 만일 흑천과 결탁한 자가 있다면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게다.”

“알고 있습니다.”

당전수가 입을 열었다.

“본가에도 연락을 했습니다. 장로의 원수는 본가에서 쫓을 겁니다. 그보다…….”

“아니다.”

고강후가 말을 잘랐다.

“천하방에서 일어난 일이니 천하방이 해결한다.”

고압적인 고강후의 말에 당전수가 위축됐다.

당가의 소가주이지만 천하에 위세를 떨치는 천하사패 도천부주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당전수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제가 천하방을 찾아온 용건을…….”

고강후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공적인 일 아닌가. 지금은 사적으로 조문을 온 것이니 공적인 경로를 밟아 듣고 싶군.”

고강후가 당전수의 용건을 무시하자 무한의 눈 깊숙한 곳에 이채가 스쳤다.

‘고강후는 당가의 일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의외였다.

천목투심술을 극성으로 운용했는데 고강후의 표정이나 음성은 확실히 그렇다.

이제까지 무한은 모든 음모의 뒷배로 고강후를 의심해왔다.

‘연막일까?’

좀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고강후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가버렸다.

당전수가 허탈한 얼굴로 털썩, 앉았다.

“공적인 경로라고? 접수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고!”

“군사부에 접수했지?”

당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부에 친구가 있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볼게.”

***

장로회의가 열렸다.

멸마대 처분을 논의하는 회의이기에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전경목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 염량은 소식이 없다.

무한은 잠시 생각하다 결심을 굳힌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 염 호위에게서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주세요.”

귀영에게 당부하고 장로전으로 향했다.

장로전은 회의를 참관하는 이들로 북적거렸다.

평소 보지 못한 광경이다. 대부분 장로를 배출하지 못한 문파들이다.

회의장 뒤에 배석한 참관인들 사이에 무한도 앉아 있었다.

“장로들께서 들어오십니다.”

장로들이 줄줄이 들어와 회의석에 앉았다.

대장로 갈천경이 배석한 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멸마대가 감숙지부를 잃고 귀환하였소. 대주 고벽후는 천무행 작전을 수행하는 유 장로를 살해하였고, 마천에게 난주를 내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소. 이에 대한 처분을 논의하는 자리요.”

유곡선과 친했던 육장로 모우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작전 수행 중인 장로를 살해한 건 죽음으로 죄를 물어야 합니다.”

구장로 강일모가 맞받았다.

“멸마대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소. 여기 장로회의에서 천무행 작전을 의결하였소. 내가 그렇게 반대했건만 끝끝내 관철시킨 결과가 지금이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멸마대 처분을 논의하는데 천무행 작전 이야기가 왜 나와!”

이장로 호중석이 말을 자르고 언성을 높이자 강일모가 바로 받아쳤다.

“이 모든 게 그 작전에서 비롯된 결과 아니오! 왜, 고원의 맹약을 무시한 게요!”

“맹약, 맹약! 마천 놈들에게 신의라도 기대한 거요? 그놈들이 그따위 맹약을 지킬 거라 생각했단 말이오!”

“천무행 작전 전까지는!”

강일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지켰소. 맹약을 깬 것은 우리요!”

“지금 마천을 두둔하는 건가?”

회의를 열자마자 언쟁이 벌어졌다.

구장로 강일모는 기천부 쪽 사람이고, 모공연과 호중석은 도천부와 가깝다.

대장로 갈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사안은 방의 기밀을 포함하고 있으니 참관인들을 내보내야겠네.”

갈천경이 기밀유지를 이유로 참관을 불허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참관인석에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기밀은 무슨 기밀! 천무행을 다녀온 애들이 몇인데 천무행 작전이 기밀이란 말이오.”

“현무대가 몰살당했소. 나는 들어야겠소.”

궤멸당한 현무대에 사형제나 친족이 있는 이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참관인들은 나가게! 대장로가 원활한 회의를 위해 조치한 걸 거스르겠다는 건가?”

장로 중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구장로 강일모가 다시 일어나 말했다.

“여기 참관인들의 형제들이 죽었소. 이들은 들을 권리가 있소!”

“맞소!”

참관인들이 가세했다.

대장로 갈천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회의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할 것이네. 첨예한 사안이니 회의 진행을 위해 불가피한 조처라고 이해해주게.”

“그럴 수는 없네!”

어디선가 노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직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경륜이 담긴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보니 참관인석 중간에 백발이 성성하고 피부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

“구중문(九重門) 전대문주 관격후!”

누군가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 은퇴한 노강호를 잊었기에 그제야 아, 하고 아는 척했다.

관격후는 천하방에서 수위를 차지하는 구중문주와 죽은 현무대주의 부친이다.

둘째 아들이 죽은 사인을 놓칠 수 없어 노구를 이끌고 온 것이다.

관격후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부터 천하방 대소사를 논하는데 기밀을 유지한다며 형제들을 배제했단 말인가? 여기 형제들이 마천의 밀정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생의 끝자락에 이르렀는지 노강호의 목소리는 바람이 흩어지듯 갈라졌으나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관격후는 검신 심양조도 한 수 양보하는 무림의 대선배다. 그가 직접 나서자 대장로 갈천경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소. 대신 회의 진행을 방해하지 말기 바라오. 소란을 피우면 그때는 회의를 중단하겠소.”

갈천경이 내공까지 실어 한마디 하자 침묵이 흘렀다.

그때, 무한이 침묵을 가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 진행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천무행 작전에 직접 참가하여 보고 들은 바가 있어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모두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무한을 보았다.

“상황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멸마대에 대한 처분을 논의하는 자리에 왜 당사자들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장로 호중석이 인상을 쓰며 외쳤다.

“여기는 장로전이다. 장로회의에 참관인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다니. 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가!”

그러면서 대장로 갈천경 앞에 있는 문서를 가리켰다.

“멸마대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나서 문서로 보고 받아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해명해야 하나?”

무한은 이장로 호중석에게는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참관인석을 향해 몸을 돌리고 정중하게 포권을 올렸다.

“당사자들이 없다면 모를까, 멸마대주가 방내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멸마대주의 입을 통해 직접 생생하게 듣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무한의 말에 관격후를 비롯해 참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은 다시 장로들을 향해 몸을 돌리고 정중하게 말했다.

“멸마대는 천무행 작전에 휘말려 지금 처분대에 올랐습니다. 결과에 따라 중죄를 받을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항변할 기회를 주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 조사서가 왜곡됐다는 것인가?”

“물론 아닙니다.”

무한이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다만, 현무대와 승룡대가 스러지며 귀중한 형제들을 잃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의 죽은 형제들의 골육이거나 사형제들입니다. 방의 명을 수행하다 죽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무슨 일을 하다,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이로 된 문서보다 멸마대의 입을 통해 듣는 게 훨씬 생생하고, 또한 의혹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겁니다.”

“옳소.”

누군가 맞장구쳤다.

장로들이 반발하려는데 무한이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고원의 맹약! 천무행 작전은 고원의 맹약을 감안하여 입안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승룡대에 이어 현무대가 오면서 고원의 맹약이 깨졌습니다. 현무대를 부른 이는 누굽니까? 원래부터 작전에 포함되었던 겁니까? 아니면, 유곡선 장로가 사적으로 부른 것입니까? 천하방이 체결한 고원의 맹약을 스스로 깬다면 고원의 맹약 집행자로서 멸마대주는 어떻게 하는 게 마땅했을까요? 고원의 맹약을 건드리는 작전이라면, 맹약의 집행자와 사전에 협의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무한이 문제가 될 만한 요소를 한꺼번에 쏟아내자 장로들이 당황했다.

“뭐라는 거야?”

“아무리 검천부주라지만 장로전에서 할 말 못할 말이 있지!”

“내보내!”

장로들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작전을 여기 장로전에서 승인하지 않았던가요?”

장로들이 입을 딱, 벌렸다.

장로회의에서 장로들에게 책임을 묻는 발언을 하다니.

“지금 장로전에 책임을 묻는 건가?”

대장로 갈천경이 불쾌한 어조로 말을 자르고 들었다.

틈을 얻은 장로들이 반발했다.

“검천부주! 발언을 자제하게!”

“방의 명에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건가?”

무한의 도발적인 발언에 장로전은 고함으로 뒤덮였다.

무한은 이제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왔다. 천하사패에서 검천부를 제외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도 유명무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로전에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지요. 설마 장로전의 결정에는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겠지요?”

무한이 쐐기를 박자 장로전이 발칵 뒤집어졌다.

참관인들조차 무한의 대담함에 놀랄 지경이었다.

무한이 참관인들을 향해 말했다.

“감숙 마천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멸마대주와 상의를 했다면, 과연 승룡대와 현무대가 그렇게 덧없이 스러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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