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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96화 (96/250)

96화

무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면밀하게 살폈다.

방 안은 난장판이지만 살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연 낭자가 혼자 거처한 것 같은데 여자치고 너무 살림이 없군요.”

“무공을 익힌 여자들은 사내나 다를 바 없다고요.”

귀영이 대답했다.

무한이 방을 다시 한 번 훑어보는데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잠시 후, 추각주 선우휘가 추각대원들과 들이닥쳤다.

“여기서 또 뵙는군요.”

선우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단서가 있다면 바로 추각에 말했어야 했소.”

“연관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부주 입으로 목격자라고 했다고 들었소. 집화각주에게는 말하고 사건을 수사하는 내게는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소?”

신이화가 추각에 제보한 모양이다.

“저를 피한 건 선 각주이신 듯한데요?”

객사에서 무한을 피했으니 맞는 말이다.

선우휘가 인상을 쓰며 핏자국을 보았다.

“살인사건의 목격자는 보호해야한다는 걸 모르셨소?”

“그런 거군요.”

선우휘가 계속 적대시하니 무한도 빈정이 상했다.

무한의 감정을 느꼈는지 선우휘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건드린 건 없소?”

“보다시피.”

무한이 양손을 들어 빈손을 보여주었다.

선우휘가 추각대원들에게 일렀다.

“뒤져라!”

추각대원들이 조심스레 집안을 뒤졌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집을 뒤진 대원이 선우휘에게 보고했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살림이 간단하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대원들을 더 풀어서 연이설을 추적하라. 죽었으면 시신이라도 가져와.”

선우휘가 명을 내리더니 무한에게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선우휘를 따라 집 옆 한적한 구석으로 갔다.

앞서가던 선우휘가 홱, 돌아서더니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 수사를 망치는 자는 그 누구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눈빛이 살벌했다.

“설령 천하사패라도 말이다.”

명백한 위협이었다.

선우휘는 대답도 듣지 않고 가려했다.

무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거기.”

무한이 선우휘를 불러세웠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감찰을 맡은 이상 내부의 개입이 있는지 밝혀내야 할 책임이 있지. 추각 역시 조사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대뜸 평대를 하자 선우휘가 어이없다는 듯 무한을 보았다.

“추각을 조사한다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우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한이 몸을 돌려 나오자 귀영이 다가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인상을 팍팍 쓰며 선우휘를 노려보았다.

기선제압용?

그러기에는 인상이 너무 평범하잖아.

“뭐라던가요?”

“다 듣지 않았나요?”

“부주를 협박하는 것만 들었습니다.”

“천하사패에 대해 반감이 아주 깊더군요.”

“솔직히 천하방에서 천하사패를 좋게 보는 이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힘이 없으니 눈치를 볼 뿐이죠.”

“이 정도인 줄을 몰랐습니다.”

“원래 가진 놈은 못 가진 자의 형편을 헤아리지 못하는 법입니다.”

무한이 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제 말은 세상인심이 그렇다는 거고, 부주께서야 그렇지 않죠. 저놈들이 부주를 몰라서 저러는 겁니다.”

귀영이 재빨리 둘러댔다.

무한이 자기 주먹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하마터면 손이 나갈 뻔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죠. 군자의 주먹은 무거워야 합니다.”

“입이 아니고?”

“주먹도 무거워야죠.”

“그렇군요. 무거운 만큼 한번 쓰면 단호해야겠지요? 일격필살?”

“그것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두 사람은 실없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당가 일행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갔다.

현장조사를 했으니 이제 당사자를 만나봐야 했다.

당가는 별원을 홀로 썼다.

천하방 내에서 장로가 죽은 만큼 최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 정문 앞을 지키는 무사만 네 명이었다.

별원 객청에 들자 주인 자리에 앉아 있던 안색이 창백한 소년이 일어나 맞아주었다.

당가 소가주 당전수였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검천부 심무한이라 합니다. 이번 사건의 특임감찰을 맡고 있습니다.”

“당전수요.”

당전수가 독기 어린 눈으로 무한을 보았다. 목소리에 불만이 섞여 있었다.

그는 천하방에 와서 알게 모르게 수모를 당했다.

당가는 사천의 패자이다. 당가를 대표하여 왔음에도 도왕을 만나지 못했다.

심지어 자객이 들어 장로 당현전이 죽었는데 조사를 맡은 감찰이 무척 어리다.

아무리 봐도 자기보다 한두 살 위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인다.

“범인은 잡았습니까?”

무한을 향한 당전수의 어조는 냉랭했다.

천하방 사정은 오기 전에 알아봤다. 천하사패 가운데 검천부가 몰락하여 이름만 이어가고 있다는 걸 당전수도 안다.

‘천하방이 끝까지 당가를 무시하는구나.’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박차고 사천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당가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

이십여 년 힘을 길러온 흑천의 세는 강했다. 사천의 흑도를 하나 둘 집어삼키고 있다.

청성과 아미는 각기 도문과 불문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흑천은 교묘하게 청성과 아미를 피해 당가의 영역을 파고드는 중이다.

할아버지 독왕이 만독곡으로 들어가 폐관에 든 지 벌써 팔 년여 세월이 흘렀다. 솔직히 살아계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가만으로 일전을 벌인다면 피해가 클 것이다. 천하방의 힘이 필요했다.

무한이 고개를 젓고는 정중히 포권을 하고 말했다.

“우선 조의를 표하고 싶군요.”

별원 편전에 당현전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한이 분향을 하고 참배를 한 뒤 다시 당전수와 마주 앉았다.

무한이 예를 다하자 당전수의 표정도 약간 풀렸다.

“천하방 한복판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네요.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흉수가 누군지도 모르다니. 게다가 본가의 추적을 막기까지 하고. 천하방이 당가를 안중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 아닌가?”

당전수가 분한 낯빛을 감추지 않았다.

당가가 자체적으로 흉수를 쫓으려 하는데 천하방에서 막고 있는 중이다.

무한은 자신보다 어린 당전수지만 정중하게 대했다.

“자객은 추각에서 쫓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임무는 자객과 결탁한 자가 있는지 찾아내는 것입니다.”

당전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천하방 안에 자객에게 협조한 자가 있단 말입니까?”

“천하방은 백여 문파가 모여 이룬 거대방파입니다. 그중에 다른 뜻을 품은 자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죠.”

당전수가 코웃음을 쳤다.

무한의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천하방이 밖에서 보기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뜻도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살인사건에 대한 책임을 희석하려는 뜻으로도 들렸다.

“천하사패의 일원인 검천부주의 입에서 천하방을 깎아내리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요.”

“어느 방파나 세작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가는 다르죠.”

“당가는 친족이 모여 이룬 문파이니 아무래도 세작이 숨어들기는 어렵겠군요.”

당전수가 손가락으로 탁자 팔걸이를 쳤다. 초조함을 감출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소가주께서 천하방을 찾은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당전수는 자신의 방문 목적을 이야기해도 되는지 잠시 생각했다.

도왕이나 총군사 손우자라면 몰라도 무한에게 당가가 아쉬운 상황이라는 걸 말하고 싶지 않았다.

“뭐겠습니까? 정마대전 이후 소원했으니 이제라도 잘 지내보자는 뜻이지요.”

무한은 당전수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구는 게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가문을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천하방 한복판에서 소가주께서 암습을 당했으니 소원했던 관계가 더욱 악화되겠군요.”

“……”

당전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믿고 따르던 장로 당현전이 눈앞에서 죽었다.

그 사실이 떠올랐는지 눈에 물기가 보이는 듯했다.

당전수는 당가주 천독수 당현모의 아들로 어려움 없이 자랐다. 이런 수모는 처음이다.

당전수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돌려 눈을 깜박여 눈물을 감췄다.

“에이 씨…….”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무한이 나직이 말하자 당전수가 고개를 돌려 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뭐라고요?”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된다고.”

무한이 반말을 하자 당전수는 기가 막혔다.

“당신, 아무리 검천부주라지만 나는 당가의 소가주인데…….”

무한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우리는 또래잖아. 말 편히 하자. 그래야 더 가까워지지 않겠어?”

자연스런 무한의 말에 당전수의 말문이 막혔다.

어이없으면서도 왠지 마음이 놓였다.

천하방에 와서 당현전이 죽고 불안해하고 있던 차였다.

가까워지자는 무한의 말에 절로 마음이 풀린다.

“누가 가까워지자고 했나?”

퉁명스레 말하며 고개를 돌렸으나 냉랭한 분위기는 걷혔다.

“솔직히 말하지. 흉수를 바로 잡기는 어려울 거야.”

당전수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무한을 쏘아보았다.

“왜?”

“내가 생각하기에 흉수는 천하방 사람이야.”

“……!”

당전수도 그럴 수 있다고 의심을 하기는 했으나 막상 무한이 천하방 짓이라고 하자 충격을 받았다.

“그, 그게 정말이야?”

무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천하방에는 싸움을 원하는 자들이 있어.”

“무인이 싸우는 건 당연한 거지.”

“당가는 흑천과 전쟁을 하려는 건가?”

“싸워야 할 땐 싸워야지.”

“솔직히 말해봐.”

당전수가 잠시 주저했다.

그가 천하방까지 온 것은 힘을 빌리려는 것이다.

힘의 균형이 맞으면 흑천도 섣불리 싸움을 걸어오지 못한다.

결국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무한은 그걸 정확히 짚어냈다.

“누군가의 의도에 놀아나는 건 억울하지 않아?”

“흥!”

당전수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누가 감히 당가를 농락한단 말이야.”

당전수가 말을 돌리려 하자 무한이 대놓고 말했다.

“천하방이 힘을 빌려준다면 흑천도 더 이상 세를 확장하기 어렵겠지. 그러면 전선이 고착될 거고.”

무한이 가볍게 탄식을 하였다.

“암중의 흉수는 당가와 흑천이 전면전을 벌이기 원해.”

“당가가 직접 흑천과 협상할 수도 있어.”

독왕이 없는 당가가 독자적으로 흑천과 전쟁한다는 건 손실만 있을 뿐이다.

흑천 또한 당가를 완전히 궤멸시켜서 청성이나 아미 등 정파의 이목을 끌어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당가는 자신들의 영역을 일정 부분 내주는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결과로 끝날 것이다.

무한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천하방이 세력 균형을 맞춰주면 전선이 고착될 것이고, 당가 홀로 협상하면 영역 조정 정도로 끝날 거야.”

당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천하방 안에서 당가의 소가주가 당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자객이 흑천으로 밝혀지면 천하방은 명분을 내세워 무력대를 파견하여 전면전을 벌일 거야.”

당전수는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낯빛이 침중하게 굳었다.

“천하방으로는 아쉬울 거 없지. 사천이 황폐해지겠지만 당가야 원래 껄끄러운 사이이니 신경조차 쓰지 않을 거야.”

“…….”

당전수의 창백한 낯빛이 더욱 해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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