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무한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귀영이 너무나 뻔뻔하게 나오니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가보세요.”
귀영이 나가자 무흔이 스르륵, 나타났다.
“연이설은 집화각으로 가서 몸이 아프다고 한 후 집으로 갔습니다.”
무한은 무흔에게도 연이설의 뒤를 쫓으라고 했다.
“……누군가 연이설을 죽이려 했습니다.”
무한이 흠칫 놀라 무흔을 주시했다.
“고수였습니다.”
“…….”
“연이설이 귀가하자마자 바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일단 막긴 했는데…… 성 밖 마을 경비 무인들이 들이닥치자 그대로 도주하였습니다.”
“그랬군요. 연이설은 무사합니까?”
“저도 바로 나왔기에…… 모르겠습니다.”
무한이 무흔을 주시했다.
그가 누군가의 일에 개입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무흔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
군사부 심처.
천하방 총군사 손우자의 서재에 그림자가 들었다.
책상에 앉아 있던 손우자가 고개를 들자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여인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세모꼴의 눈을 가진 늙은이였다.
손우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추노(醜老)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다니. 역시 흑천의 간자였나보군요.”
추노가 당현전을 살해할 때 목격자가 있었다고 했다.
손우자가 연이설의 정체를 알아냈는데, 이전부터 흑천의 밀정으로 의심해왔던 여인이었다.
“방해자가 있었습니다.”
손우자의 미간이 한층 더 좁아졌다.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자꾸 커지는 느낌이다.
“정체를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제 아래는 아니었습니다.”
“으음…….”
“손속을 나누는데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분간 바깥출입을 않는 게 좋겠습니다. 연이설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지요.”
손우자가 매듭을 짓자 추노가 스르륵, 사라졌다.
***
무한이 염량을 불렀다.
“섬서를 다녀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승룡대 전경목 대주에게 전해주세요.”
전경목은 섬서지부로 귀환한 후 대주로 승격되었다.
염량이 나간 후 무한은 검천부를 나섰다.
“어디 가시게요?”
“연 낭자를 만나 그날 밤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어보려고요. 감찰을 하려면 사건에 대해서도 알아야죠.”
귀영이 따라나섰다.
“굳이 따라올 필요 없습니다.”
“부주 옆에 붙어 있으면 있을수록 제게 좋습니다.”
“무슨 뜻이죠?”
“지난 번 휘주에서 돌아올 때 부주께서 귀로를 바꾸는 바람에 고강후의 의심이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부주의 신임을 얻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신임을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럼 제 목이 위태롭거든요.”
“귀 호위를 죽이고 싶으면 멀리 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귀영이 펄쩍, 뛰었다.
“그런 끔찍한 말은 하지 마십쇼.”
두 사람은 잠시 후 객사에 도착했다.
“여기는 집화각이 아닌데요?”
“우선 사건 현장부터 보죠.”
사건 후 당가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손님들이 묵는 별원으로 옮겨갔다.
당가가 묵었던 객사는 통째로 비운 상태였다.
“무슨 일입니까?”
객사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집법당 무사가 물었다.
“특임감찰이오.”
귀영이 대신 대답하고 무한이 철패를 보여주었다.
“지금 수사 중입니다만.”
“안에 누가 있습니까?”
“추각 각주께서 조사 중입니다.”
객사 일층은 반점으로 쓰는 너른 공간이고 이층과 삼층에 숙소가 있는 형태였다.
일층 한가운데 서서 뒷짐을 지고 위를 보고 있던 사내가 돌아보았다.
눈썹이 굵고 콧대가 휘어져 좀 험악한 인상이었다.
‘이놈이 범인이라고 해도 믿겠네.’
귀영이 속으로 생각했다.
사내가 말했다.
“여기는 금지다. 무슨 일인가?”
“검천부 심무한입니다.”
무한이 정중하게 포권하며 신분을 밝히자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추각 각주를 맡고 있는 선우휘요.”
무한이 철패를 보여주었다.
“당현전 살인사건 특임감찰을 맡았습니다.”
선우휘가 철패를 보고는 돌려주면서 무한을 아래위로 보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이 사람이…….”
귀영이 나서려는데 무한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사건 현장이 어느 방입니까?”
“삼층 용실이오.”
선우휘가 툭, 내뱉듯 말하고는 뒤쪽으로 갔다.
용실에도 추각 조사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뭘 저렇게 들쑤시고 다니는 걸까요?”
“글쎄요.”
무한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용실은 침실과 거실 그리고 손님을 맞을 수 있는 접객실로 나뉘어 있었다.
“여기서 죽었군요.”
귀영이 핏자국을 확인했다.
거실에 피를 토한 자국이 있었다. 의자 하나가 부서졌을 뿐 기물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다.
“여기로 들어왔겠군요.”
귀영이 창문으로 가더니 밖을 내다봤다.
“그리 높지 않으니 경공의 고수라면 충분히 들어올 수 있겠네요.”
무한은 침실과 거실, 접객실을 돌아보고는 일층으로 내려갔다.
선우휘는 보이지 않고 추각 사람들만 오가고 있었다.
“집화각으로 가보죠.”
집화각은 객사에서 멀지 않았다.
특임감찰이 왔다고 하니 집화각주 신이화가 직접 맞아주었다.
신이화는 중년에 접어든 여인이었는데 약간 경직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연이설을 찾으시는 건지요?”
“당현전 살인사건 관련하여 물어볼 게 있습니다.”
“연이설이 그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요?”
“목격자입니다.”
신이화의 미간이 살짝 좁혀진다.
“이설이 목격자라고요?”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보고는 없었는데?”
“확인해보시죠.”
신이화가 하인에게 연이설을 데려오라 일렀다.
잠시 후 하인이 와서 고했다.
“몸이 불편하다고 오늘 나오지 않았답니다.”
“연 낭자의 집이 어디입니까?”
“이설은 성 밖 마을에서 살고 있어요.”
“집을 아는 분이 있을까요?”
신이화가 몇 사람을 불러 물었는데 연이설의 집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신이화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급기야 집화각 총관을 불렀다.
“연이설이 집화각에서 근무한 지 얼마나 됐지?”
“이 년 정도 됐습니다.”
“어떻게 들어온 겐가?”
“그건 인사를 맡고 있는 백선당에 알아봐야 합니다.”
“당장 알아보세요. 그리고 연이설의 집이 어딘지 알아내요.”
신이화는 당황했다.
연이설이 사건을 목격하고도 잠적했다면 윗사람으로서 관리감독의 책임을 져야할지도 모른다.
“이설을 데려오는 대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무한은 별 소득 없이 집화각을 나왔다.
귀영이 말했다.
“제가 그랬잖습니까? 수상한 구석이 있는 여자라고요. 이미 튀었을 겁니다.”
무한은 곧바로 성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는 겁니까?”
“연 낭자 집이죠.”
“집을 아십니까?”
“무흔 대협에게 부탁해뒀습니다. 연 낭자를 감시해달라고 했죠. 누구처럼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죠.”
귀영이 머쓱해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무흔 대협의 은신술은 참 대단하단 말이죠. 지금은 어디 있을까요?”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겠죠.”
***
고강후가 장자 고우를 불렀다.
“요즘 술자리가 잦다고 들었다.”
고강후가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의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처신에 신경 써야 할 게다.”
“주의하겠습니다.”
고강후가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였다.
고우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들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고우가 어느 순간 화들짝, 놀랐다.
“도천대를 맡아라. 신 대주에게 일러놓겠다.”
도천대.
고강후의 직속 무력대로 도천부 최강 전력을 자랑한다.
고우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고우가 도천대의 지휘권을 인계 받으면 도천부 후계자로서의 입지가 굳어진다.
“그리고…… 당가 장로 살인사건을 은밀히 조사해봐라.”
“예?”
“내성에서 일어난 일이니 내게도 책임이 있다. 도천대를 죄다 풀어서라도 범인을 잡아야 한다.”
고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그런데 무한에게 특임감찰을 맡기신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기왕이면 고수나 고현이 맡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고강후가 고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녀석들이 그러더냐?”
“감히 아버님 하신 일에 왈가왈부하겠습니까.”
고우가 한껏 공손하게 대답했다.
“우아야. 권력은 나누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나눠주다 보면 어느새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기어오르려 할 것이다. 아예 싹을 틔울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고강후는 그렇게 살아왔다.
천하사패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이면서도 항상 주위를 경계했다.
어느 문파가 조금 세력이 커질 것 같으면 바로 눌러버리거나 반대파를 키워 견제를 하였다.
“무한, 그놈은 독이 든 술잔을 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우가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놈이 대소문파를 예방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잘 보이려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자기 세력으로 삼을 곳을 마음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물을 준비해서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잠시 호의를 얻어 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권다툼이 시작되면 그 누구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죠.”
“그놈은 그게 두려워서 방내 직책을 기피하고 있지. 그래서 자연스레 끌어들인 것뿐이다. 그놈이 특임감찰을 맡은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문파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이제껏 제 손으로 뭐 하나 이뤄본 적이 없는 애송이가 특임감찰이라면 불만을 갖는 것도 당연하지.”
고강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는 거친 들판에서 살아남기는 힘든 법이다.”
“저는 아직 아버님께 많이 배워야 할 듯합니다.”
고우가 은근 고강후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속마음은 달랐다.
‘왜 이리 번거로운 수를 쓰는 거지? 그냥 눌러버리면 되잖아. 그깟 놈 하나 처치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은 좋은 날이다. 도천대의 지휘권을 받은 날이니까.
도천부의 수장으로 가는 길이 확실하게 굳어졌다.
“어서 네가 도천부를 장악해야 이 아비도 마음이 편할 것이다. 열심히 하거라.”
고강후가 고우를 격려했다.
***
연이설의 집은 성 밖 마을 골목길 끝에 있었다.
“이 집인가 본데 조용하네요.”
“아파서 누워 있는 거 아닐까요?”
귀영이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귀영이 담을 넘었다.
“앗!”
곧 귀영이 놀라는 소리가 났다.
무흔에게 보고를 받았던 무한은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난장판이겠지.
“무슨 일입니까?”
대문이 벌컥, 열리고 귀영이 황급히 말했다.
“싸운 흔적이 있습니다.”
무한이 들어가니 거처로 쓰는 집 창문이 부서진 게 보였다.
“우와, 핏자국 좀 보시죠. 저 정도 피를 흘렸으면 죽었다고 봐야겠네요.”
귀영의 말대로 방은 물론 마당까지 핏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무한과 귀영이 핏자국을 따라갔다.
핏자국은 집 뒤로 이어졌다.
집 뒤는 마을 연못이다.
“죽인 다음 시신을 물에 던진 게 아닐까요?”
귀영은 열심히 추리하였으나 무한은 말없이 둘러볼 뿐이다.
‘어디로 갔을까?’
흉수는 아니더라도 연이설은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무흔에게 보고를 들었음에도 직접 와서 살펴보는 이유다.
연못 주위로 크고 작은 집들이 붙어 있어 누군가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어제 아침에 돌아갔다가 아프다고 병가를 냈으니까…… 어젯밤에 일이 벌어졌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