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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94화 (94/250)

94화

“특임감찰이라니요?”

“당현전 살인사건은 아무래도 내부 소행 같네. 제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외성과 내성의 경계를 뚫고 객사에 들어와 사람을 해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다면 내부에 잠입한 흑천의 첩자일 가능성이 높지.”

고강후가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심무한은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고, 그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네. 이번 사건을 담당할 특임감찰로 딱 맞지.”

손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맞장구치는데 왠지 건성으로 들렸다.

고강후는 빈정이 상해 대놓고 물었다.

“자네, 내게 서운한 게 있나?”

손우자가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연달아 큰일이 터지니 골치가 아플 따름입니다.”

“좀 쉬는 게 어떻겠나? 총군사를 맡은 지 십 년이 넘었잖나.”

“그럴 생각도 있습니다만 지금 상황이 녹록치 않군요.”

마천이 난주까지 내려오고 흑천이 나날이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다. 군사부의 일이 막중하다.

고강후는 손우자가 그만둘 수 없음을 알면서도 빈말을 던져 본 것뿐이다.

“그렇겠지. 자네가 없으면 천하방이 돌아가지를 않으니.”

“그건 아닙니다. 천하방은 천하와 같아서 누구 한 사람이 없다고 해도 굴러갑니다. 다만 발을 뺄 틈이 없군요.”

고강후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투툭, 치며 말했다.

“나는 자네를 믿고 있네. 함께 잘해보세. 좋은 날이 올 걸세.”

지나가듯 말했으나 그 안에 담긴 함의를 모를 리 없는 손우자다.

“군사부는 항상 도천부를 지지해왔지요.”

손우자가 대답했다.

무심한 눈빛이었다.

***

소소는 무한의 연락을 받자 바로 나왔다.

두 사람은 군사부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로 갔다.

“군사부까지 오다니. 무슨 일이야?”

“고 대형에 대한 군사부 의견을 알고 싶어.”

“나도 몰라. 철저히 비밀로 조사하고 있어.”

소소가 주위를 살피곤 아무도 없는 게 확실하자 소곤거렸다.

“그냥…… 이건 내 느낌인데 아무래도 상관살해죄로 장로회의에서 처리할 것 같아.”

“집법당이 아니라 장로회의라고?”

“작전 실패에 대한 문책은 장로회의에서 할 수 있지.”

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 예상한 바다.

“아마도 중형이 떨어질 거야. 장로가 죽었잖아. 자기들 위신이 있으니 가만 두지 않겠지.”

“…….”

잠시 생각을 정리한 무한이 화제를 돌렸다.

“당가 소가주가 온 이유가 뭐야?”

“흑천이 사천으로 진출하고 있나봐. 지원을 요청하러 온 거야.”

“그랬군.”

“군사부에서는 흑천의 첩자가 한 짓으로 보고 있어.”

무한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던 연이설을 떠올렸다.

‘아냐, 연이설의 무공이 그 정도는 아니야.’

연이설의 무공은 아무리 높게 쳐줘야 일류에 불과했다.

혹시나 하여 물어봤다.

“자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아?”

“남자야. 장법의 고수인가봐. 당가의 장로가 일장에 당했잖아.”

“당가의 장로라면 적어도 초절정일 텐데…… 일장에 격살하다니.”

“엄청난 고수라는 뜻이지.”

소소와 헤어진 무한이 검천부로 돌아왔다.

집법당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법당주께서 찾으십니다.”

고변장 때문인가?

무한은 감숙의 변고를 유곡선이 맹규를 어긴 사안으로 부각시킬 생각이다.

“갑시다.”

무한이 일어서는데 다시 한 사람이 왔다.

“감찰단에서 왔습니다. 단주께서 찾으십니다.”

감찰단이 찾는다니 무한도 의외였다.

무한이 집법당 사람에게 말했다.

“감찰단에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감찰단은 내성에 있고 집법당은 외성에 있으니 동선으로 봐선 그게 맞았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집법당 사람이 돌아가자 무한은 바로 감찰단으로 갔다.

“검천부주를 모셔왔습니다.”

마루를 깐 집무실 끝에 서탁이 있었고, 강퍅한 인상의 노인이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심무한입니다.”

감찰단주 은진언은 미간에 깊은 내천자를 그리며 탁자에 놓인 서류를 무한에게 내밀었다.

표정이나 행동에서 무한에 대한 거부감이 절로 흘러나왔다.

은진언이 무한을 쏘아보았다.

“모르나?”

“이게 뭡니까?”

은진언이 무한을 살펴보고는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봤으니 알 게 아닌가. 임명장이다.”

“임명장?”

무한이 서류를 집어 읽었다.

“저를 당가 살인사건 특임감찰에 임명한다고요?”

“자네가 신청한 게 아닌가?”

“제가 왜 이런 걸 신청합니까? 어떻게 된 일이죠?”

“장로회의에서 내려온 것이다. 당사자가 모른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은진언이 무한을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폐부를 찌를 것만 같다.

무한이 임명장을 읽어보고 말했다.

“저는 신청한 바가 없고 맡을 생각도 없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무한이 임명장을 되돌려 주려 하자 은진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네.”

“예?”

“명령서에 방주의 직인이 찍힌 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하나?”

“당사자가 원치 않는데요?”

“직책을 맡고 안 맡고는 자신의 뜻에 달려 있지. 하지만 방주의 명을 따라야 하는 게 천하방도들의 의무라네.”

은진언은 원리원칙을 무척 따지는 성격이다.

감찰단은 권한이 막강하여 요직 중의 요직으로 꼽힌다.

무한이 천하사패라는 지위를 내세워 특임감찰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퉁명스레 대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목소리가 누그러들었다.

“뭔가 이상하군요. 저는 아직 어리고 천하방에 대해서도 모르는 바가 많습니다. 감찰 업무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네는 미흡할지 몰라도 검천부를 무시할 자는 없네.”

무한이 다시 입을 열려는데 은진언이 말문을 막았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네. 내가 무를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만 하게. 자네는 특임감찰로 선임됐고, 그에 따라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 걸세.”

무한이 난감해하는 듯 보이자 은진언이 조언을 하였다.

“범인은 집법당 추각에서 추적할 걸세. 특임감찰의 임무는 살인사건과 관련해서 내부의 소행인지, 외부 자객이 들었다면 내부에 협조자가 있는지 파악하는 거지.”

“그거야 감찰단에서 평소 하는 일 아닙니까? 굳이 특임감찰을 내세울 이유라도 있습니까?”

“집법당에 파견될 걸세. 물론 중간 중간 내게 보고해야지.”

은진언이 서랍에서 철패를 하나 꺼내 건넸다.

“특임감찰임을 증명하는 패일세.”

무한이 철패를 받았다.

“충고 하나 하지. 진실에 다가갈수록 입이 무거워져야 하네.”

말을 마친 은진언은 가보라고 손을 저었다. 무척 무미건조한 자였다.

무한은 감찰단을 나와 집법당으로 갔다.

집법당주 변위초는 모든 이가 두려워하는 자였다.

변위초 역시 무한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부른 이유는 고변이 아니라 특임감찰 업무 때문이었다.

“감찰은 추각과 상의해서 진행하면 되네. 다만 함부로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군. 수사에 지장이 생기면 책임을 묻겠네.”

집법당은 추각과 판각이 있다.

추각은 사건을 수사하고 판각은 법을 집행한다.

“자네가 고변한 일은 판각에서 처리하고 있네. 특임감찰 임무가 판각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없도록 처신을 잘하게.”

그러면서 마뜩잖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자네의 고변이 무척 민감한 사안이라는 건 아는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입니다.”

유곡선이 고원의 맹약을 어긴 건 사실이다.

방주령까지 동원한 작전이니만큼 책임 소재가 도왕 고진에게까지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누가 도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대쪽 같은 변위초라고 해도 난감한 사안이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도 사실이네.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져야 그 다음에 진실을 논할 수 있지. 자네 고변이 진실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무한이 일어나려다 말고 물었다.

“장로회의에서 멸마대에 대한 징계를 처리하는 게 합당한 겁니까?”

“가능하네. 작전 실패에 관한 건 장로회의에서도 따질 수 있네.”

***

도천부의 장손 고우가 형제와 사촌까지 불러 술자리를 열었다.

“형님들, 이건 아니잖습니까? 어째서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특임감찰을 맡긴다는 겁니까.”

도천부 셋째 고동후의 아들 고영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우가 인상을 썼다.

“좋은 자리에서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거냐?”

도천부 둘째 고성후의 장자 고군이 고영을 거들었다.

“특임감찰이라면 고우 형님께서 맡으셨어야지요.”

고우는 말없이 술잔을 들어 마셨다.

동생들이나 사촌동생들 모두 앞에서는 고우가 맡아야 한다고 떠들지만 속으로는 고소해하고 있다는 걸 안다.

천하방의 이목이 쏠린 사안이니만큼 특임감찰에 대한 관심도 높을 것이다.

‘제기랄.’

천하방을 고씨 가문, 아니 언젠가는 자신의 것이 되리라고 여기고 있는 고우로서는 무한이 특임감찰을 맡은 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아버지 고강후처럼 장자로서의 체면을 중시한다.

고우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결정하신 일이다. 깊은 뜻이 있겠지. 헤아려봐라.”

마치 자신은 알고 있으니 맞춰보라는 표정이다.

사실 고우도 모른다. 아버지 고강후가 왜 무한을 특임감찰로 임명했는지.

감찰권을 쥐고 있으면 문파의 수장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어느 문파든 수시로 드나들 수 있고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천하방 여러 문파에서 고우를 도천부의 후계자로 보고 대우하지만 감찰권까지 쥔다면 날개를 다는 셈이다.

그러니 못내 아쉽기만 하다.

“부주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들 꼬리를 내리는데 고영은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큰아버지께서 잘못 생각하신 거라고요. 그놈이 얼마나 음흉한 놈인데.”

고영은 무한에게 당한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괜한 모함을 하지 마라. 천하사패는 한 식구라는 할아버님 말씀 잊었느냐?”

고우가 점잖게 타일렀다.

‘흥!’

고영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가증스런 위선자.’

그가 생각하기에 고우는 고강후를 쏙 빼닮았다. 가진 바 욕심은 가득한데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한다.

고영이 그리 생각하는지를 모르는 고우는 한껏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한이 중책을 맡았다면 도와줘야지. 조만간 한번 만나봐야겠군.”

마치 친형제를 두고 하는 말처럼 다정하게 들렸다.

***

“특임감찰이 되셨으니 날개를 단 셈이군요.”

귀영은 속도 모르고 아첨을 했다.

“날개라는 건 위험한 겁니다. 부러지면 추락할 수밖에 없으니까.”

“왜 약한 소리를 하실까요? 잘 하실 거면서…….”

귀영이 실실 웃었다.

무한이 중책을 맡으니 은근 자신의 지위까지 올라간 기분이다.

‘특임감찰의 호위…….’

특임감찰은 두 명의 호위와 네 명의 조사관을 둘 수 있다.

귀영은 당연히 자신이 호위 중에 하나가 될 것이라 여겼다.

‘한낱 이목에서 천하방의 녹을 먹는 호위라니…….’

꿈꾸는 귀영을 보고 무한이 실소를 흘리며 물었다.

“연이설의 동태는 지켜보고 있지요?”

“그건…….”

귀영이 말을 더듬었다.

“임무를 대충 잊어버리고 그러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돌아가기 전까지만 감시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귀영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혈도가 풀린 연이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말도 없이 가버렸다.

“다음부터는 좀 더 명확하게 명을 내려야겠군요.”

“당연히 그래야죠. 저는 시키는 대로 하는 호위거든요.”

뻔뻔한 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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