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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존무한-93화 (93/250)

93화

“흑!”

담벼락을 간신히 넘은 연이설은 땅바닥에 떨어지며 짤막한 신음성을 흘렸다.

어둠에 싸인 검천부 후원.

그곳에는 아무런 기척도 일지 않았다.

‘다행이다.’

연이설은 땅바닥에 누운 채 몸을 살폈다.

‘으으. 되게 아프네.’

장력이 스친 등이 욱신거렸다.

제대로 맞았다면 척추가 부러졌을 터, 정말 아슬아슬했다.

‘엄청난 고수였어. 당가의 장로를 두어 수만에 해치우다니.’

복면을 썼기에 눈만 보았다.

세모꼴의 눈.

마치 뱀과 같이 차디찼다.

‘눈 주위로 보아 나이가 있는 자였어.’

연이설은 죽은 듯 누워서 자신이 본 걸 되짚어 보았다.

천하방에서 귀빈들만 묵는 객사에 당가의 소가주 일행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살펴보러 갔다.

당가가 천하방을 방문한 목적을 알아내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각에 당가의 소가주를 노리는 자객이 들었다.

흑의복면을 한 자였는데 장법의 고수였다.

소가주가 중상을 입고 위기에 처했을 때 당가의 장로가 나섰다가 격살 당했다.

창밖에 숨어서 지켜보던 연이설이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기척을 내고 말았다.

흑의복면인은 곧바로 그녀를 향해 장을 후려쳤다. 가까스로 몸을 돌렸으나 장력이 등을 스쳤다.

마침 당가의 무사들과 천하방 경비조가 달려왔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사람들이 몰리자 홀연히 사라졌다.

‘대체 누굴까? 천하방 한복판에서 당가 소가주를 암살하려 하다니.’

흑의복면인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는데 머리맡에서 누군가 말했다.

“내 운지초를 깔고 뭐하는 거냐?”

“……!”

연이설이 놀라 발딱 일어나며 비수를 겨눴다.

어둠 속의 인물은 가만 서 있을 뿐이다.

“도적이냐?”

연이설이 숨어든 곳은 검천부의 후원, 목령산인이 머무는 전각 뒤였다.

잠귀 밝은 목령산인이 그녀가 흘린 신음성에 나와 본 것이다.

연이설은 상대가 비쩍 마른 노인인 걸 보고 약간 안심했다.

“조용히 계시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네가 내 운지초를 망가뜨렸는데 조용히 있으란 말이냐?”

목령산인이 연이설의 발밑을 가리켰다.

연이설이 놀라 발을 들어 옆으로 옮겨가자 목령산인이 화를 냈다.

“제형초까지! 약초밭을 다 망가뜨릴 셈이냐?”

목령산인이 손을 뻗었다.

연이설은 비수를 들어 막으려 했지만, 어떤 수법에 당한지도 모른 채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

목령산인이 쓰러지는 연이설의 목덜미를 잡아 약초밭에서 끌고 나왔다.

***

한밤중에 목령산인이 웬 여자를 끌고 왔다.

기절한 여자를 거실 바닥에 놓고는 말했다.

“이 도둑이 내 약초밭을 망가뜨렸다.”

“도둑?”

“밤중에 담을 넘으면 도둑이지. 검천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네가 계산해라.”

“계산하다뇨?”

“약초 값을 물어줘야지.”

산도 아니고 기름진 땅도 아닌데 약초를 키울 수 있는 건 목령산인이 비싼 거름을 주기 때문이다.

무한은 목령산인의 억지에 웃음이 나왔다.

“내일 아침에 유아에게 말해놓겠습니다.”

순순히 약초 값을 물어준다고 하자 목령산인이 돌아갔다.

야행복을 입은 여자는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때 귀영이 허겁지겁 들어오다 여자를 보고 놀랐다.

“내성에 자객이…… 어? 이 여자는 누굽니까?”

“검천부 담을 넘었답니다.”

모로 누워 있는 여자를 귀영이 발로 슬쩍 밀어 똑바로 눕혔다.

“당가의 장로를 죽일 만한 고수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당가 장로? 당가 장로가 죽었다는 말입니까?”

“예. 원래 당가 소가주를 노렸는데 장로가 몸으로 막았다더군요. 지금 자객을 찾기 위해 사방을 뒤지고 있고요. 이 여자, 여기 두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는데요?”

귀영이 여자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으음.’

연이설은 정신을 차렸으나 눈을 뜨지 않았다.

귀영이 손가락으로 연이설을 볼을 찔렀다.

“잠입 훈련을 받은 모양이네요. 정신이 들었는데 기절한 척 하고 있어요…… 정말 자객일까요? 호위부에 알려야 하나?”

귀영의 말에 연이설이 눈을 떴다.

“어이쿠.”

연이설이 갑자기 눈을 뜨고 노려보자 놀란 귀영이 뒤로 물러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연이설이 말했다.

“혈도를 풀어주세요.”

정신은 들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도둑 주제에 당당하네.”

귀영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난 도둑이 아니에요. 자객을 만나 도주하다 약초밭에 뛰어든 것뿐이에요.”

“자객을 만났다고?”

“난 집화각 연이설이에요. 객사에 일이 있어 갔다가 자객을 만나 죽을 뻔 했다고요.”

“야행복 입고?”

귀영이 손가락으로 연이설의 복장을 가리켰다.

“평소 복장이에요.”

“하, 그 말을 믿으라고? 누굴 바보로 아나보네.”

귀영이 혀를 찼다.

무한이 말했다.

“자객을 만난 상황을 말해봐요.”

연이설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댁은 누구신데요?”

연이설은 앳된 청년의 신분을 짐작하면서도 굳이 물었다.

“검천부주시다.”

귀영이 대신 대답했다.

연이설이 아, 하고 놀란 척 하고는 말했다.

“외빈 객사에 일이 있어 가다가 수상한 자를 발견하고 뒤를 쫓았는데, 당가에서 온 분들이 묵는 숙소로 잠입하더군요.”

“…….”

“그자가 당가 숙소로 간 후 싸우는 소리가 났지요. 궁금해서 들어가다 마주쳤습니다. 보자마자 살수를 펼치기에 도주하다가 검천부 담까지 넘은 겁니다. 거기가 약초밭인 줄은 몰랐습니다.”

“많이 놀랐겠군요.”

“예. 이제 혈도를 풀어주세요. 장력을 피하긴 했지만 등을 스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의원에게 가봐야겠습니다.”

“그분의 점혈 수법은 독특하여 저도 풀기 어렵습니다. 거처를 내줄 테니 오늘은 여기 묵고 점혈이 풀리면 가세요.”

무한이 눈짓을 하자 귀영이 다가왔다.

“안 돼요. 남자에게 제 몸을 맡길 수 없어요.”

“허어. 나를 뭘로 보고. 나이도 제법 먹어 알 거 다 알겠구먼.”

귀영이 연이설을 번쩍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당가의 장로가 죽었다고?’

천하방 한복판에서 당가의 사람이 피살되었다.

작은 일이 아니다.

귀영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수상한 여자입니다. 집화각 사람이 객사를 관리하기는 하지만 오밤중에 갈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있을 수도 있겠죠.”

“당가의 장로를 해쳤다면 고수입니다. 그런데 흉수가 저 여자를 놓쳤다고요?”

“확실히 수상하네요.”

무한이 맞장구쳐주자 귀영은 신이 났다.

“저 여자가 흉수일지도 모릅니다. 호위부에 알려야 합니다.”

“호위부에 알리는 건 차차 해도 되니 일단 잘 감시하세요.”

무한 역시 연이설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흉수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

멸마대의 귀환은 갑작스런 살인사건으로 묻혀버렸다.

천하방 안팎은 온통 살인사건에 대한 소문으로 어수선했다.

보통 사건이 아니다.

죽은 이가 당가의 장로 당현전이니까.

절정고수가 암습을 받아 죽었다는 사실에 범인에 대한 추측이 분분했다.

군사부 손우자의 집무실에 도천부주이자 천하방 내성주 고강후가 찾아왔다.

“체면이 말이 아니야. 내성에 자객이 들다니.”

고강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기 관할인 내성에서 당가가 피습을 당했으니 위신이 말이 아니다.

천하방 후계자 논의가 물밑에서 이뤄지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흑천이 갈수록 대담해지는군. 그냥 두고 볼 수 없네.”

고강후는 이 사건을 흑천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손우자는 가만 듣기만 했다.

“당가에서 소가주가 온 이유가 뭔가?”

당가 소가주 당전수 일행이 방주의 면담을 요구한 게 며칠 전이다. 군사부 차원에서 차일피일 미루다 사달이 나고 말았다.

손우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흑천이 사천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천하방의 개입을 요청하러 왔을 겁니다.”

“흥! 세가랍시고 뻗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힘을 빌려달라는 겐가. 도왕께서는 뭐라시던가?”

고강후는 자신의 아버지를 도왕이라는 별호로 불렀다.

“당전수는 아직 방주를 뵙지 못했습니다.”

“개입의사가 없으신 모양이군.”

고강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할 생각인가?”

“우선 범인부터 잡아야지요.”

“알면 당장이라도 잡지.”

고강후가 인상을 썼다. 계속 물어도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오니 욱한 것이다.

군사부 총군사라는 직책 때문에 고강후도 막 부리는 수족 대하듯 할 수 없었다.

손우자는 고강후가 불쾌해하는 것을 모르는 척 담담하게 말했다.

“예사 고수가 아닙니다. 당현전은 명색이 당가의 장로입니다. 그런 그가 몇 초식 나눠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네. 그런 고수가 자객 노릇을 하다니.”

“이번 기회에 밀정들을 한번 걸러내야겠습니다.”

“밀정들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두고 보자고 한 사람이 자네 아닌가.”

“거의 다 파악은 됐습니다. 이제 잡아서 문초를 해야 할 때죠.”

“으음. 범위는?”

“구파와 세가의 밀정은 놔둬야죠. 흑천만 추려내기로 하지요.”

“마천의 밀정은 없나?”

손우자 가벼운 탄식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연히 있을 겁니다. 그런데 파악하기가 정말 어렵군요.”

마천의 밀정이 천하방에 있는지 그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정황상 있는 게 맞는데 움직임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실패했으니 밀정이 있다면 더욱 깊이 숨었을 겁니다.”

손우자는 검마의 전향을 기회로 마천의 밀정을 잡아내고자 했다.

장로 유곡선을 내세운 천무행 작전은 내부에 스며든 마천의 밀정을 잡기 위한 덫이었다.

그런데 검마가 중도에 도주하고, 소마가 직접 막강한 무력을 끌고 나서는 바람에 승룡대와 현무대만 희생되고 말았다.

“천하의 손 군사도 잡아내지 못했다면 없다고 봐야겠지.”

고강후가 말하다 말고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 인상을 썼다.

“고벽후는 어찌할 겐가.”

고벽후와 멸마대는 군사부 안가에 갇혀 있었다.

“조사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장로회의가 열리기 전에 보고할 겁니다.”

“유 장로를 죽였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하네.”

“재밌는 투서가 들어왔습니다.”

손우자가 자신의 서탁에서 문서 하나를 가져와 고강후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집법당에서 보내온 고변장 사본입니다.”

“고변장?”

“검천부주가 작성한 겁니다.”

“검천부주? 심무한 말인가?”

고강후가 문서를 펼쳐보았다.

감숙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유곡선 장로에 대한 고변장입니다. 고원의 맹약을 어겼으니 이에 대한 조사를 해달라는 거죠.”

“맹랑한 놈이네? 대체 무슨 의도로 집법당에 고변장을 낸 거지?”

“고원의 맹약과 관련한 고변이 들어왔으니 집법당에서 고벽후를 내달라고 할 명분이 섰죠.”

고강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집법당이 나선다고?”

집법당주 변위초는 깐깐한 인물이다. 그가 나서면 골치 아파진다.

“으음.”

고강후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손우자를 봤다.

“군사부가 애를 먹겠군.”

천무행 작전은 군사부에서 나왔다.

“군사부야 장로회의 결과를 수렴해서 집행한 것이니 별 탈이야 있겠습니까?”

고강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천무행 작전의 원안은 군사부에서 나왔으나 장로회의를 거치며 약간 바뀌었다.

당시 입김을 불어넣은 게 고강후다.

손우자는 그걸 지적한 것이다.

‘이 자식이?’

장로들 사이에서 천무행 작전에서 무력대가 둘이나 궤멸되고 천무관 문하생들이 죽을 뻔했기에 무리한 작전이라는 원성이 높았다.

연루되면 좋을 일이 없다.

고강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심무한은 직책이 없잖나?”

“그렇지요.”

“특임감찰을 맡기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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